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페미니스트 비평가 손희정

식민지 여성피해 묘사에 성폭력 장면 꼭 나와야 하나

남성중심 서사 못 벗어나는 “게으른 상상력”

이제 다양한 차이 아우르며 연대하는 페미니즘으로 가자

 

영화 ‘귀향’ 스틸컷 ⓒ와우픽처스
영화 ‘귀향’ 스틸컷 ⓒ와우픽처스

“평생 영화에 몰두해온 영화애자(cinephile)이자 영화학도”인 손희정 연구원은 책에서 한국 영화가 일본군‘위안부’ 서사를 재현하는 방식을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비평한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귀향’은 일본군의 손에 발가벗겨져 강간당하고 두들겨 맞고 죽어가는 소녀들을 보여주는 데 긴 시간을 할애했다. “이런 선정적인 재현은 피해자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자, 기존 남성 중심적 서사를 답습할 뿐인 “게으른 상상력”을 보여준다고 손 연구원은 비판했다. 

“우리는 왜 ‘고통의 비명’만이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일까? 남성의 시선으로 제작돼 남성으로 젠더화된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작품이 접속하고 만들어내는 그 부대낌, 그 정동이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 이 이데올로기란 호모 내셔널리티(남성 중심 만족)라는 공통감각에 불과할 터이다.” 

그는 “남성 중심 서사를 갖춘 ‘아빠뽕’ 영화가 10여 년째 계속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괴물’, ‘명량’, ‘부산행’, ‘군함도’ 모두 ‘아빠만이 가족을 지킨다’는 영화로 볼 수 있어요. 민족의 중심은 아버지·남성이 차지하고, 여성은 언제나 ‘지키지 못한 우리의 소녀’죠. 식민지 시절 조선 여성의 고통을 묘사할 땐 강간 장면이 빠지지 않고요. 여성의 순결, ‘성’에 너무나도 중요한 민족적 가치를 부여해요.”

 

영화 ‘군함도’ 스틸컷 ⓒ영화 '군함도' 스틸컷
영화 ‘군함도’ 스틸컷 ⓒ영화 '군함도' 스틸컷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는 믿음이 솔직히 시간이 갈수록 흔들린다”고 그는 고백했다. 페미니스트들의 분투에도 반복되는 처참한 여성 대상 폭력과 혐오 앞에서, 가끔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2017년에도 여성들은 “위안부 소녀상은 강간당한 사실을 대자보로 붙여 놓는 꼴”이라는 남성 정치인의 망언을, 자신의 기분을 언짢게 한 여성 유튜버를 살해하겠다며 찾아가는 내용의 방송을 했다가 범칙금 5만원을 내고 풀려나 “또 다른 저격할 년 찾는다”는 남성 유튜버를 목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침묵을 깨고 터져 나온 여성들의 주체적인 말하기와 투쟁은 계속되고 확장될 것”이라고 손 연구원은 내다봤다. 이는 “쉽게 배제할 수 없는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이자 성과”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다양한 ‘페미니즘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여성폭력에 맞서 등장한 20~30대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청년의 목소리가 누락됐던 헬조선 담론에 여성 젠더를 기입하는 운동”에서 나아가, 다양한 가치와 차이를 아우르고 연대하는, ‘횡단하는 페미니즘’을 목표 삼아 공론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손 연구원도 이에 주목했다. “2015년 ‘리부트’를 진단하면서,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인터넷을 통해 서로 경험을 공유하면서 페미니즘 의제를 확장하길 바랐어요. 여성을 물리적 폭력의 ‘피해자’로 특정하고 두려움을 표출하는 데 멈추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 변화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으로 확장되길 꿈꿨죠. 다만 여성 대상 폭력이 점점 더 끔찍한 형태로 반복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 탓에 논의가 더 나아가질 못하고 있지만요.” 

그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를 두고 견해 차이가 두드러지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주목한다”고 했다. “‘우리는 보지만 생각한다’는 식으로 활동 반경을 스스로 제한해서 플러스의 운동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운동을 한다면, 운동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닌 차이들 가운데에서도 만나는 지점이 있죠. 그런 지점을 축으로 유연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페미니즘이 가능해야 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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