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 한태숙 연출가

‘레이디 맥베스’, ‘서안화차’, ‘하나코’ 등

40여년간 ‘연출 외길인생’

사회성 짙은 문제 파고들어

 

한태숙 연출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태숙 연출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문화의 힘은 특별하다.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세상을 바꾸기도, 상처 입은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잊어서는 안 될 일들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사회를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연극으로 대중에게 말을 거는 한태숙(67) 연출가가 ‘2017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연극 ‘하나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한 한 연출은 40여년간 연극계에 몸 담아온 대한민국 대표 연출가로 손꼽힌다. 사회성 짙은 소재를 깊이 있게 풀어내면서도 극적 재미를 잃지 않는다는 평이다. 1976년 연극 ‘더치맨’으로 데뷔해 ‘레이디 맥베스’, ‘서안화차’, ‘하나코’, ‘엄마이야기’ 등으로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두루 얻고 있다. 최근에는 조지 오웰의 원작 ‘1984’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권력자의 감시·통제로 인한 디스토피아를 생생하게 보여줄 예정이다.

 

지난해 공연된 창극 ‘레이디 맥베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해 공연된 창극 ‘레이디 맥베스’ ⓒ뉴시스·여성신문

1999년 설립된 극단 ‘물리’의 대표인 한 연출은 그간 2~30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중 대표작은 단연 ‘레이디 맥베스’다. 이 작품은 1998년 초연 이래 평단과 관객의 꾸준한 호평 속에서 무대에 올랐다. 1999년 서울 연극제에서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 등 주요 부문상을 휩쓸었다. 그 후 동구권 최고 수준의 연극 축제인 폴란드 콘탁 페스티벌에 초청됐고 일본, 싱가포르 등에서 공연을 올렸다.

동성애와 진시황을 소재로 한 ‘서안화차’도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 중 하나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집착과 소유욕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고, 성공하지 못한 사랑이 남기는 진한 파장을 전하고 싶었다”는 한 연출은 현대인의 병적 집착을 불멸에 집착했던 진시황에 빗대 표현했다. 인간 내면의 어두움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한 연출의 ‘자학적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는 평을 받았다.

극작을 전공한 한 연출은 ‘자장자장 자’라는 작품으로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희곡에 당선됐다. 방송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그는 방송작가로 먼저 일을 시작했다. “제 졸업 작품이 대표작으로 오르면서 연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연극이란 게 다른 일을 병행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졸업 후 한참을 연극을 못했죠. 방송사에서 10년 가까이 일했어요. 근데 거기서 제 쓸모를 인정받으며 일하다보니 완전히 눌러앉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연극계로 다시 돌아왔죠. 그 이후로 쭉 연출을 하게 됐어요.”

30여 년간 ‘연출 외길인생’을 걸어오며 갖가지 희로애락을 겪었을 듯했다. “가장 좋았을 때는 관객들의 반응이 좋을 때죠. 관객 분들이 제 극에 집중하면서 좋아해주시는 걸 볼 때 연극을 더 할 수 있겠다는 의지가 생겨요.” 물론 가슴에 슬픔을 묻어야 한 일도 있었다. “‘서안화차’라는 작품을 함께 하던 배우가 뇌경색으로 숨진 사건이 있었어요. ‘그때 공연을 접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아직도 하곤 해요. 그 때가 또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때라서 더 가슴 아프게 남아 있죠. 저는 세상의 모든 상처나 흉터는 지워진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위안부’나 세월호 문제를 ‘그만 좀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건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이 되지 못해요.”

한 연출은 사회적으로 잊히지 말아야 할 것들은 연극으로든 뭐로든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극은 되새김질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회적으로 얘기를 꺼내 관객들에게 (이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연극이 갖는 의미가 있죠.”

 

양성평등문화인상을 수상하는 한 연출은 ‘하나코’로 상을 받게 돼 더욱 뜻 깊다고 했다. 2015 연극 창작산실 우수작품제작지원작에 선정된 작품인 ‘하나코’는 일제치하 캄보디아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상처나 흉터는 지워진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똑같은 사건을 말하더라도 각도를 틀어 새롭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죠. 연극은 성가시게 질문하는 작업이에요. 연극을 본 관객들은 작품을 비판하거나 칭찬하면서 자연스럽게 극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문제를 논하게 되죠. ‘위안부’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계속해서 얘기해야 해요. 일본에선 ‘위안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계속해서 지켜봐야 하고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이 변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일정하고 긴 호흡을 가져가야 해요.”

하나코는 2015년 공연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하고 올해 재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주연을 맡은 배우 예수정도 이 작품으로 올해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지방에서는 하나코 공연을 원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던 것. “지방 관객들에게는 극의 주제가 부담스러웠나 봐요. 지방 어느 곳에서도 달가워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고 싶어요.”

 

한태숙 연출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태숙 연출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자기만의 독창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 연출은 같은 작품이라도 매번 다른 형식을 바탕으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집요하고 섬세하지 않으면 매력을 얻지 못해요. 연극을 본 관객들이 작품에 대해 질문하고, 자신과 사회를 대비해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하죠.” 여성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도 눈여겨볼만 하다. “여성이 극에 나올 때,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는 ‘여성성’을 탈피한 캐릭터를 표현하려는 편이에요. 요즘에는 강하고 끈질긴 여성 캐릭터가 더 많은 공감을 얻는 것 같아요. 내년에 연출할 ‘엘렉트라’에서도 여성 캐릭터 안에 담긴 강렬함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연극계도 여성 연출가나 배우의 수가 남성에 비해 적은 게 현실이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작품도 부족한 실태다. “남성보다 월등히 뛰어나야 여성들이 연출가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여전히 존재해요. 하지만 여성 연출가들은 끈기 있고 견고한 면이 있어 연출가로서 능력이 정말 출중하죠. 배우들을 훈련시키고 분위기를 장악하는 힘도 강해요. (양성평등문화상이) 그런 여성들을 격려해주는 상이라고 생각하니 더 힘이 났습니다. 내년에 수상할 분에게도 미리 축하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태숙 공연 및 수상경력>

△1976 연극 ‘더치맨’으로 연출 데뷔

△1994 ‘첼로’ 연출

△1995 ‘덕혜옹주’ 연출, 백상예술대상 연극연출상 수상

△1997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나, 김수임’ 연출

△1998 ‘레이디 맥베스’ 연출

△1999 서울연극제 연출상 수상

△2000 제26회 영희연극상 수상

△2001 ‘배장화 배홍련’ 연출

△2002 ‘광해유감’ 연출

△2003 ‘서안화차’ 연출, 김상열연극상 수상, 동아연극상 연출상

△2004 ‘꼽추 리차드 3세’, ‘19 그리고 80’ 연출

△2005 ‘고양이 늪’, ‘우당탕탕 할머니의 방’ 연출

△2006 ‘강철’, ‘이아고와 오셀로’, ‘김용배입니다’ 연출, 제1회 한국여성연극인상 연출부문 수상

△2007 ‘짐’, ‘네바다로 간다’ 연출

△2010 제3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출상 수상

△2012 제22회 이해랑연극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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