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영일 발렌시아 대표

30년간 여성복 발렌시아 이끌어

95년 ‘샤넬 No.5’ 광고에 반해

“샤넬은 여성들 해방시킨 디자이너”

환갑 맞아 유럽 횡단하며

샤넬 인생 담은 여행에세이 출간

 

김영일 발렌시아 대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영일 발렌시아 대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995년 파리, 한 여자가 잡지를 읽다가 충격에 빠졌다. 불멸의 아이콘 ‘샤넬 No.5’의 인쇄광고였다. 잠잘 때 무엇을 입고 자냐는 질문에 “샤넬 No.5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는 ‘마릴린 먼로’의 대답으로 유명한 빅히트 향수. 화려하고 특이한 디자인의 옷들이 잡지를 가득 채웠지만 광고는 그 자체로 여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자는 약 20년 후 환갑의 나이에 영국, 스위스, 프랑스 등을 다시 찾았다. 목적은 명확했다.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의 일생을 느껴보고 싶어서다.

“일요일 센느 강변을 따라 열리는 중고 책 노점상에서 오래된 패션잡지 몇 권을 샀습니다. 마치 UFO가 실수로 지구에 툭 떨어뜨리고 간 것 같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세련된 디자인과 이미지였어요. 1950년대 패션 무드로 장식된 잡지에서 ‘샤넬 No.5’ 광고는 모던함의 끝이었죠. 이전부터 ‘샤넬 No.5’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도 같은 디자인의 공병을 사용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 광고를 본 후 인간 가브리엘 샤넬에 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지워지지 않았어요.”

짧은 머리, 흰 셔츠와 검은 바지에 투명한 안경을 쓰고 나타난 김영일 발렌시아 대표가 샤넬과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새해가 시작됐을 때 일 년 계획을 세우면서 환갑 기념으로 여행 에세이를 한 권 쓰고 싶었다”고 했다.

“예전부터 여행을 너무 좋아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어요. 개인적으로는 패션 비즈니스로 보낸 30년의 세월을 기념해 가브리엘 샤넬의 인생에 영향을 준 장소를 찾아서 돌아봤죠. 한 사람의 디자이너, 사업가, 여자로서 그의 삶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한 권의 책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김 대표가 독립출판 형태로 펴낸 책 『가브리엘 샤넬을 찾아가는 길』은 자신이 사랑하고 영향을 받은 세기의 디자이너이자 천재 사업가 샤넬이 걸어온 인생을 찾아 그를 돌아본 책이다. 지난해 1월부터 준비를 시작해 샤넬의 인생을 일종의 여행 에세이로 풀어냈다. 영국 이튼홀, 프랑스 오바진 성당의 수녀원, 도빌 해변가와 비아리츠, 이탈리아 베니스의 리도섬과 스위스 로잔에 있는 무덤에 이르기까지 샤넬에게 영향을 준 구석구석을 찾았다. 글, 그림, 사진을 모두 직접 진행할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현재는 책을 선보일만한 여러 유통 경로를 고민 중이다.

 

프랑스에서 1951년 발간된 모드와 작업이라는 잡지의 ‘샤넬 No.5’ 광고.
프랑스에서 1951년 발간된 모드와 작업이라는 잡지의 ‘샤넬 No.5’ 광고.

샤넬의 흔적 쫓아 유럽 횡단

김 대표는 잡지를 꺼내 기자에게 직접 보여줬다. 빛이 바래고 종이가 낡아 넘기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1950년대 잡지였다. 손상을 막기 위해서인지 잡지는 투명 백에 담겨 있었다. 종이를 몇 장 넘기지 않아 ‘샤넬 No.5’ 광고가 자태를 드러냈다. 장식이 전혀 없는 투명한 크리스털 병에 이름마저 기계적인 느낌을 주는 로고가 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검은 글씨로 ‘CHANEL’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단순하지만 그만큼 강렬하다. 처음 샤넬과 사랑에 빠진 순간을 얘기하며 눈을 반짝이는 그의 모습에서 예순이라는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디자이너 샤넬은 1924년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와 함께 ‘샤넬 No.5’를 만들었다. 한 가지 원료로만 향수를 만들던 시대에 천연원료와 합성물의 조화로 새 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인류 최초의 인공 향수인 셈이다. 스테디셀러인 향수보다 먼저 샤넬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건 뭐니뭐니해도 그가 디자인한 옷이다.

