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정신 생활속에 꽃피운 여성 지식인

@11.jpg 안동장씨 정부인은 우리 나라에서 최초의 한글 궁서체로 된 요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저술한 인물이다. 음식디미방이란 ‘음식의 맛을 아는 법’을 뜻하는 것이며, 식품의 조리방법을 기록한 책으로 오늘날까지도 의·식·주 생활문화에서 중요하고 가치있는 전통의 본모습을 잘 전달해 주고 있다는 데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음식디미방>의 표지에는 제목이 둘인데 ‘음식디미방’이라는 한글과 ‘규곤시의방(閨 是議方)’이라는 한자로도 제목을 달고 있다. 아마도 저자의 부군이나 자손들이 당시로서는 책의 격식이나 체통을 갖추고자 새로이 쓴 것 같다. 규곤이라 함은 여성들이 거처하는 안방을 뜻하므로 규곤시의방은 여성들의 길잡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 책은 1670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전에도 식품이나 음식에 관한 문헌으로 <수운잡방>이라는 책이 있었으나 남성에 의해 한문으로 씌어졌고 내용은 중국의 문헌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모방한 것이다. 그에 비해 <음식디미방>은 중국문헌과는 상관 없이 예로부터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거나 스스로 개발한 요리법을 그대로 기록해 놓음으로써 후손들에게 전통적인 우리 나라 요리법을 전승해 주려한 의도가 돋보인다. @11-3.jpg ▶ 규곤시의방(음식디미방) 안동장씨 정부인이 저술한 동양 최초의 음식 조리서로 국문친필본임. 자료출처:<국역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 <음식디미방> 원문의 내용은 전편에는 음식 만드는 법 93종, 후편에는 술 만드는 법 51종이 실려 있다. 전편 ‘음식 만드는 법’에는 주식류로 국수, 만두 등 11종, 찬류로는 탕, 찜, 선, 적, 채, 볶음, 구이, 전, 회, 침채, 젓갈 등 다양한 조리법을 활용한 55종의 음식이 소개되고 후식류로는 떡, 조과, 음청류가 25종이 나온다. 후편인 술 만드는 법에는 주법과 초법이 실려 있다. 이 책은 1600년대 조선조 중기 경상도 영양지방의 가정에서 실제 만들던 음식의 조리법, 저장 발효식품과 식품 수장법을 총망라하여 짜임새 있게 정리하고 있다. 또한 <음식디미방>에 실려 있는 조리법 중에서 특색 있는 부분을 몇 가지 살펴보면 1613년에 지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처음 소개되고 있는 고추가 아직까지 그 지방까지는 전파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매운 맛은 후추, 겨자, 파, 생강을 쓰고 생강이 모든 음식마다 마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쓰이고 있다. 음식의 재료는 특히 개고기가 식용의 일반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멧돼지, 꿩 등도 많이 쓰이는 대상이었다. 꿩은 김치로도 담그고 있다. 특히 웅장(곰발바닥)요리도 간간히 소개되고 있음이 이채롭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어 음식 저장이 매우 어려웠던 것을 감안하여 일광건조법과 훈연건조법, 염장법 등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음식에 대한 맛과 영양을 고려한 음식 조리법을 쓴 안동장씨는 이 외에도 다양한 학문적, 예술적 능력을 보이고 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묘지명에 “돌이켜 보건대 부인께서는 학식과 덕행이 범인과는 비할 바가 아닌 절인(絶人)의 경지에 이르르셨다”라고 있듯이 성리학, 실학 정신을 실제로 구현한 학자였다. 퇴계학 계보형성·최초 한글요리서 저술 묘지명에 “학식과 덕행 절인의 경지” 정부인 장씨는 1598년 이퇴계의 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로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적 자질이 비범하여 여자이지만 부모로부터 온갖 사랑과 훈도를 받으면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19세 되던 해 당시 부친의 제자인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과 결혼, 안동에서 200리 이상 멀리 떨어진 영해의 인양리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11-2.jpg ◀ 맹호도 안동장씨 부인이 출가전에 그린 그림으로 유일하게 맹호도 한 점만 보존되어 있음. 당시 이시명은 첫 부인 김씨에게서 1남1녀를 얻은 후 사별한 상태였는데, 부인은 특히 전부인 소생의 맏아들 상일(尙逸)을 친자식처럼 교육하기 위하여, 어릴 때 집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던 선생 집까지 5년 동안 직접 데리고 다니는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정부인 장씨는 부군과 60년 동안 서로 공경하면서 6남2녀를 더 낳아 훌륭히 키워냈다. 