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가 불편하다는 이들에게
‘성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가 불편하다는 이들에게
  •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
  • 승인 2017.11.07 15:30
  • 수정 2017-11-10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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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최적화된 환경이 있다면

그것은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자체일 것

 

 

아저씨가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 “왜긴 정윤이가 예쁘니까 그러지.”/ 가슴이 더욱 세게 뛰었다. 너무 세서 온몸이 울리는 것 같았다. 아저씨도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정윤아, 얼굴이 왜 그래? 땀도 나네? 어디 아프니?”/ 아저씨가 내 이마를 짚었다. 내 얼굴에서는 정말 땀이 나고 있었다. / “배는 안 아프니?” / 아저씨가 걱정하는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었다. 나는 잔뜩 움츠린 채로 뒤로 물러났다. 몸을 아주 많이 움직인 것 같았는데, 그래 봤자 아저씨 바로 옆이었다./ “괘, 괜찮아요.” / “괜찮긴, 땀이 이렇게 많이 나는데.”/ 쓰윽. 커다란 손이 내 배를 다시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은정의 동화 『안녕, 그림자』의 50쪽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황정윤은 5학년이고 만화책을 좋아한다. ‘친절한 책방’은 정윤이가 하굣길에 가장 편안하게 들르는 곳이다. 속말을 잘 들어주는 주인아저씨는 언제나 정윤이를 반갑게 챙긴다. 어느 날 정윤이는 “친절한 책방에 가지 마”라고 적힌 쪽지를 받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쪽지의 의미를 알게 된다. 

2011년에 펴낸 이 작품은 어린이 성폭행 피해자인 정윤이가 이웃의 또 다른 어린이 피해자와 연대해 가해자를 고발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이야기다. 둘은 몇 번이나 “우리 잘 할 수 있을까?”를 묻고 용기를 내어 고발장을 돌린다. 제3의 피해자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어린이는 주저하다가 끝끝내 나타나지 못한다.

얼마 전 여자 어린이들을 상습 성추행한 어린이집 남교사에게 징역 8년이 선고됐다. 경기도의 한 어린이집에 근무하는 이 남성은 이 어린이집 원생 3명에게 유사성행위를 시키는 등 10여 차례 성추행하고, 동료 여교사 5명의 신체를 17차례에 걸쳐 촬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피해 어린이가 성추행을 당한 장소는 아주 익숙한 공간인 어린이집 화장실이었다. 성범죄자들은 매우 이성적이며 평범하고 어린이가 충분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대상을 찾기 위해서 주변을 끊임없이 살피고 피해자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우호적인 환경을 만든다. 위의 동화에 나온 ‘친절한 책방’의 아저씨가 그랬고 이금이의 청소년소설 『유진과 유진』에 나오는 유치원 원장이 그랬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의 경계심과 노력으로 자신이 기르는 어린이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서는 안 되는 어떤 충동적이고 위험한, 성폭력이 일어나게 되는 환경이 따로 있으며 거기 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예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곳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폭력에 최적화된 환경이 있다면 그것은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자체일 것이다.

내 가까운 사람들은 성범죄의 가해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비슷한 오판이다. 성범죄자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속성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없으며 상대방을 힘이나 권력으로 제압하려는 마음은 언제든지 성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약자인 어린이와 청소년은 가장 손쉽게 그들에게 발견되는 대상이다. 우리 아들이, 우리 선생님이, 또는 어떤 우리 멋진 그분이 그랬을 리가 없다는 말로 가해자를 옹호하는 일은 자신도 추가 가해자의 대열에 서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성인 강연자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행사를 할 때 제출하는 서류 중에 ‘성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가 있다. 이것은 주민등록상 남성과 여성이 모두 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누구나 학교 보안관에게 실명을 밝히고 출입자 명단을 적는다. 이 과정은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당연한 장치다. 최근 어린이 대상의 강연이 잦은 동화작가들 가운데에서 ‘성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가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이 절차를 없애자는 글이 기고되기도 했다. 몇 시간 강의하고 떠나는 작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폭력은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어린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이들이 이 정도의 수고로움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강간 문화가 일상적인 이 사회에서 성폭력으로부터 어린이를 지킬 방법은 없다. 더 많은 의심을 청한다. 동화작가라면 더더욱 그렇게 자청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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