‘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여주인공’ 전형에서 벗어난 드라마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1 포스터 ⓒCW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1 포스터 ⓒCW

레베카 번치는 뉴욕의 유명 로펌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업무 스트레스에 찌들어 사는 자신이 너무나 불행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 조쉬 챈과 우연히 마주친 레베카는 이것이 하늘의 계시라고 여겨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진 뒤 조쉬가 사는 서부의 웨스트 코비나로 이사 온다. 레베카는 ‘운명의 짝’ 조쉬와 행복한 커플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무작정 이사를 오고 나니 조쉬에게는 이미 매력적인 여자친구 발렌시아가 있었고, 조쉬의 친구인 그렉이 오히려 레베카에게 관심을 보인다.

여기까지 들으면 넷플릭스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발칙한’(한국에서 이 단어는 얼마나 남용되는가) 로맨틱코미디로 라벨링될 것이다. 약간 정신없는 여자 주인공이 좌충우돌하다가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찾아가는 즐거운 드라마처럼 여겨질 것이다. 적어도 시즌 1까진 대충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중간중간 레베카의 ‘과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며 눈을 가리고 차마 화면을 보지 못한 적은 종종 있었다. 10대 시절의 레베카는 조쉬와의 행복한 밀어(실은 조쉬는 레베카를 차려는 중이었다)를 방해하는 엄마한테 ‘bit**h’라는 욕까지 내뱉고, 조쉬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그렉과 섹스 직전까지 가면서도 그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레베카는 조쉬를 비롯해 새로 사귀게 된 친구들에게 ‘멋지고 세련되고 쿨한 여자’로 보이고 싶기 때문에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고 허세를 부린다. 그래도 여기까진 괜찮았다.

본격적인 고통은 시즌 2에서부터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베카의 본색이, 그리고 제작진의 본심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극중 인물의 노래-이 드라마는 뮤지컬이기도 하다-속 한 구절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우리에 비하면 캠프파이어 같았지”). 레베카는 더 이상 통통하고 귀여운 ‘말썽꾸러기’가 아니다. 그에게는 정신적 문제가 있다. 그는 그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조쉬 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질 못한다. 그리고 시즌1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과거가 조금씩 밝혀진다. 유대인 어머니와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느끼는 애증부터 시작하여 사랑받지 못했다는 결핍감이 그를 어떻게 파괴적인 연애로 떠밀었는가. 이제 더 이상 레베카를 둘러싼 삼각관계는 웃으면서 볼 수 있을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드라마는 점점 어둡고 시니컬하게 바뀌었고, 레베카는 본질적으로 망가진 인물임이 밝혀진다. 제목의 ‘크레이지’라는 단어는 더 이상 ‘사랑에 미친’ ‘엉뚱한 삼차원’의 의미가 아니다. 레베카는 말 그대로 미친 것 같다. 그렇게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계속해서 레베카의 한계를, 그리고 시청자의 한계를 시험하며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이런 여자라도, 괜찮겠어? 이런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걸 용납할 수 있겠어?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 레베카 번치 ⓒCW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주인공 레베카 번치 ⓒCW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자들’이 감동적인 드라마든 귀여운 로맨틱코미디든 아니면 멋진 러브스토리든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으로 나오는 걸 (아무렇지 않게) 보아왔다. 짐 캐리, 애덤 샌들러, 잭 니콜슨 등이 그랬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펀치 드렁크 러브’ ‘월플라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등의 목록이 떠오른다. 이 영화 속 남자들에게는 하나같이 정신적 문제가 있지만, 묘사의 강도가 다를지언정 그들은 대부분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정서적 고통에 시달리는 자기 파괴적인 ‘예민한’ 인물로 그려졌다. 그를 사랑하는 여성이나 혹은 그를 둘러싼 가족들은 헌신적으로 그를 돌본다. 이를테면 ‘길 잃은 양’이나 ‘돌아온 탕자’를 따스하게 품어줌으로써 그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끔, 다시 사회 구성원으로서 본분을 다할 수 있게끔 돕는 것이 내용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라면 어떨까. 가족으로부터, 애인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어떤 상처를 받았고, 그것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우등생이자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성취에만 집중했을 때,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 분출하면서 그 여자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날 것’의 느낌으로 들이민다면? 수많은 매체들이 집중적으로 제시하는 아름답고 똑똑하고 멋진 여성의 이미지로부터 최대한 멀리 달아나려는 듯한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그 멋진 여성의 이면에 어떤 문제점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지를 (거의 처음으로) 주목한다. 모든 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레베카를 이해할 수 있는 시청자로부터는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는 드라마다.

 

PS. 참, 그나저나 미국에서 최근 방영을 시작한 시즌 3에서는 레베카의 정신적 문제가 처음으로 뚜렷한 병명으로 제시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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