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페미니스트 지식인 리베카 솔닛

‘맨스플레인’ 현상 비판해

전 세계 여성들의 공감 얻어

“페미니즘은 인간의 해방 위한 운동

…다양한 문제와 연대한다면

세상 바꿀 변화 이룰 것”

 

미국의 페미니스트 저술가인 리베카 솔닛이 25일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미국의 페미니스트 저술가인 리베카 솔닛이 25일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미국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지식인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한국을 찾았다. 오는 30일 새 에세이집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창비) 출간 기념 방한이다. 그는 2010년 한 칼럼을 통해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단어를 널리 알리며 명성을 떨쳤다. 맨스플레인은 ‘남성(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한 말로, 남성이 여성을 가르치려 드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해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단어’에 오른 말이다. ‘맨스플레인’ 사례를 통해 여성에 대한 일상적 폭력과 억압을 고발한 솔닛의 저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창비)는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2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솔닛은 이번 책이 “젊은 여성들이 주도하는 새롭고 아름다운 페미니스트 혁명의 흐름에 관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혐오, 여성 폭력 등이 빈발하며 여성들은 거대한 전쟁에 직면했다”면서도,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으며, 왜 더 달라져야 하는가다. 페미니즘은 수천 년 묵은 구습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단시간 내에 변화를 기대할 순 없다. 하지만 분명히 세계는 변화하는 중이다. 침묵을 깨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여성들은 많은 성취를 이뤘다”라고 했다.

전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페미니즘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말한 그는 최근 한국과 미국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부흥한 페미니즘 운동에 박수를 보내며, 이 흐름에 작은 역할을 하게 돼 고맙다고 했다. 솔닛은 4박 5일간 한국에 체류하며 페미니즘과 평등에 관한 대중 강연 등을 펼친다. 아래는 일문일답.

 

미국의 페미니스트 저술가인 리베카 솔닛이 25일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미국의 페미니스트 저술가인 리베카 솔닛이 25일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 젊은 페미니스트들과 이전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보나. 

(미국) 구세대 페미니스트와 신세대 페미니스트들 간 견해 차이가 크고, 서로에게 적대적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그러나 나는 세대 간 견해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대학가, 터키, 인도, 영국 등 각지에서 끔찍한 여성 폭력이 일어나자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우리는 더 참을 수 없다,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쳤고,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폭력에 맞섰다. 새로운 도전은 아니지만, 이들은 새로운 언어와 도구, 역량을 갖고 전략을 세워서 싸우고 있다.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인종, 성적지향 등 다양한 교차(intersect) 지점을 잘 포착해 연대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 강간문화를 비판하면서 미국 트럼프 정권의 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백악관엔 여성혐오, 강간문화가 존재한다. ‘정통 백인 우월주의’, 기독교 우월주의도 팽배하다. 여성의 역할을 빼앗아 과거의 제한된 성 역할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여성의 성기를 움켜쥐(grab them by the pussy)’겠다고 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매우 그로테스크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전하는 연대의 메시지가 있다면.

한국의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열렬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반갑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승리하고 있다. 우리의 수가 늘 수록 우리는 더 강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남성의 역할도 중요하다. 예전엔 페미니즘이 ‘여성이 할 일’로만 여겨졌지만, 성차별을 해소하는 일은 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모두의 해방과 직결된 문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폭력이라고) 정확하게 규정하고 남성들에게도 (이런 문제를 해소할) 책임을 엄중히 묻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 맨스플레인 이후 또 다른 신조어를 만들 계획이 있나.

‘맨스플레인’은 사실 내가 만든 말이 아니다. 기존의 말을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급속히 퍼져나가 이제는 30개 언어로 번역됐다고 들었다. 한국에선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냥 ‘맨스플레인’이다.) 그런가(웃음). 최근엔 ‘privilivious’라는 말을 만들었다. 특권(privilege)과 망각하는(oblivious)을 결합한 말로, 자신이 지닌 특권에 무감각한 이들을 꼬집는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처럼 말이다. 이렇게 어떤 말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게 유행이 될 지는 모르겠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유튜버 살해협박 방송과 이에 대한 후원, 페미니스트 교사에 대한 공격 등, 최근 발생한 페미니즘 관련 주요 사건을 설명한 후) ‘남성연대’의 공격을 받고 있는 한국 여성들에게 전할 조언이 있다면.

말씀해 주신 사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건은 미국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다. 사실 이런 사건들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보며 매우 겁을 먹었음을, 페미니즘이 실제로 힘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당신의 적이 공포에 떤다는 건, 당신이 강하고 영향력이 있다는 뜻이니까. 최근 젊은 남성들이 온라인 포르노, 온라인 게임 등을 통해 여성혐오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돈이 없다고, 결혼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도 있다. 이들은 여성과 어떻게 접점을 가져야 할지(to connect) 모른다. 

성폭력 피해자를 탓하는 일, 문화적 폭력 등 그간 개별적 사건으로 여겨진 일들을 모아서 특정한 패턴이 존재함을 발견해야 하며, 그 패턴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게 중요하다. 캠페인, 여성 인권을 보호하는 입법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친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본다. 

- 페미니스트인 동시에 반전운동가, 환경운동가, 아나키스트 등으로도 잘 알려졌다. 