“왜 여자들은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치마를 땅에 끌고 다녀야만 할까?” 샤넬은 여성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줬다. 샤넬은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주로 디자인했다. 최초의 ‘여성용 승마 바지’ 무릎 아래를 살짝 덮는 ‘리틀 블랙 드레스’ 낮은 굽의 ‘발레리나 슈즈’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트위드 재킷’ 등이 바로 그것이다. 패션 회사가 처음으로 향수를 제조한 것도, 샤넬 문양의 숄더백과 빨간 립스틱 등을 유행시킨 것도 모두 샤넬이다. 김 대표 역시 “샤넬은 100년 전 전통의상에 얽매여 있던 여성들을 해방시킨 디자이너”고 설명했다.

“샤넬은 여성이 치마를 입고 승마를 하던 시절 바지를 만들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죠. 남성복에만 있던 주머니를 과감히 여성복에도 만들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너무 이상하고 소수를 위한 디자인 같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도 변함없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을 만든 거죠. 100년이 넘는 긴 시간, 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의 말과 의견에 귀 기울이게 된다는 60. 김 대표는 샤넬의 발자취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영국부터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와 스위스까지 유럽을 횡단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로 프랑스 ‘오바진 수녀원’과 영국 ‘이튼홀’을 꼽았다. 오바진은 샤넬이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인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다. 샤넬의 아버지는 샤넬이 11살 때 수녀원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그를 맡기고 떠났다. 19~20세기 초반 상류층 딸들은 성당의 기숙사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샤넬도 18살까지 이 수녀원에서 그들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 『코코 샤넬』의 저자 에드몽드 샤를 루는 샤넬의 C자가 겹쳐진 로고가 수도원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샤넬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장소를 찾는다면 아마도 오바진 수녀원이 아닐까요. 그동안 봤던 화려한 장식과 웅장한 규모의 성당들과 달리 이곳은 매우 검소한 디자인에 단아한 분위기였어요.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샤넬에게 남다른 심미안을 키워줬을지도 모릅니다.”

김 대표는 “영국의 이튼홀에서도 깊은 여운을 느꼈다”고 했다. 이튼홀은 1924~1930년까지 가브리엘 샤넬의 연인이었던 제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사저였다. 지금의 이튼홀은 7대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사저로 평소 접근이 불가능한 정원이다. 일 년에 단 이틀만 일반인에게 개방하는데, 공개 날짜도 그때그때 다르다. 당시에는 7월 31일과 8월 28일에만 이튼홀을 방문할 수 있었다. 김 대표는 지난해 7월 31일 서울에서 맨체스터행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은 하나였다. 이튼홀!

“프랑스인이었던 샤넬은 영국의 귀족이자 최고의 갑부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을 만나면서 디자인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그때까지 여성복에서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영국 스코틀랜드 트위드(tweed)를 소재로 여성용 재킷을 만들었으니까요. 트위드는 영국 귀족들이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소재였습니다. 아마도 이 공작을 통해 샤넬이 접하지 않았을까요?”

 

김영일 대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영일 대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좋아하면 닮는다” 샤넬과 비슷한 인생 궤적

좋아하면 닮는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김 대표가 30년 넘게 이끌어 온 발렌시아에서도 샤넬과 비슷한 부분을 엿볼 수 있다. 1984년 론칭한 발렌시아는 조용하지만 내실 있게 성장해온 여성복 브랜드다. 여성 직원은 전체의 60% 정도. 발렌시아의 철학은 ‘여성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옷을 만들자’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 창출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며 발렌시아를 입는 여성뿐 아니라 모든 여성의 행복을 추구한다.

