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

“여성에 ‘슈퍼우먼 콤플렉스’ 강요 말라 

육아·가사노동 등 여성이 떠안은 부담, 

남성과 국가와 사회가 나눌 때” …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가 1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방한성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가 1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방한성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여성이 계속 위로 올라가려면 매일 결연한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높은 위치에 오른 후에도, 우리 여성들은 내 능력과 가능성을 의심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매일 실력을 갈고닦아 증명해야 하죠. (...) 하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어요. 그럴 필요가 없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죠.”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말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지난 6일 여성금융인네트워크(회장 김상경)·이투데이 공동 주최로 열린 ‘2017 대한민국 여성금융인 국제 콘퍼런스’에서 그는 “여성이 동등한 구성원으로 대우받는 것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이 활약할 수 있는 통합적(inclusive)인 일터를 만드는 게 지속가능하고 더 나은 성장의 시작”이라고 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남성 중심적인 법조·정치·금융계에서 고위직에 올라 활약하며 전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온 입지전적인 여성이다. 1956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 10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반독점법과 노동법 관련 사건을 주로 맡았다. 2005년 프랑스로 돌아와 대외통상장관, 농업 수산부 장관을 거쳐 G8 국가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 자리에 올랐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그를 ‘2009 유럽 최고의 재무장관’에 선정했다.

2011년 7월, 그는 188개 회원국을 둔 IMF의 사상 첫 여성 총재로 선출됐다. 2011년은 유럽의 재정위기 우려가 그리스에서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 확산되며 주요 선진국이 재정 긴축에 나서는 등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유증이 본격화된 해였다. 성폭행 혐의 등으로 물러난 전임자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탓에 IMF 내부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런 가운데에도 업무 수행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만장일치로 연임에 성공했다. 

늘 승승장구하진 않았다. 지난해 그는 2007년 프랑스 재무장관 재임 시절 아디다스에 부당 혜택을 준 ‘과실’이 인정돼 프랑스 법원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IMF 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어 라가르드 총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확인하고 총재직을 유지하도록 결정했다. 그는 지난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중 6위에 올랐고, 여전히 많은 여성들의 롤 모델로 불린다.

이날 라가르드 총재는 “한국 여성들은 그간 국내외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줬지만, 수많은 장애물과 편견에 가로막혀 제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가 국가 경제를 살리는 해결책이다. 더 많은 여성이 일할 수 없다면 이 위기를 타파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은 2016년 기준 58% 수준으로 여전히 OECD 회원국 35개국 중 하위권이다. 2009년부터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초월했지만, 지금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도 37% 더 적은 보수를 받는다. 한국의 남녀임금격차는 2002년 OECD 공식 집계 시작 이래 줄곧 1위다. ‘유리천장지수’도 5년 연속 OECD 꼴찌다. 올해 30대 그룹 임원 승진자 중 여성은 37명(2.4%)에 불과했다. 보육 인프라 미비와 고강도 장시간 노동은 임신·출산한 여성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경력 단절을 경험하도록 강요한다. 다시 일자리를 얻어도 대개 저임금 직종이나 시간제 일자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노동시장 내 성차별이 동등한 자격이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임금 차별, 성별로 분리된 직종·직위 문제, 비정규직·하청 같은 불안정 고용형태 등이 결합된 문제라고 지적해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8일 오후 서울 외교부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를 접견하며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8일 오후 서울 외교부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를 접견하며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한국은 여성 대표성을 늘릴 바탕이 될 법제도를 갖췄습니다. 문제는 전통과 문화입니다. 하루아침에 바꿀 순 없지만,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라가르드 총재의 말대로 많은 기업 내에는 여전히 여성에게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업무나 직무와 무관한 잡일을 맡기고, 아예 채용조차 기피하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젠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기업의 적극적인 노력과 조처가 필요한 이유다. “저도 젊은 시절 회사에서 ‘커피 좀 따라 보라’는 요구를 받은 적 있습니다. 입사해 보니 직원은 다들 남자고, 여성은 보이지 않았죠. 이런 편견이 수십 년째 그대로라는 게 문젭니다.” 

