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여성농민사랑 나눔의 삶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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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여성회 지도위원이자 명상요가협회 ‘삼법’ 대표인 박남식(55) 회장은 지역 여성지도자를 발굴, 육성하는 한편 그들의 실천적 운동 방향을 계도하며 이끄는 안양지역 여성운동의 대모로 통한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사화초등학교, 창원중학교를 거쳐 부산 경남여고를 졸업한 박 회장은 일본 아세아농업전문학교와 한국방송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모교인 창원중학교에 수학교사로 부임하여 후배들의 올바른 가치관 정립을 위한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늘 열려 있는 사고를 지닌 아버지 덕분에 6남매의 맏이로 자라면서 꺾이지 않는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 뿐 아니라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나눔의 삶을 생활신조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주거환경문제등 시민운동에 접목

1973년 유신체제하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구속 투옥되었던 운동가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그는 자연스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농민선교기관에서 활동하며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인식, 농민이 대접받는 삶을 위하여 생명운동, 환경, 생태계 보전운동을 위해 전국을 누볐다.

박 회장은 그러한 활동을 하던 중 여성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고 육아를 비롯하여 교육환경 향상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1988년 전국여성농민조직이 탄생할 때까지 농민들의 삶을 고민하고 그들을 대변하던 그는 특히 여성농민의 열악한 환경과 사회적 무관심을 타파하기 위해 헌신했고 여성농민의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이슈화했다.

그 사이 기독교 산하 농촌사업부에서 농민선교활동을 시작으로 ‘가톨릭 여성농민회’ 이사를 지냈고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농촌사업부 책임간사, ‘전국농민회총연맹’ 초대 총무국장,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부회장 및 감사를 수년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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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식 회장(서 있는 사람)은 환경·교육문제 등 일상 속의 여성문제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박 회장은 여성농민사랑 실천사업의 일환으로 여성농민 후원조직인 ‘땅의 사람들’을 조직하여 이끌면서 끝없는 여성농민사랑운동을 전개했다. 허물어져 가는 농촌사회를 살리기 위해 농촌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탁아소를 운영하고 학부모들의 교육을 지원하며 여성농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업을 꾸려나갔다.

도시에서 생활터전을 일구고도 회장의 농민사랑은 쉼이 없었다. 1992년 결혼 17년만에 처음 마련한 보금자리인 안양 평촌의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그는 도시여성의 역할과 여성조직의 대중화 및 체계적인 조직화를 위해 뛰었다.

구체적으로 아파트 단지의 자치부녀회장과 새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아파트내 생활환경향상과 쾌적한 주거권을 외치며 주거공간 가까이 있는 악취와 매연을 내뿜는 공장 이전을 위해 전투적 시민운동을 전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작은 일도 함께하면 큰 힘” 안양여성운동 밑불

부녀회 활동을 하면서 안양을 생각하는 지역여성들의 생활정치 참여와 의식개혁에 목표를 두고 안양지역 여성대중의 조직화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해 온 박 회장은 1993년부터 ‘안양여성회’의 출범을 준비했다.

안양여성회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 안양여성회의 방향을 자녀 교육문제, 주거환경문제, 교통문제 해결과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여성들의 시민운동으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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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지역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해 애쓴 박남식 회장(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

1994년 7월 창립된 안양여성회(초대회장 정홍자, 2대 회장 박남식)는 군포지역을 포함한 시민단체와 공동 추진한 ‘상수도수 불소화 서명청원’활동을 벌여, 상수도수 불소화 사안이 시의회에서 통과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일은 여성들의 결집된 힘을 보여주었고 향후 안양지역 여성운동에 커다란 밑불이 되었다.

이후 안양여성회 2대 회장을 맡은 박 회장은 여성학 강좌, 여성지도자 리더십 교육, 남녀차별문제 상담실 개설, 의회감시단 운영, 의정지기 교육, 환경보호 교육 및 캠페인 활동, 시의원과의 정책간담회 등을 열어 지역 여성단체들의 연대를 통한 여성활동의 조직화, 세력화를 이끌었다.

점차적으로 지방자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지역민이 늘어나면서 박 회장은 여성인력의 부재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안양여성회를 통해 여성의 의회 진출을 실천에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자신이 여성단체의 추천을 받아 1995년과 1998년에 안양시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의 아픔 극복 여성지도자 육성에 온힘

그러나 당시 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여성농민회를 비롯한 여성단체의 도움으로 선전했던 그는 생각보다 높은 남성문화의 벽과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경험하며 낙선했다. 그래도 그는 굽히지 않고 “지방의회의 의원역할은 섬세하고 감성이 발달한 여성에게 훨씬 더 적합하다”고 여성들에게 의회진출을 적극 권장했다.

박 회장은 현재도 여성의 정치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지방자치교실과 지도자육성과정 개설 등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낙선이후 박 회장은 패배감으로 잠깐 동안 방황했다. 그리고 1999년 9월 4개월 동안 명상의 고향 티벳, 네팔, 인도로 수행의 길을 떠났다.

“낙선의 고배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고 자신감 상실의 원인이 되었으나 요가를 통한 정신수양과 신체수련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건강문제를 시민운동에 접목, 요가와 명상을 통해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품성을 키운 여성들을 각 단체의 중량급 지도자로 배출시켰다.

개인의 건강한 삶을 위해 ‘명상요가수련원’을 찾은 회원을 잘 다듬어서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로 육성 발굴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이다. 현재 활동중인 ‘안양여성의전화’를 비롯한 각 단체의 지도자중에도 그와 정신수련을 함께 했던 이들이 다수 활약을 하고 있다.

박 회장은 여성농민의 대모로서 안양 지역에 여성운동의 터를 잡고 씨앗을 뿌린 정신적 지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모든 여성은 어느 분야에서건 쓰임의 용도로만 존재하기보다 인권이 지켜지는 가운데 정책 결정과정과 논의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동등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그는 온 몸으로 더불어 사는 삶의 여유와 나누는 삶의 풍성함을 실천하며 안양지역 여성들에게 산 교과서가 되고 있다.

<안양 허영희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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