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농담이었을 뿐이란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누구와 성관계 하고 싶은지 골라 보라’며 떠들어대는 것도 한갓 농담일 뿐이고, ‘가슴만 만져도 리스펙트’라고 낄낄거리는 것도, ‘뽀뽀해 달라’, ‘안아 달라’고 함부로 지껄여대는 말도 다 농담일 뿐이리라. 하긴 미국 대통령이 언론에 대고 내뱉은 말도 백악관이 나서서 ‘농담이었을 뿐’이라고 애써 뒷수습 해 대는 판국이니, 이런 지경의 세상에서 무엇인들 농담 아닌 것이 있을까.

당사자 없는 자리에서의 농담이었을 뿐이라는 흔해 빠진 항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농담이었다고 강조하는 것은 해당 언동 속에 성희롱의 의도가 없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와 대법원 모두 특정 언동의 성희롱 여부를 논함에 있어서 성적 동기나 의도는 따질 필요가 없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견지한다. 달리 말하면, 가해 당사자에게 ‘성희롱할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여부는 성희롱의 성립요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농담이었을 뿐이라고? 그래, 좋다. 정말로 장난삼아 농담으로 내뱉은 말이었어도 상관없다. 의도가 없었더라도 성희롱은 성립하니까. 그러니, 이쯤 되면 상황은 슬슬 ‘장난 아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아직은 가해자로서도 살아날 길이 하나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사자 없는 자리에서 친한 사람들끼리만 은밀하게 나눈 대화일 뿐 아닌가. 면전에서 대놓고 한 발언도 아닌데 이런 ‘사적 대화’가 어찌 성희롱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어쩌면 좋나.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2006년경에 당사자 없는 자리에서 당사자인 여성 동료직원을 성적 대상화하여 발언한 언행이 우리 법의 규제 대상이 되는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분명하게 밝혀두었다(국가인권위원회 06진차465 결정).

조금 더 살펴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직장 내에서 한 여성에 대하여 다른 직원들이 성적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 그 발언당사자의 시각에서 이미 그 여성은 동등한 인격체의 직장동료로 간주되었다고 보기 힘들며, 이는 직·간접적으로 당해 여성의 근무환경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직장이라는 좁은 환경의 특성상 다른 직원들을 통하여 전달될 개연성도 매우 높다’는 이유를 들어 성희롱이 성립한다고 인정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결정이 ‘일반적으로 직장동료나 상하 관계에 있는 사람들 간의 대화는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더라도 근무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까지도 명시적으로 승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피해 당사자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하여 당사자 없는 자리에서의 성적 언동을 성희롱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더라도’ 그러한 언동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임을 국가인권위원회는 언명한 것이다. 직장뿐이랴? 대학 등의 다양한 공동체에 있어서도 동일한 논리는 당연히 성립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결정이 내려진 것도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아직도 반복해서 강조해야 하는 이 현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성희롱·성폭력을 예방하자는 것이 도덕적인 성인군자(聖人君子)들만의 고답적인 세상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결코 농담일 수 없는 성희롱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 농담 한 마디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기괴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성인(成人)들끼리 성을 주제로 하는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어찌 사회상규에 어긋날 수 있겠는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지독하게도 엄숙주의적인 수도원장이 아닌 담에야 해학과 웃음이 인간의 삶에서 갖는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특정인들에 관해 거론하며 ‘누구와 성관계 하고 싶냐’며 ‘평가질’ 해대는 것이 용인 가능한 농담일 리는 없다.

무엇이 농담인지, 또 무엇이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이런 기준을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당사자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아무 거리낄 것 없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말이라면 이는 농담이다. 하지만 당사자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이야기하기에 어딘가 찜찜한 무언가가 계속 남는다면 그 말이 성희롱인지 아닌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심지어 지금 – 자유와 권리, 다양성과 인간 존엄을 굳건히 신봉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아주 당혹스럽게도 –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계시는 ‘그 분’조차도 ‘유명인이 되면 여성의 성기를 움켜쥐고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참담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발언을 여성의 면전에서 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성희롱에 해당하는 성적 언동은 그 본질상 당사자 면전보다는 면전 아닌 장소에서 더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나 더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특정한 말의 표현과 뉘앙스 그대로 ‘나의 배우자 또는 자녀’에게 제3자가 이를 똑같이 발언한다고 가정했을 때, ‘허허, 거 재밌는 친굴세’ 라면서 편히 웃고 넘길 수 있다면 이는 농담이다. 하지만 얼굴이 조금이라도 붉게 달아오르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면 그 말이 성희롱인지 아닌지를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해야 할 말’이 있는가 하면, ‘해도 괜찮은 말’이 있는 반면에, ‘해서는 아니 될 말’이라는 것이 세상에는 분명히 있다. 무엇이 농담인지, 무엇이 농담의 한계선을 넘어선 성희롱인지를 판단하는 데에 복잡한 수학이나 고차원적인 성찰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합리적인 상식인이라면 누구나 농담과 성희롱을 분별해 낼 수 있다. 농담이었을 뿐이라고? 그렇다고 해 두자. 모든 것이 ‘농담’일 뿐인 무례하고 천박하며 무책임한 세상에서라면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기를 바란다. 정말이다. 이 글은 농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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