그는 여성 임파워먼트를 위해 ‘3L’이 중요하다고 했다. “여성들에게 더 많은 교육(Learning) 기회, 노동(Labor) 시장에 진출해 재능을 발휘할 기회, 나아가 제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승진해 리더십(Leadership)을 보일 기회를 누릴 권리를 제공해야 합니다.” 

특히 여성 할당제는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적극적인 조치이자, 효과적인 기업 경영을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IMF가 유럽 34개국의 200만개 기업을 조사해보니, 이사회에 여성 임원이 1명 이상 존재하는 기업은 총자산이익률(ROA)을 8~13bp(1bp=0.01%P)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OA란 기업이 보유 자산을 얼마나 잘 운용했는지 알려주는 지표다. ROA가 높을수록 보유자산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이익을 많이 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 등 많은 나라들이 공공·민간부문 여성 임원 비율을 30~40%까지 높이는 할당제를 속속 실시하고 있다. 한국도 동참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멘토링도 중요하다. “많은 조사 결과 여성들은 직장이나 업계 내에 ‘롤 모델이 없다’는 점을 승진과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더군요. 꼭 여성만이 여성의 멘토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의 상황에 맞춘 조언이 여성에겐 그리 유용할 리 없죠.” 라가르드 총재 본인도 미국 로펌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무렵 훌륭한 멘토를 만났다. “제 멘토는 다정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이었습니다. 신입 직원들에게 ‘비즈니스에 걸맞은 복장을 갖춰 입고, 대중이나 클라이언트, 동료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고, 문제가 생기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시정하라(dress, address, and redress)’고 가르쳤습니다. 젊은 나이엔 얻기 어려운 중요한 가르침이었죠.”

라가르드 총재의 롤 모델은 그의 “한없이 강인하고 특별한” 어머니다. 부친은 그가 16세 때 사망했다. “어머니는 모든 책임을 도맡으며 홀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전통적인 (수동적이고 남성의 보호를 받는) 여성에 대한 관념도 깨야 했죠. 전 그런 어머니께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법조계에서, 정계에서, 금융계에서 ‘유리천장’을 깰 때마다 그가 스스로를 수없이 채찍질한 배경이다. “미국 로펌의 회장으로 선출됐을 때, 첫 여성 장관을 맡았을 때, 내가 잘 해내지 못하면 다른 여성들도 좌절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만 했죠. 그래야 다른 여성들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고위직에 올라 더 큰 책임을 맡게 된 여성이, 일과 가정, 개인 생활 등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여성에게 ‘슈퍼우먼 판타지’를 주입하고 강요할 게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여성의 짐을 분담해야 한다고 라가르드 총재는 강조했다.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서른 살에 첫 아이를 낳은 그는 워킹맘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 그가 가족친화적인 기업 문화 형성, 남성의 가사·양육·돌봄노동 참여를 유도할 기업 정책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이유다. 

“저도 한국 여성들만큼 미친 듯이(crazy) 힘들게 일과 육아를 병행했죠. 육아휴직, 유연한 근로시간제 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겨우 버텼어요. 하지만 오늘날 여성들은 그런 권리를 마땅히 누려야 합니다. 여성의 고통을 사회가 나눠야 합니다. 이제 육아는 엄마만의 일이 아니라 부모의 일이라는 인식이 퍼져야죠. 가사·양육·돌봄을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부담할 성평등 문화와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IMF도 이 문제를 위해 앞장서서 노력하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수많은 유리천장을 깰 수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혼자서는 온갖 장애물을 넘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서로의 응원과 지지가 필요하죠. 저도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나세요. 든든한 내 편을 만드세요. 멈추지 말고 웃으면서 전진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마세요.”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

파리정치대학, 파리10대학(법학석사), Aix-en-Provence 대학(영문학석사)

1981년 미국 Baker&Mckenzie 법률회사 변호사 (반독점 및 노동법 전문)

1995년 Baker&Mckenzie 이사

2004년 Baker&Mckenzie 세계전략위원회 위원

1999~2004년 Baker&Mckenzie 유럽담당회장

2005~2007년 프랑스 통상장관

2007~2011년 프랑스 재무장관(경제·산업·고용부장관, 여성 최초)

2011년 7월~ 제11대 IMF 총재(여성 최초, 2016년 7월부터 5년간 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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