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제시카 존스(Marvel’s Jessica Jones)’의 주인공, 제시카 존스. ⓒMarvel
넷플릭스 시리즈 ‘제시카 존스(Marvel’s Jessica Jones)’의 주인공, 제시카 존스. ⓒMarvel

강한 여자는 좋다. 여자아이들이 공주를 좋아하는 것은 권력이 있는 인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걷지도 못하는 아기들이 귀신같이 나의 소중한 최신 핸드폰을 알아보듯, 여자아이들은 공주가 연애하는 이야기에서 공주는 힘이 있어서 하인의 우러름을 받는 존재임을 알아본다. TV 만화시리즈 ‘파워퍼프걸(The Powerpuff Girls)’의 세 꼬마가 인기 좋은 것은 당연하다. 못된 놈들을 마구 때릴 힘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 힘을 마음껏 써도 된다는 사회의 합의와 존중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영화 ‘겨울왕국(Frozen)’에서 제일 멋진 장면은 엘사가 스무 해 꾹꾹 눌렀던 자기 힘을 발휘하는 대목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제시카 존스(Marvel’s Jessica Jones)’ 시즌 1을 보고 있노라면 ‘능력’이 있는 여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리고 ‘능력’이 있는 남자가 어떻게 세상과 주변을 망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초인적인 신체 능력이 있는 제시카 존스는 목소리로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자 킬그레이브에게 성폭행을 당한 과거가 있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탐정 일을 하고 있다. 세 치 혀로 사람을 현혹하는 킬그레이브의 능력은 남자의 어리광이 어떻게 관계의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이 세상이 남성의 발언권에 얼마나 과하게 무게를 주는지 상징한다. 킬그레이브는 아동학대를 받으며 비뚤어졌고 세상을 자기 원하는 대로 왜곡해 만족을 얻고자 하며, 자신이 얼마나 관대한지 강조하며 제시카와 자신의 관계는 상호합의에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제시카 존스는 이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남이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시킨 것 자체가 모독이며 어떻게 꾸미더라도 강간은 강간이라고. 

그 대사가 나오는 순간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드라마에 나오던 ‘강한 여성 인물’의 시대가 바뀌었음을 선언한다. 이야기, 이른바 내러티브란 ‘시공간적으로 인과관계가 있는 사건의 연속’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인과관계를 만드는 요소가 주인공이고, 중요인물일수록 그 인물이 빠지면 이야기의 인과관계가 흐트러지며 이야기 진행이 안 된다. 제시카 존스가 주인공인 이유는 제시카가 이 작품 세계의 인과관계를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며, 제시카 존스가 강한 것은 물리적 능력과 더불어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고칠 힘이 있기 때문이다. 힘이 센 여성이 곧 강한 여성은 아니다. 힘이 있는 여성이 주축이 되어 자신의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주요 줄거리가 될 때, 강한 여성 인물이 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제시카 존스(Marvel’s Jessica Jones)’ 의 주인공 제시카 존스(왼쪽)와 악당 킬그레이브 ⓒMarvel
넷플릭스 시리즈 ‘제시카 존스(Marvel’s Jessica Jones)’ 의 주인공 제시카 존스(왼쪽)와 악당 킬그레이브 ⓒMarvel

아무개가 강한 힘이 있다, 명민하다는 것은 인물을 만드는 설정일 뿐이다. 그 설정이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만들며 진행될 때 진정한 역할을 한다. 출중한 남자 탐정 옆에 똑같이 머리 좋은 여성이 등장했는데, 그 여성이 극중에서 하는 일이란 남자 인물의 앞길을 가로막거나 갈등을 고조하는 것뿐이라면? 사건 해결에 아이디어만 주고 발을 빼 버린다면? 맞서 싸우다 살해되는 장면이 선정적으로 전시된다면? 설정에 머무른 강함은 장식일 뿐이다. 제시카 존스의 친구 트리시가 평범한 사람이지만 강한 것은 트리시가 강한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이야기상 중요하기 때문이다. 변호사 호가스가 부인을 두고 불륜이나 저지르는 개차반인데도 긍정적 의미의 강한 인물로 보이는 것은 극중 유능한 변호사로 활약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남성 작가들이 좋은 여성 인물을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에게 고난만 안기면 강한 여성이 나온다고 착각해 왔다. 혹은 멋있게 생긴, 힘 센 수퍼히어로 여성이 강한 여성이라고 착각해 왔다. ‘제시카 존스’가 수퍼영웅물이지만 강간범죄 생존자를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이 저질렀던 길을 답습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 것도 사실인데, 매우 현명하게 이를 타파한다(강조한다. 피해 가는 게 아니라 타파한다). 작가가 제시카 존스가 드라마의 인과관계를 쌓는 주축임을 잊지 않았기에 가능하다. 웃고 애교 좀 피워 보라는 남자의 폭력에 ‘시끄러워 이 강간범아’ 일갈할 수 있는 제시카 존스는 ‘드라마’라는 세상을 만드는 주체가 누구인지 전례 없이 강력히 보여준다. 

 

남명희 영화학 강사, 연극영화과 박사. 현재는 TV시리즈와 팬덤 연구를 하고 있다. 

영화와 TV 시리즈 평을 기고했으며, 필명 '워리'로 카툰 리뷰를 연재했다.

저서로 『미치도록 드라마틱한 세계, 미드』와 『팬픽션의 이해』가 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