“과거에는 비싼 옷이 좋은 옷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요즘은 가격도 착하고 멋진 옷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특히 제가 여자여서 그런지 월급의 너무 많은 비중이 옷값으로 지출되는 것은 행복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직장인이 퇴직하고 나면 가장 많이 남는 것이 옷장을 가득 채운 옷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는 샤넬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로 “프랑스에서 이렇게 많은 고용을 창출한 여성이 또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샤넬은 패션 비즈니스로 고용한 직원이 40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업계 특성상 여성 직원이 대부분이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던 무렵, 중공업을 제외하고 그 정도의 일자리를 창출한 패션 브랜드는 샤넬이 유일무이했다.

김 대표는 전문직 여성들의 지위 향상과 봉사를 목적으로 설립된 봉사단체 ‘국제 존타클럽’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단체에서는 본인 스스로 자립할 수 있고 타인을 고용해야 ‘잘난 여성’으로 정의한다. 김 사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가브리엘 샤넬이 유럽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여성 사업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일 대표 뒤로 직접 그린 달력이 걸려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영일 대표 뒤로 직접 그린 달력이 걸려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60대에도 꼼데가르송 어울리는 사람”

손재주가 많은 그는 해마다 직접 그린 달력을 주변 지인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기업용 마케팅용 달력만 있는 것이 아쉬워 만들기 시작한 것이 벌써 11년째다. 회사 사무실 곳곳에서도 그가 그린 그림을 구경할 수 있다. 초록색 배경에 빨간 사과가 여러 개 놓여있는 그림 같이 주로 다양한 색채를 사용했다. 반면 의외로 좋아하는 스타일은 “흰 셔츠와 배기바지”라고 했다. 자주 입는 컬러 또한 ‘블랙’이다.

“60대에도 꼼데가르송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1980년대 중반 동경의 꼼데가르송 매장에서 머리가 하얀 60대 정도의 여성이 그 브랜드의 옷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본 순간, 나도 60대의 나이에 저렇게 멋지게 늙고 싶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후로도 항상 꼼데가르송 옷이 잘 어울리는 60대이길 노력해왔죠.”

환갑의 나이에도 계속해서 여행하고 꿈꿀 수 있는 게 쉬운 건 아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지치지 않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김 대표는 “우리의 몸은 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뇌가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 몸은 따라가는 것 같다”며 “운동을 좋아해 기초체력이 좋은 것 같지만 항상 움직일 수 있을 때 멀리 있는 곳부터 다니자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대표는 자기 관리도 철저히 하는 편이다. 하루에 5km를 매일 걸을 때도 있었고, 일주일에 4번 정도는 규칙적으로 근력운동을 해왔다. 수영장이 집 근처에 있을 때는 하루에 1km씩 논스톱으로 날마다 7년을 해오기도 했다고. 최근에는 한 시간 반 정도 자전거를 타거나 퍼스널트레이닝(PT)을 받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테마여행 작가를 도전해보고 싶어요. 시대를 앞서간 여성 아티스트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요. 요즘 생각하고 있는 작가는 미국의 대표적인 화가 ‘조지아 오키프’입니다. 또 VIP만 들어갈 수 있어 출입을 못했던 샤넬이 살던 리츠호텔이나 캉봉거리 32번지 아파트에 들어갈 기회가 생긴다면 개정판이나 ‘샤넬2’를 만들고 싶어요.” 김 대표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가브리엘 샤넬을 찾아가는 길』

환갑의 나이와 패션인생 30년을 기념해 김영일 사장이 흠모하고 영향을 받은 세기의 디자이너이자 천재사업가 ‘가브리엘 샤넬’이 걸어온 인생을 찾아 그녀를 뒤돌아본 책이다. 연인 웨스트민스터 공작과의 데이트 장소였던 영국 이튼홀, 11~18살을 보낸 프랑스 오바진 성당의 수녀원, 한 편의 영화 같은 프랑스 도빌 해변가와 샤넬의 핫스팟 비아리츠, 샤넬의 아카이브였던 이탈리아 베니스의 리도섬과 스위스 로잔에 있는 그녀의 무덤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쓴 일종의 기행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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