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번호 변경 제도 결함 알면서도

예산 문제로 수개월 째 방치

 

 

 

대법원이 주민등록번호 변경 제도의 결함을 알면서도 약 3억5000만원의 예산이 든다는 이유로 수개월 째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행정안전부가 제도에 결함을 파악하고 가족관계증명서의 소관 기관인 대법원에 개선을 권고했으나 이를 묵살한 것이다. 

주민등록변경 제도는 주민등록번호 유출로 인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2차 피해 예방을 위해 지난 5월 30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주관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이 제도를 소개하면서 보이스피싱 피해자, 가정폭력 피해자 등을 변경 대상자로 들었다.

상당수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시행되기만을 기다렸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열림터 송미헌 소장은 “친족 성폭력뿐만 아니라 부부 간 폭력으로 인해 가해자를 피해 생활하고 있는 아내와 자녀 등 다양한 유형의 피해자들이 해당된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가정폭력 피해자 중에는 자신의 신변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난 경우도 있다. 가정폭력 가해자들은 집착 성향이 강해 피해자들을 찾아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주민등록변호 변경 신청자 중 가정폭력 피해자는 약 10% 가량이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행정안전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제도가 시행된 5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629건 중 64건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상당수의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변경한 번호가 가족관계증명서에서 노출된다는 얘기를 접한 후 번호 변경을 신청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제도 개선 취지와 달리 무용지물인 셈이다. 8살 때부터 친부에게 수 차례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 A(26)씨도 마찬가지다. A씨는 성인이 되고나서야 피해 사실이 외부로 드러났고 친부는 6년 전 재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고, 피해자는 다른 가족들의 비난에 집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최근 친부가 교도소에서 만기출소하면서 공포에 떨고 있다. 성폭력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폭력적인 성격인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내 보복할까봐서다. A씨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해 추적을 피하고 싶었지만 가족 간에는 이마저도 불가능함을 알게 돼 절망하고 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으면 주민등록번호가 나오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는 ‘가족폭력처벌 등의 범죄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주민등록표와 등초본은 열림 및 교부 제한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관계증명서는 교부 제한 신청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번호 변경사업의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 또한 시행에 앞서 이 같은 결함을 파악하고 지난 1월 가족관계증명서의 소관 기관인 대법원에 개선을 권고했다. 그러나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시스템을 변경하려면 3억원이 넘는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년도에도 해당 예산을 신청하지 않아 문제 해결에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송 원장은 “여성보호시설 내의 많은 피해자들이 제도가 개선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제도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는 정춘숙 의원은 이같은 법원행정처의 행태를 비판했다. “피해자들이 생존의 위협을 호소하고 있는데도 법원은 수개월째 예산을 핑계대고 있고, 내년 예산에도 반영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여성 폭력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증거”라면서 “대법원은 하루빨리 결함을 보완해 제대로 된 제도가 시행되도록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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