지난 15년~18년간 불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두를 위한 해방’이 제 활동 영역의 공통분모다. 페미니즘은 인권 운동으로서 사람들이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이다. 권위와 위계질서에 반대한다는 면에서 나는 아나키스트지만, 동시에 실용주의자다. 또 자연을 벗하며 자라난 사람으로서 기후변화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최근 국제 환경단체인 OCI(Oil Change International)의 임원이 됐다. 이런 운동에 참여하는 일은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나는 책이나 지적인 관념에 푹 빠져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일어나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일은 내 영감의 원천이자, 가장 멋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누릴 수 있는, 내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다. 

- 전 세계적으로 혐오가 증가하고 있다고 진단했는데, 왜 그렇다고 보나? ‘걷고, 읽고, 쓰기’가 혐오에 맞서는 근본적인 방법일까? 

현대에 접어들며 증오가 더욱 눈에 띈다. 하지만 여성 폭력, 아동학대, 식민주의, 인종차별 등이 지금보다 더 심각했던 시기가 있다. 수 세기 거듭된 인권운동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더 나은 사람들이 됐다. 이런 야만이 이름조차 갖지 않던 시절이 있다. 장애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어떻게 방치되고 죽어 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이야기하지 않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 이런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다. 물론 사적인 공간에서 저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우리 모두 함께 행동해야 한다. 

빠른 삶의 속도, 인식의 속도를 (상대적으로 느린) 걷기, 읽기 쓰기가 보완할 수 있다. 삶은 몹시 불안정하고, 너무 어렵고 끔찍해서 사람들은 분노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분노는 매우 얄팍한 수단이다. 분노 그 자체는 많은 것들을 전달하지도, 바꾸지도 못한다. 분노의 너머를 사유하는 방법, 내면을 들여다보는 법을 많은 이들이 훈련한다면 좋겠다.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희망 3부작. 맨 오른쪽이 완결편인 신작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창비
페미니스트 작가 리베카 솔닛의 희망 3부작. 맨 오른쪽이 완결편인 신작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창비

- 현대 여성들은 일-가정 사이에서 이중의 사회적 요구에 시달리며 오히려 해방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듯하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육아에 참여하고, 보육 서비스가 잘 갖춰진다면, 아이가 아프면 부담 없이 일을 하루 쉴 수 있다면, 이런 부담이 여성만의 몫이 아니게 된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아직은 요원한 미래다. 여성들이 부당한 체제에 적응하기보다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하려 노력해야 한다. 페미니즘이 저출산의 해결책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성이 진정한 평등을 쟁취하는 일은 분명 저출산 문제를 풀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 『걷기의 인문학』 서문에서 지난해 한국에서 열린 촛불시위를 언급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보나.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두려움을 몰아내고 맞서면 큰 변화를 이룩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 프랑스 혁명 등에서도 비폭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에선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때도 민중이 ‘다른 초강대국(other superpower)’이라 불릴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함께 연대해 두려움을 몰아내고 맞설 때 큰 변화가 일어난다. 조너선 셸이라는 정치학자는 ‘혁명의 발원지는 사람들의 가슴과 머리(hearts and minds)’라고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순간도, 한국에서 일어난 일도 모두 그런 예다. 촛불시위로 성공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는데, 미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행운을 빌어달라. 비법도 알려달라.

- 지난 미국 대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세상에, 이 선거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모두가 아직도 이 선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웃음) 

힐러리의 패배는 여러 요인이 작용해 나온 최악의(perfect storm) 결과였다. 먼저 백인이 아닌 많은 유색인종 유권자들이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일반 국민투표 결과 힐러리의 득표수가 트럼프보다 더 높았다. 한 기자는 ‘왜 힐러리가 졌는지 분석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실제론 지지 않았으니까’라고 하더라. 러시아의 선거 개입, 가짜뉴스 확산 등도 문제였다.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이 트럼프가 연루된 범죄와 부정부패 문제를 덮어 버렸다. 주류 언론도 일조했다. 의사가 암 발병률이 10~20%라고 하면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트럼프가 10~20%의 지지율 보일 때는 누구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힐러리가 당선된다고 갑자기 세상이 천국처럼 바뀌지는 않는다. 오바마 시대의 연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힐러리는 여성혐오자도, 백인우월주의자도 아니다. 힐러리는 여성의 성기를 움켜쥐지도(grab by the pussy) 않았다. 그런데도 경선에서 대패한 버니 샌더스가 힐러리보다 더 합당한 후보로 여겨졌다. 미국 좌파 진영에도 여성혐오가 가득하다. 그런 점에선 트럼프와 비슷한 면이 있다. 

- 페미니즘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과 혐오를 극복하기에 충분한 대안일까?

페미니즘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해방을 위한 운동의 하나다. 인종, 성적지향, 경제적 불평등 등 다양한 문제와 교차할 수 있는 운동이다. 페미니즘이 여성 문제에만 천착한다면 (대안이 되기에) 불충분할지도 모르나, 다른 문제들과 연대한다면 세상을 바꿀 큰 변화를 이룰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이자 역사가다. 1980년대부터 환경·반핵·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현장운동가이기도 하다. 특유의 재치 있는 글쓰기로 일부 남성들의 ‘맨스플레인’ 현상을 통렬하게 비판해 전세계적인 공감과 화제를 이끌었다. 국내 출간 저서로 『남자들은 나를 자꾸 가르치려 든다』『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어둠 속의 희망』 『멀고도 가까운』 『걷기의 인문학』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있다. 구겐하임 문학상, 전미도서비평가상, 래넌 문학상, 마크 린턴 역사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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