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옥, 홍은원부터 이경미, 윤가은까지’

50년대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 등장 이후 명맥 이어

2000년대 여성 감독 대거 등장으로 부흥기 맞아

아이 등에 둘러업고 촬영장 진두지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결혼이주여성 등

억압된 여성 인권·가부장적 폭력 이야기해

 

여성 감독이 설 자리가 없다. 과거보다 후퇴한 현재 영화계는 철저히 남성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게다. “괜찮은 여성 감독이 없으니 남성 감독을 쓰는 것 아니겠냐”고. 하지만 한국에도 여성 감독의 계보가 있다. 50년대부터 이어져 온 명맥이 분명 존재한다. 척박한 환경을 뚫고 나와 당당히 능력을 내보인 이들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는 여성 감독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부흥기를 맞기도 했다. ‘쓸 만한’ 여성 감독들은 있다. 아니, 많다.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1923~2017)

박남옥은 어려서부터 영화에 심취하며 문학, 미술, 체육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미망인’은 당시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던 전쟁 과부 문제를 다뤘다.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 선 여성들의 갈등과 성적 욕망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1955년 개봉한 ‘미망인’은 극장 섭외에 난관을 겪으며 나흘밖에 상영되지 못했지만,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며 재발견됐다. 1940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정과에 입학한 후 중퇴해 대구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던 그는 윤용규 감독의 소개로 조선영화사 촬영소에서 일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해방 이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1947) 스크립터로 일하다 ‘미망인’ 작업에 돌입했다. 예산이 부족했던 그는 언니에게 돈을 빌려 제작비를 마련하고,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등에 업고 촬영 현장을 지휘했다.

‘여판사’ ‘홀어머니’ 홍은원 감독(1922~1999)

홍은원은 박남옥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여성 감독이라 일컬어진다. 1946년 고려영화사에 들어간 뒤 1947년 스크립터를 거쳤다. 1950년대 후반 ‘유정무정’ ‘황혼’ 등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이후 ‘여판사(1962)’, ‘홀어머니’(1964) 등을 연출했다. ‘여판사’는 당시 세간의 관심을 받았던 ‘여성 판사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착안해 제작됐다. 여자주인공 진숙은 판사라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열등감을 느끼는 남편과 점점 멀어져가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어머니·시누이와도 관계가 소원하다. 하지만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의무를 다하며 판사 일에도 충실히 임한다. 그러던 중 시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시어머니가 살인 혐의를 받게 되자 진숙은 그녀의 무죄판결을 위해 변론을 맡는다.

‘청춘물’ 이끈 이미례 감독(1957~)

80년대는 이미례 감독이 ‘수렁에서 건진 내 딸’(1984)로 데뷔하며 여성감독의 맥을 이어갔다. 동국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고 현장경험을 쌓은 이 감독은 ‘영심이’(1990)로 히트를 쳤다. 이후에도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1991) 등 청춘물을 주로 작업했다. 상업영화로 본격적인 승부를 건 첫 여성 감독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충무로에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영화제작 시스템이 변화했고, 다양한 데뷔 경로를 통해 여성 감독들이 등장했다.

 

‘여성감독 주축’ 임순례 감독(1960~)

2008년 개봉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으로 제29회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명승부를 펼쳤던 여자핸드볼 선수들의 감동실화를 다뤘다. 목표를 향해 힘차게 도전하는 여성들을 그려내 4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1996년 ‘세 친구’로 장편 데뷔한 임 감독은 차이를 다름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회를 소망하는 영화 ‘날아라 펭귄’(2009), 남들과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최해갑과 그 가족이 행복을 찾아 남쪽으로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 ‘남쪽으로 튀어’(2012), 줄기세포 조작 사건을 다룬 ‘제보자’(2014) 등을 연출했다. ‘영화에 미쳐보자’는 생각으로 1988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그는 1992년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처음 연출한 단편 ‘우중산책’으로 1994년 제1회 서울 단편영화제 대상과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변두리 영화관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는 비혼 여성이 느끼는 삶의 공허함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현재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KARA)의 대표를 겸하고 있다.

