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세계 다국적 기업들이 씨앗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조금만 유전자 변형을 해도 미래세대까지 로열티를 받아낼 수 있는 수익의 블루오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것이 기아해결의 방법이라고 말하지만,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씨앗산업은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시키고 더 많은 기아인구를 만들고 있다. 기업의 상술에서 씨앗을 지켜 식량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가배울토종씨앗포럼’이 마련됐다. 앞으로 10회에 걸친 가배울토종씨앗포럼 내용을 격주 연재한다.

 

황폐한 북한의 들녘 ⓒ유정애
황폐한 북한의 들녘 ⓒ유정애

유정애 성균관대 교수는 13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리더십개발원에서 열린 가배울 토종씨앗 포럼에서 미국시민단체 대표 자격으로 1990년대 중반 식량 지원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경험에 기반을 두고 북한 농업 실태를 전했다. 그는 기아에 고통 받는 북한의 모습은 아프리카 지역과 달랐다고 했다. 유 교수는 “사람들은 북한 농업의 몰락이 갑작스런 기후 변화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경직된 공산주의 제도로 인한 사람들의 노동의욕상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 교수는 엘리뇨 같은 기후 변화는 북한만이 겪은 것이 아니었으며 전 지구적인 현상이었음을 환기 시켰다. 그것이 간접적인 이유는 될 수 있을지언정, 유독 북한만이 그것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북한이 핵 개발을 위해 쌀 생산을 소홀히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쌀은 공산주의다’라고 주장하며 모든 사람에게 쌀밥을 배불리게 먹이는 것이 공산주의 정부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그들에게 주곡 생산은 언제나 중요한 정책이었다. 유 교수는 ‘1990년대 북한의 농업이 몰락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유 교수는 당시 북한 농촌의 풍경을 전했다. “반듯하게 정돈된 거대 경작지에 황망한 흙바람만 불었고, 고장 난 거대한 트랙터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곳은 저공비행을 하며 농약을 살포했으며, 기계로 경작과 추수를 했던 꿈의 농경지 흔적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의 산업화된 농경지 모습이었다.” 왜 북한은 모든 것이 멈춰진 채 유령의 성이 돼버린 것일까?

 

유정애 성균관대 교수
유정애 성균관대 교수

북한은 1964년 토지개혁으로 협동농장화가 이뤄졌다. 지도자들은 당시 여러 나라들이 그러하듯 ‘발전’의 열병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을 잘 살게 하겠다는 주장 뒤에는 냉전이데올로기 속에서 공산주의의 우월함을 맘껏 과시하려는 욕심이 있었다. 냉전시대는 ‘첨단 과학기술’의 경쟁시대였다. 소련이 유인 인공위성을 쏴 올리자 미국은 서둘러 우주인이 달에 도착했다고 전 세계에 보도했다. 기술 경쟁은 힘의 경쟁, 자존심의 경쟁, 무기 경쟁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 북한은 산업화된 농업을 발전시켰다. 이미 1975년에 운송, 건초 자르기, 탈곡, 경작 등을 100프로 기계화했고, 추수 모내기도 빠르게 기계화가 진행됐다. 이미 모든 농촌에는 전기가 보급됐다. 높은 산지에서 물을 받아 모아 농사를 지을 수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림처럼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농지에 뿌렸다. 그들의 농업은 최첨단이었고 생산을 위한 에너지 집약적인 것이었다고 유 교수는 진단했다.

1983년까지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고, 비록 옥수수와 쌀을 섞어 주식으로 먹었지만 식량은 부족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까지 88프로에 에너지는 국내 생산으로 충당했으며 단지 12프로 에너지만이 수입에 의존했던 자급자족 국가였다.

이러한 북한에 왜 기아가 찾아온 것은 무엇일까? 유 교수는 최첨단의 산업화된 북한의 농업이 균열된 원인으로 소련의 붕괴를 지목했다. 교역량의 50%를 차지했던 소련이 해체되면서 더 이상 오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황금 등으로 만든 경화를 무역대가로 요구했다. 결국 북한에 오일부족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85%의 에너지를 만들은 수력과 화력에너지는 수입된 15%의 석유가 있어야 가동될 수 있었다. 석유가 부족하자 북한의 공업뿐 아니라 기계화된 산업농업도 멈춰버렸다. 당시 미 항공우주국(NASA)이 찍은 인공위성 사진은 어둠에 잠겨버린 북한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 교수는 90년대 소련 몰락과 고립으로 함께 어려움을 겪었던 쿠바 사례를 비교했다. 그들은 에너지 집약농업에서 탈피해 유기농과 더불어 저투입 농업, 자투리땅 및 도시 텃밭 가꾸기 등 농업의 다변화를 꾀했다. 비가 많이 오고 따뜻한 나라였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지속가능한 농법에로의 전환은 옳았다. 지금 쿠바는 성공한 농업모델로 부상하고 있다. 유 교수는 왜 북한 그러한 선택을 하지 못했는가를 알지 못했지만, 당시 북한을 방문했을 때 식량이 부족했던 그들이 요구한 것은 ‘농약과 제초제’ 였다고 말한다. 여전히 고투입 에너지 집약적인 농업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1995~6년 수해로 그나마 남겨졌던 탄광 펌프장, 수력발전소, 관개수로 하수 배수 시설이 망가졌다. 늪지를 없애고 개간했던 땅들 때문에 바닷물은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역류해 올라왔고 당시 북한 곡창지대의 16%가 소금물에 젖어 훼손됐다.

미국 북한의 양자협력 씨감자 프로젝트, 한반도의 전쟁의 긴장을 완화하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김정일은 대흥단군의 감자 연구소를 방문했고, 식량 공급을 위해 곡식으로 감자를 지목했다.이것을 알게 되자 미국의 시민단체 연합((Private Voluntary Organizations Consortium)은 북한과 씨감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북한에서는 핵 실험 시설 건설과 미사일 발사로 국제사회에서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당시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였던 유 교수는 “전쟁의 긴장감이 맴돌 때, 적어도 미국과 북한의 소통의 통로를 찾아야 했다.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함께 무엇인가를 하는 프로젝트를 찾아야 했다. 그것은 바로 씨감자 프로젝트였다. 함께 협력하면서 다른 대화의 가능성을 열수 있다고 보았다”

유 교수는 북한농업의 몰락은 유기농법과 토종씨앗을 외면한, 녹색혁명과 산업화된 농업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재앙으로 바뀔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라고 이야기한다. 미래 산업으로 부상하는 농업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 가에 관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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