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헌신한 란사

남편 하상기 성씨로 불려

유족들의 성명 정정 요구에

보훈처, 위원회 열어 변경 심사

 

서울 삼청동 서울교육박물관에서 ‘최초의 미국유학생 김란사 세상을 밝히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울 삼청동 서울교육박물관에서 ‘최초의 미국유학생 김란사 세상을 밝히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유관순 열사의 스승인 독립운동가 ‘하란사’의 성명을 김란사로 정정하는 작업이 국가보훈처 차원에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란사는 1995년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에 표기된 이름이다. 현재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론에도 하란사로 표기돼 있으나 본지가 지난해 5월 문제를 제기하는 등 이름을 김란사로 변경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6월 김란사의 유족들이 성명 정정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내부 위원회를 열어 변경을 심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란사가 하란사로 불리게 된 이유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비롯됐다. 과거 이화학당에 입학한 이후 세례를 받고 ‘낸시(NASY)’라는 이름을 받아 ‘난사’라로 쓰게 되고, 이후 미국 유학을 위해 작성된 입국 서류에 남편 하상기씨의 성을 따라 ‘하란사’, ‘김하란사’ 등으로 불리게 됐다.

김란사는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의 대학(웨슬리안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독립운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하란사로 소개하면서 언론에서도 하란사로 보도했다. 특히 언론은 김란사가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시키는 목적으로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주도해 1918년 정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기부한 과정이나, 한국의 감리교 평신도 대표로 미국 모임에 참여한 일 등에 주목했다.

이후 김란사는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성과 민족 문제를 고민했다. 또 국내에서 영어를 제일 잘했던 김란사는 궁궐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1919년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의친왕을 대신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경유한 북경에서 동포가 주최한 저녁식사 후 의문사했다. 당시 47세였다.

서울교육박물관의 황동진 학예연구사는 하란사의 이름과 관련해 “그 당시에는 남편의 성을 따서 쓰는 게 신여성들의 상징이었는데 광복 이후엔 다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사용하던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란사 선생은 1919년 독립운동 중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당시 사용하던 이름 그대로 남게 됐다는 것이다. 같은 경우로는 한국 최초 여의사 김점동이 박에스더로, 김활란이 최활란으로, 여메리가 황메리로 이름을 사용했다. 에스더(Esther)뿐만 아니라 헬렌(Hellen), 메리(Merry)는 모두 세례명으로, 한자 음역으로 이름을 만든 것이고 남편의 성을 붙였다.

김란사 선생의 유족들이 수년에 걸쳐 적극적으로 공론화함에 따라 이제는 곳곳에서 김란사라는 이름이 중요 학술 자료나 기관에서 쓰여지고 있다. 사학자 고혜령 선생은 올해 초 발간한 김란사의 평전 ‘꺼진 등에 불을 켜라’에서 ‘하란사의 본명, 김란사를 찾아주자’라고 서술했다.

서울교육박물관에서는 현재 ‘시대를 앞서 간 여성의 위대한 이야기, 신여성 김란사’ 특별전을 열리고 있다. 김란사의 모교이자 교감으로 교육자 생활을 했던 이화여고(당시 이화학당)도 한국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박에스터)과 김란사 선생, 유관순 열사를 소개하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황 연구사는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입장에서 통합에 도움되지 않는 조선인들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40번째쯤에 김란사·하상기 부부가 포함됐었다. 하상기는 건달, 사기꾼이고 김란사는 기생이고 후첩이라고 기록해 거짓 음해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란사 선생은 배움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우쳐 사비로 미국 유학까지 했다. 이후 학생들을 키우고 학교에 보내고 봉사활동하면서 여성이 깨어나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주장했던 대표적인 교육자”이라면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유족인 김용택씨는 상동교회 김종설 민족교회연구소장의 말을 빌어 ”장렬한 삶을 살다 산화한 분”이라면서 “‘비운’이라는 식의 표현은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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