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등으로부터 종종 성폭력 관련 자문요청을 받는다. 어느 기관 내에서 여성 직원 분에게 성희롱 피해가 발생했단다.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제재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피해가 향후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기관에서도 이런 요구사항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피해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존중하여 재발방지대책을 강구했던 모양이다.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10점 만점에 10점이다.

기관 내 성희롱·성폭력 고충상담원과 그 상급자가 사안에 관해서 논의하던 중에 기관 차원의 재발방지조치 이외에도 피해자에게 심리적 치유를 위한 상담을 받아보도록 권유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여기까지도 좋았다. 그 세심한 배려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피해자에게 심리 상담을 받아보도록 조언해 주고 그에 관한 여러 정보를 소개해 주는 선에서 그쳤더라면 괜찮았을 터인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 ‘옥에 티’였다고나 할까. 피해자가 심리 상담까지는 원치 않는다고 밝혔는데도 몇 번에 걸쳐서 심리 상담을 받을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이쯤에서 그쳤다면 그래도 나았을 터, 급기야는 ‘만일 기관에서 권고한 상담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피해자를 원래 근무하던 곳으로 복귀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을 피해자에게 전했단다. 이 말을 들은 피해자가 크게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심리 상담을 받는 것이 피해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선의가 지나치게 앞서다보니, 정말 좋은 취지에서 나온 권유가 정작 피해자 본인에게는 원치 않는 것에 대한 ‘강요’가 되어 버렸다.

원직에 복귀시키지 않을 수 있다고까지 하였으니,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오히려 본인의 권리가 더 침해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피해자가 이처럼 항의하고 있으니 온 힘을 다 해서 절차를 진행해 온 성희롱·성폭력 고충상담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맥이 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쯤에서 우리 법을 한 번 살펴보자. 양성평등기본법 제31조 제5항은 국가기관 등에서 성희롱 사건을 은폐했거나, 성희롱에 관한 국가기관 등의 고충처리 또는 구제과정 등에서 피해자의 학습권·근로권 등에 대한 추가적 피해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은폐 또는 그 피해 유발과 관련된 자의 징계 등을 여성가족부 장관이 관련자 소속 기관장에게 요청할 수 있다고 정한다.

당초에 이 규정을 통해서 1차적으로 대처하고자 예정했던 것은 아마도, 성희롱 피해자의 문제제기를 악의적으로 은폐하고 묵살해 버리려는 시도, 제대로 처리하기는커녕 적당히 얼버무리고 어물쩍 넘어가 버리려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2차 피해가 발생하는 것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형적인 문제 상황들이었으리라. 그런데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보자. 이 규정은 ‘고충처리 또는 구제과정 등에서 피해자에게 추가적 피해가 발생하였을 때’라고만 하였을 뿐이다. 피해를 가할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또 문제를 얼버무리려는 악의적 행동에서 피해가 유발된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는다. 엄격하게 해석하자면, 진정으로 선한 의도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배려해 주고자 하는 차원에서 무언가를 했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 추가 피해를 발생시킨 것일 뿐이라 해도 이 규정에서 금하는 2차 피해에 해당될 수 있다.

원래의 사안으로 돌아가 보자. 피해자가 상담 권유를 거절하였다는 이유에서 실제로 이 피해자를 원직에 복귀시키지 않았다면, 처음에 비록 피해자의 치유와 안정이라는 좋은 의도에서 나온 권고였다 할지라도 피해자에게 이로 인한 추가 피해가 발생하였다고 볼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성희롱·성폭력 사건에 대한 문제해결에 있어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피해자를 가능한 한 두텁게 배려하여야 함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객관적으로 보아 피해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면 이를 강권할 수는 없다. 주변인 또는 조력자로서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할 일의 최대한은 피해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폭넓게 제공한 후, 피해자 스스로 마음을 정할 때까지 조심스럽게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가 결정을 내렸을 때에 이를 존중해 주는 것이다. 때때로 설명 이외에 약간의 설득이 필요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설명이나 설득은 강권이나 강요와는 다르다. 모든 선택지를 충분히 이해하고서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라면 그에 따르는 것이 피해자 의사 존중의 처음이자 끝이다.

성희롱·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이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문제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많은 이들이 있기에 내일은 지금보다는 더 나으리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모든 사건은 상이하며 피해자가 원하는 바도 저마다 제각각이기에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래도 괜찮다. 피해자의 호소를 외면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자 하는 주변의 노력이 비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소중하다. 그 모든 크고 작은 경험들이 우리를 더 성숙하게 할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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