 

‘섬세한 감성’ 이정향 감독(1964~)

2002년 영화 ‘집으로’로 409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기록을 세웠다. 개구쟁이 7살 손자 상우(유승호)와 말 못하는 칠순 할머니(김을분)의 우정과 사랑을 그려 울림을 전했다. 특히 외할머니 역으로 연기자가 아닌 일반인을 캐스팅해 더 극적인 감동을 자아냈다. 1998년 첫 연출작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좋은 평을 받으며 데뷔한 이 감독은 해당 작품으로 대종상영화제,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춘사영화제 등 그해 신인감독상을 휩쓸었다. 2011년 송혜교 주연의 ‘오늘’을 연출하며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현실과 그 안의 부조리를 섬세한 연출로 그려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변영주, 박찬옥, 정재은, 이수연 등 여성 감독이 대거 등장한다. 한국영화아카데미와 영상원 등의 체계적인 인력 배출, 디지털 카메라와 손쉬운 편집 프로그램 보급 등이 한몫 했다.

 

‘한국사회를 이야기하다’ 변영주 감독(1966~)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1995)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위안부 할머니의 일상과 중국 무한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들의 증언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변 감독은 이 작품으로 일본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돼 오가와 신스케상을 받았다. 극영화 데뷔작인 ‘밀애’(2002)는 가정의 틀 안에서 안주하던 여성이 내면의 욕구를 발견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어 ‘발레 교습소’(2004), ‘텐 텐’(2008), ‘화차’(2012) 등을 연출했다. ‘화차’로 관객수 243만명을 기록하며 제4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일본의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화차’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망가져가는 이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헤쳤다.

 

‘감독에서 제작자로’ 박찬옥 감독(1968~)

서우·이선균 주연의 ‘파주’(2009) 연출로 제10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수상했으며,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NETPAC)을 수상했다. ‘파주’를 끝으로 현재는 영화제작에 힘 쏟고 있다.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활동했던 박 감독은 단편 ‘있다’(1996)로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느린 여름’(1998)으로 제3회 부산영화제 선재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단편을 통해 날카로운 통찰력과 독특한 분위기로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오! 수정’(2000) 조감독으로 활동한 이후 장편 데뷔 준비에 들어간 그는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 실린 ‘질투는 나의 힘’을 모티브로 동명의 장편 ‘질투는 나의 힘’(2002)을 완성했다. 이 작품으로 제32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타이거상,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상, 제24회 청룡영화상 각본상 등을 수상했다.

 

‘사람을 말하다’ 정재은 감독(1969~)

2001년 장편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로 데뷔했다. 스무 살 여성들의 우정과 성장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 후보작에 올라 국내외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미국, 영국, 일본, 홍콩 등 각국에서 개봉됐다. 이후 ‘여섯 개의 시선’(2003), ‘태풍태양’(2005), ‘말하는 건축가’(2011), ‘고양이를 돌려줘’(2012), ‘말하는 건축 시티: 홀’(2013) 등을 연출했다. 최근 연출한 다큐멘터리 ‘아파트 생태계’(2017)와 극영화 ‘나비잠’(2017) 등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나비잠’은 영화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가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병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사랑의 기억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여성 소설가의 이야기를 그렸다.

 

‘스릴러 대가’ 이수연 감독(1970~)

2003년 장편 데뷔작으로 감성 미스터리 ‘4인용 식탁’을 선보였다. 원귀가 보이는 남자와 타인의 과거가 보이는 여자의 끔찍한 관계를 통해 핵가족의 어둡고 추악한 이면을 들췄다. 행복한 가족이야기 밑에 깔린 개인의 공포와 무의식을 드러내 단란한 가족 이미지 뒤에 숨은 억압과 파괴를 폭로한다. 올해는 배우 조진웅 주연의 심리 스릴러 ‘해빙’을 발표해 또 한 번 스릴러 대가의 면모를 보여줬다. 이 감독은 단편영화 ‘라’(1998) 등으로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초청받았다. 중앙대 대학원 영화과 졸업 작품인 ‘물안경’(2000)으로는 제17회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은어상, 제26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우수상을 수상했다. ‘스무고개’(2003), ‘이공’(2004), ‘래빗’(2008), ‘가족시네마’(2012) 등을 연출했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방은진 감독(1965~)

