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자 최형미가 다양한 책들을 페미니즘 렌즈로 새롭게 읽습니다. 앞으로 ‘최형미의 다시 만난 세계’는 격주로 연재됩니다.

 

벨 훅스의 ‘사랑’에 관한 3연작

『올 어바웃 러브』 / 이영기 옮김/ 현실문화 

『구원; 블랙피플과 사랑』

『사랑은 사치일까?』/ 양지하 옮김/ 현실문화 

 

벨 훅스의 ‘사랑’에 관한 3연작
벨 훅스의 ‘사랑’에 관한 3연작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가 40대 후반에 쓴 책들을 보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사랑’에 관한 세 가지 연작물을 출간했다. 『올 어바웃 러브』(2000), 『구원; 블랙피플과 사랑(Salvation: Black people and love)』(2001), 『사랑은 사치일까?』(2002)다. 이 가운데 『구원』은 아직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았다.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페미니즘은 20세기에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가족의 폭력을 비판하고 대안적 가족을 제안했으며, 여성을 옥죄는 틀로 사용되었던 모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사회적 모성을 확산시켰다. 노동의 영역에서 감정노동, 돌봄노동이라는 새로운 개념들을 발굴해 여성들의 노동을 가시화했다. 발전이나 환경 문제까지도 페미니즘 관점이 개입될 때 시장가치보다 지속가능한 공존의 가치를 발굴할 수 있었다. 그러니 훅스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뭐 이상할 것은 없는 듯하다.

그런데 훅스의 이전 저술과 사랑의 연작물 사이에 큰 간극을 발견하게 된다. 훅스는 투사 중의 투사였다. 그는 열아홉 살에 『나는 여자가 아닙니까?(Aint’s I a woman?)』를 쓰기 시작했다. 흑인여성들의 거친 삶을 소개하며,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한 유약한 여성성은 흑인들에게 해당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백인 여성들이 권력의 중심에 오르기 위해 흑인 여성들을 여성운동에 동원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백인 페미니스트들을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에서 그는 마을 주변에 사는 흑인들은 백인들이 사는 마을에 함께 살 수 없었고 단지 가정부로만 백인들의 거주지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에게 주변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차별당하는 흑인들에 대한 분노에 찬 증언이었다.

이런 훅스가 ‘사랑’에 관한 책을 쓴 것은 다소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사상이 분노에서 사랑으로 바뀐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필자는 훅스의 변화가 단순히 사적인 경험의 변화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사상적 변화가 일어났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야 한다고 본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차이’를 주장한 이후 페미니즘에는 ‘차이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모든 여성은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해서 차이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아시아페미니즘, 이슬람페미니즘, 레즈비언페미니즘, 메스티자페미니즘, 아프리카페미니즘 등 차이들이 봇물 터지듯 등장했다. 여성들 간의 차이는 부인할 수 없었고, 페미니즘은 정의 내려지기 어려웠으며, 연대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서로 내가 얼마나 더 억압을 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다른지를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페미니즘의 분열과 몰락처럼 보였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것이 바로 페미니스트 법학자 킴벌리 크렌쇼(Kimberle Crenshaw)다. 그는 이주여성들의 가족폭력 사례를 조사하면서 이들의 반응이 백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가정폭력을 알리려 하지 않았고 집안의 수치로 여겼다. 크렌쇼는 이런 차이가 나타난 것을 막연하게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이주민 여성들이 성차별과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 ‘교차적 억압’에 놓여 있기 때문에 차이가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즉 여성들 간의 차이를 분석 가능한 정치적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다. 차이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 것이다. 이후, 크렌쇼의 ‘교차성’ 개념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설명하는 데 전면적으로 사용됐다.

서로 간의 차이가 나타나는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는 것은 여성주의 안에서 많은 변화를 의미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차이가 ‘연대’를 불가능하게 했다고 우려했었다. 그들은 공통의 억압에 근거한 정체성의 정치학(Identity Politics)에 익숙했고 다른 것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들에게 정치학이란 하나의 정체성아래 똘똘 뭉쳐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을 의미했다. 획일한 집단적 연대를 유지하기위해 배타성과 폭력성을 용인했다. 나치즘처럼 그 집단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공격하고 배격하였다.

교차성 개념은 새로운 정치학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것은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해는 존중을 가져왔다. 연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새로운 이해의 장을 열었다.

훅스는 2000년이 되면서 사랑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얼핏 보면 이제껏 페미니즘이 다루지 못했던 ‘사랑 문화’를 다시금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비판과 분노로 평등을 지향했던 페미니즘에서 서로간의 이해에 기반을 둔 연대와 공감의 장을 확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차이와 교차성의 용광로를 지나 새로운 정치학을 마련하는 움직임인 것이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교차성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교차성이 한국에 들어와 오역되고 있다는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다양한 억압들을 섞어서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성차별 이슈가 희석돼 버리고 힘이 약해지지 않는가라는 우려가 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여성혐오 범죄가 등장하는 우리 사회에 대항적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염려하는 듯하다. 교차성은 복합렌즈다.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럴 때 일수록 더 많은 여성들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은가? 연대는 획일화가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서 온다. 페미니즘은 여성들 간의 충돌을 허용해왔고 그럴 때 마다 창의적이고 너그러운 사상을 발전시켰다. 문제점을 발견했다면 훅스가 그러했듯 우리도 출구를 찾아낼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