그 중에서도 둘째 아들 휘일(徽逸), 셋째 아들 현일, 넷째 아들 숭일(嵩逸)은 뛰어난 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셋째 현일은 17세기말에는 경상도 지역의 퇴계 이황의 학통을 재정립한 지도자로까지 성장하였으며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부인이 늘 자녀들에게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장씨 부인의 교훈은 곧 벼슬과 이에 뒤따르는 재물에 연연해하는 과거시험 공부보다 성리학의 학문적 본질(義理)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알고 학문을 깊게 하기를 당부하고 있다. 한편으로 아버님이 늦게 재혼하여 3남 1녀를 남기고 타계하자, 정부인 장씨는 계모와 나이 어린 동생들을 자기 집 가까이 이사하도록 하여 어린 동생들이 자수성가할 때까지 돌보았다. 결국 정부인 장씨는 결혼 후 친가인 안동 장씨와 시댁인 재령 이씨 두 집안의 제사와 혼사, 곧 가례(家禮)를 모두 주관함으로써 두 집안 모두 ‘학문’과 ‘도덕’을 기반으로 하는 집안으로 세우는 데 결정적이고 큰 힘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평범하게 보이는 여성의 힘으로 두 집안 모두 당시 경상도 지역 학문을 주도하는 사족 가문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정부인의 역할을 통한 현대적 의미를 찾아보면 첫 번째는 인간주의 정신을 들 수 있다. 자아의 실현과정에서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게 되고 가족구조나 이웃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적 지혜를 발휘한 점이 돋보이는 측면이다. 두 번째는 유교적 이념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당면한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 가는 합리주의 정신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정부인은 당시 출가외인의 관념이 강하게 지배했던 가족·사회구조에서 무남독녀로서 친정과 시댁을 같이 돌보면서 별다른 무리 없이 양 가문의 계승과 번영을 추구했다. 순응아닌 적극적 의지로 현실 극복 남성중심 가치관 서서히 변화시켜 ~11-1.jpg ◀ 교지 숙종 15년(1689) 8월에 셋째 아들 이현일의 현귀로 부인에게 정부인의 직첩을 내린 추증교지. 세 번째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 정신을 들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 빈한했던 시절에 계절적 특성, 지역적 특성과 영양가를 충분히 감안하여 선택한 재료, 조리법 등을 한글로 상세히 기록하여 검소한 생활 속에서 지혜를 터득할 수 있게 했다. 네 번째로는 가족구조나 인간관계 속에서 조화와 화합의 의미를 들 수 있다. 그가 어렸을 때 지은 ‘소소음’이라는 시를 통해 보면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창문 밖에 솔솔 내리는 빗소리/ 보슬보슬 저 소리는 자연이어라/ 내 지금 자연의 소리 듣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자연이어라’ 정부인은 여성에게 주어진 어려운 조건들을 최대한 설득력 있게 풀어보려는 자세로 임하여 친정부모와 시부모에 대한 효와 정숙한 아내로서의 내조, 자녀들에게 지혜롭고 덕성스러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조화롭게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냈다. 이는 현실에 순응하여 안주한 것 같지만 오히려 내면적인 강인함과 외면으로는 유연성을 가지고 남성 중심의 가치관을 서서히 변화시켜 여성의 존재가치와 능력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라 하겠다. 현재도 그 가문에서 불천지위로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는 신사임당 이후 두 번째로 1999년 11월에 문화관광부에서 주관하는 이 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된 바 있다. 다섯 번째는 조선의 문화발전에 공헌한 의미를 들 수 있겠다. 그의 학문과 저술은 당대에 남성을 능가하는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후세까지 남아 그 가치를 발휘함으로써 역사의 뒷전에 가려졌던 여성들이 역사 전면에 드러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한문이나 초서로 쓴 작품과 함께 한글로 지은 <음식디미방>은 한글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학계에서는 여성으로서 퇴계학파의 계보를 형성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안동장씨 정부인의 일련의 업적은 16세기 신사임당, 허난설헌, 그리고 17세기 정부인 장씨의 맥을 이어 18세기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 여성 실학자 이사주당, 서영주합, 이빙허각 등과 같이 학문적인 능력을 발휘한 여성 지식인 계보를 형성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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