1994년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을 통해 배우로 데뷔한 후 ‘미쓰 홍당무’, ‘키친’ 등에 출연했다. 1998년부터 단편영화 조감독 등 스태프로 참여해 2004년 ‘파출부, 아니다’로 감독 데뷔했다. 첫 상업영화 연출작인 ‘오로라 공주’(2005)는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아이를 유괴·학대한 이들을 찾아내 연쇄살인을 벌이는 여성의 이야기다. 이후 ‘시선 1318’(2008), ‘용의자X’(2012), ‘집으로 가는 길’(2013) 등을 내놨다. 2004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집으로 가는 길’은 마약 운반범으로 오해받아 프랑스 외딴 섬 교도소에 수감된 여성의 비극을 그렸다. 배우 전도연이 여자주인공 정연 역을 맡아 열연했다. 최근 박성웅·오승훈 주연의 ‘메소드’를 연출해 11월 2일 개봉한다.

 

‘강렬한 여성 캐릭터’ 이경미 감독(1973~)

8년의 공백을 깨고 지난해 내놓은 ‘비밀은 없다’는 여성, 청소년 등이 서사의 중심에서 극을 이끌어가 여성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독보적인 여성캐릭터와 독창적인 상상력, 디테일하고 탄탄한 시나리오는 이 감독의 강점으로 꼽힌다. 단편 ‘오디션’(2003) 등을 통해 연출 역량을 키웠다. ‘잘돼가? 무엇이든’(2004)으로 전주국제영화제, 미쟝센 단편영화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등에 소개되며 호평을 얻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 스크립터를 거쳐 2008년 공효진 주연의 ‘미쓰 홍당무’로 장편 데뷔했다. 이 작품으로 29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안면홍조증을 앓는 여자주인공 양미숙(공효진)이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렸다.

‘장르의 다양성’ 이언희 감독(1976~)

지난해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로 결혼이주여성의 현실을 낱낱이 고발했다. ‘미씽’은 이혼 소송 중인 싱글맘 지선(엄지원)의 집에서 보모 일을 하는 중국인 여성 한매(공효진)가 아기와 함께 사라진 사건을 다룬 미스터리 수사 극이다. 결혼이주여성 한매가 경험한 가부장적 억압과 자본주의적 착취를 보여준다. ‘고양이를 부탁해’(2001)와 ‘해피에로 크리스마스’(2003)에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 이 감독은 ‘행복한 장의사’(1999) 스크립터를 거쳤다. 이후 장편 ‘…ing’(2003)로 감독 데뷔했다. 불치병으로 시한부 인생이 된 민아(임수정)와 영재(김래원)의 사랑을 다룬 멜로드라마다. 이어 로맨스코미디 ‘어깨너머의 여인’(2007) 등을 연출했다. 올해 9월 권상우·성동일 주연의 코미디 영화 ‘탐정2’(가제) 촬영을 마쳤다.

 

‘세밀한 시선’ 윤가은 감독(1982~)

지난해 장편 ‘우리들’로 데뷔했다. ‘우리들’은 세 소녀가 맺는 미묘한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사랑, 미움, 우정, 질투 등 유년시절의 복잡한 감정과 고민을 사실적으로 담아내 강렬한 울림을 선사한다. 윤 감독은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 및 10대 영화상, 부일영화상 신인감독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감독상, 들꽃영화상 대상 등을 휩쓸었다. 단편 ‘사루비아의 맛’(2009)을 시작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증명’(2010), ‘손님’(2011), ‘콩나물’(2013)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손님’으로 제34회 끌레르몽 페랑 단편영화제에서 국제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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