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은 2017년 하반기부터 새 연재 칼럼 ‘기울어진 극장’(가제)을 선보입니다. 무용, 문학, 영화, TV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젠더 관점으로 문화 예술 콘텐츠와 이슈를 되짚어봅니다. 굳은 인식의 틀을 깨고, 기울어진 지형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논의하는 장이 되길 바랍니다. 

 

뮤지컬 ‘컨택트(Contact)’의 한 장면 ⓒWikipedia
뮤지컬 ‘컨택트(Contact)’의 한 장면 ⓒWikipedia

서점가에 넘쳐나는 시나리오 작법서 부류의 책 한 권만 들춰봐도 장르에 따라 선호되는 주인공이 어떤 타입인지 곧 알 수 있다. 주인공은 황금양털을 찾으러 떠나는 전사일 수도 있고 역경을 이겨내고 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바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평소에는 내성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지만 어떤 계기를 만나 슈퍼히어로로 변신하기도 한다. 조연에 비하면 다양한 편이라 하겠으나 장르별로 특정한 유형의 주인공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여성 캐릭터에 한정한다면 창작물 안의 여성들은 대개 어떤 남성의 파트너로 존재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파트너가 없는 여성은 대개 조연에 머무르고 주인공인 여성은 역시 주인공인 남성의 구애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남성에게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가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여성인 주인공의 여정에서 남성 파트너의 존재는 아직까지 굳건한 듯하다. 반대로 여성 파트너 없이도 혼자 모험에 나서서 성장담을 써 내려가는 남성 주인공은 얼마나 많은가.

당연히 파트너가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 창작물 속 여성 주인공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파트너와의 관계에 의해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존재다. 남성을 구원하는 성녀나 파멸로 이끄는 창녀의 오래된 이분법이 여기서 기인한다. 남성 캐릭터 역시 그 운명이 결정되는 데 있어 여성의 역할이 작용한다는 점에서 관계에 매여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관계에 봉사하기 위해 설정된 여성 캐릭터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주인공 위치에서도 본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갖지 못하고 남성에게 동기부여를 해주거나 결말을 위한 장치로 소모되는 여성 캐릭터가 부지기수다.

소수의 제한된 관객들과 만나기에 실험적인 접근을 한다고 곧잘 오해되는 장르인 공연예술 쪽은 어떨까. 무용은 여성 예술가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장르지만 움직임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르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몸의 전시가 일어나고 이에 따라 몸의 대상화를 통한 여성의 타자화가 가장 노골적으로 이루어진다.

무용예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발레는 이상화된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여성을 타자화하는 대표적인 장르다. 발레작품의 여성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남성에게 배신당하고 죽어가면서도 그를 용서하고, 자신이 사랑을 배신한 대가가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야 회한에 찬 눈물을 흘리는 남성 주인공들은 여성의 용서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 신분을 속이고 접근한 연인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충격으로 죽음에 이르는 지젤<지젤>이나 연인이 다른 여자에게 사랑의 맹세를 함으로써 자신의 마법을 풀 기회를 날려버렸음에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오데트<백조의 호수>,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약속한 연인을 위해 비탄을 누르고 춤을 추어야 하는 니키야<라 바야데르> 등이 그 대표적인 주인공들이다.

낭만발레와 고전발레 시대가 저물고 이사도라 덩컨이 슈즈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무대에 오르며 현대를 활짝 열어젖혔지만 무대 위에 구원의 여신으로 우뚝 세워진 여성상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노래하지 않는 뮤지컬’로 2000년 뮤지컬 시장에서 큰 화제가 된 <컨택트>는 작품의 완성도가 캐릭터의 완성도와 별도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컨택트>는 ‘Swing’, ‘Did you move?’, ‘Contact’의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극본을 쓴 존 웨이드는 마지막 작품의 남자 주인공 마이클 와일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등장인물에게도 이름을 부여해주지 않았다. 세 번째 에피소드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밤마다 바에 나타나 스윙댄스를 추는 신비로운 노란 드레스의 여인이지만, 이 여인은 절망에 빠져 밤마다 자살을 시도하는 와일리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등장한 구원의 여신이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그녀는 와일리의 아파트 아래층에 살며 그가 내는 층간소음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하는 생활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은 와일리가 구원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고통을 외면하는데, 그녀의 잠 못 드는 고통은 와일리의 고통스러운 자살시도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란 드레스의 여인과 춤을 춤으로써 자신을 되찾은 와일리는 층간소음에 항의하러 올라온 아래층 여인과 다시 춤을 추는 것으로 구원을 완성한다. 아래층 여인의 고통이 끝나는 순간은 와일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순간이며, 구원의 계기를 마련해준 신비로운 여인은 밤과 함께 사라진다. 무대에 남은 것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와일리의 기쁨이다. 관객들은 구원받은 와일리를 확인하고 안도하며 극장을 떠난다. 

이 구원의 노란 드레스 여인이 롤랑 프티의 단편 발레 <젊은이와 죽음>에서 젊은이에게 죽음을 가져다준 노란 드레스의 여인을 뒤집은 것임을 생각하면 다소 맥이 풀리는데, 구원의 여신은 파멸의 여신을 뒤집지 않고도 이미 도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창작물 바깥의 남성들이 창작물 속 남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쉬지 않고 구원의 여신을 불러내고 있는 한, 남성을 구원하고 사라지는 여성들은 이야기만 달라질 뿐 계속 되돌아올 것이다.

윤단우 작가, 무용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언론학을 전공했다. 

무용월간지 <몸>에서 기자로 일했고 지금은 와이즈발레단 기획팀을 맡고 있다.

쓴 책으로는 발레에세이 『열아홉번의 사랑』, 『사랑을 읽다』,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 『결혼파업, 30대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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