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됩니다 - 2

기가 막힌 보도기사를 보았다. 학교에서 교육도우미 공익요원으로 근무하는 자가 그 학교에 재학 중인 13세 지적장애 소녀를 성폭행했는데도 학교 측에서는 경찰 수사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간분리 조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인 것일까?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법을 엄수하기 시작했던가! 아무래도 이제 이 나라가 진정한 법치국가가 된 모양이다.

맞다. 모든 국민은 유죄임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누가 이를 모르겠는가. 하지만 우리 법에 무죄추정의 원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새로 입안되었거나 개선·강화된 많은 법률들은 성폭력범죄 피해자 보호 또한 중요한 법 원칙임을 밝혀두고 있다.

한 번 살펴보자. 「범죄피해자 보호법」은 제2조 제1항에서 “범죄피해자는 범죄피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천명하는 한편, 제8조 제1항에서는 범죄피해자의 형사절차 참여권을 보장하여야 한다고도 정한다. 무슨 뜻일까?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자가 수사와 재판절차를 통하여 가해자라는 사실이 최종 확정되기 이전이더라도, 범죄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은 ‘피해자로서의’ 보호와 배려조치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수사와 재판이 모두 종결된 연후에야 비로소 피해자로서의 보호조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법 제2조 제2항과 제9조에서 범죄피해자의 사생활 평온 보호 및 신변보호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직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는 이것만 보더라도 확연해진다.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31조의2 제4항을 보자. 조사 또는 질문을 하는 사법경찰관리는 피해자·신고자·목격자 등이 자유롭게 진술할 수 있도록 성폭력행위자로부터 분리된 곳에서 조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피해자와 성폭력행위자가 같은 공간에 함께 있게 된다면 피해자가 그로 인해 크나큰 심리적 압박감과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 법도 이처럼 인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3조에서는 피해자나 신고인 등에 대한 보호조치를 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에 따르면 가해자에 대한 재판이 계속 중인 때에도 필요한 경우라면 신변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재판이 마무리된 것이 아닌데도 피해자는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자가 유죄로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추정 원칙에 따른 방어권을 두텁게 보장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사건을 신고한 이에게 충분한 보호조치가 따라야 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이 두 원칙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 무죄추정 원칙이 있으니만큼, 수사와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가해자와 피해자를 공간분리해 줄 수 없다고? 위의 여러 법 규정을 보고 나서도 과연 그런 무지몽매한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서울대의 경우, 인권센터 규정에서 피해자의 피해가 확대될 우려가 있다면 조사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지기 이전이더라도 피해자의 주거, 사무실, 연구실, 강의실 등의 적법한 점유 공간으로부터의 피신고인 퇴거·격리 등 공간분리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서울대 모 학과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한 규정에서는 피해자 보호에 필요한 경우에는 학기 중인 때에도 가해자로 지목된 자를 동일 교과목 타 강좌로 수강 변경·이동하는 등 공간분리를 위한 학사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정한 바도 있다. 이 규정에서는 그 대신, 사실상의 정학처분 또는 유급에 준하는 불이익이 징계처분 이전의 이와 같은 임시조치로 인하여 가해자로 지목된 자에게 발생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만 이를 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명시하였다. 신중한 조사와 심의를 거쳐 사실관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가해자로 지목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과도한 불이익을 입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더라도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사람의 보호를 위하여 필요한 범위 내에서는 배려조치를 행하여야 한다는 취지이다. 필자가 자문위원으로 있는 포항공대에서도 성희롱·성폭력 예방과 처리를 위한 규정을 전면개정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는데, 거의 동일한 임시적 보호조치 규정을 신설할 예정이다.

「양성평등기본법」 제31조 제5항은 구제절차 등의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추가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정한다. 피해자로서는 가해자와 계속 대면해야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불편함과 불쾌감, 두려움과 부담감을 경험한다. 조사 또는 구제절차가 아직 종결되지 않아 사실관계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공간분리나 연락·접촉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없다면, 실질적으로는 거의 모든 성희롱·성폭력 조사 또는 구제절차에서 추가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기이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실관계의 확정을 통한 가해자 여부 판단이란 언제나 조사절차의 마무리 단계에서나 가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신세계>에서 나왔던 유명한 대사가 떠오른다. “살려는 드릴게.” 바보가 아닌 담에야 어느 누구도 이 말을 살려주겠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기는 하겠지만, 죽은 것과 별반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어주겠다는 협박이 아닌가. 무죄추정 원칙 운운하며 피해자 보호에 소홀한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이런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신고는 하게 해 드릴게.” 원한다면 신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 후에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수수방관할 터이니 피해 신고 이후의 모든 뒷감당은 피해자가 알아서 하라는 소리다. 그러니, 피해자 보호조치를 취해주지 않겠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신고 생각일랑 하지 말고 입 다물고 혼자 끙끙 앓으라는 것과 같다. 말 같지도 않은 이런 상황이 두 번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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