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정하담

연기경력 전무하던 신인에서

‘들꽃’ ‘재꽃’ ‘스틸플라워’

3부작으로 독립영화계 스타로

“오래 연기하고 싶은 게 꿈”

 

배우 정하담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배우 정하담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름 극장가는 소리 없는 전쟁터다. 이곳에서 소박하지만 강렬하게 관객에게 스며든 작품이 있다. 한 폭의 수채화가 떠오르는 영화 ‘재꽃’이다. 재꽃은 주류 상업영화와 다르다. 대사의 절제, 사운드의 단순함,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이 마치 한여름밤 꿈속에 잠긴 듯한 느낌을 준다. 단 6명의 배우가 등장하지만 오히려 꽉 찬 느낌이다.

이 중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이는 ‘하담’을 연기한 배우 정하담이다. 그는 눈빛 하나, 대사 하나로도 강한 울림을 주는 힘을 가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순간의 이기심과 찰나의 선택으로 서로 오해하고 일을 망쳐버린다. 하담은 그런 어른들의 싸움을 바라보는 순수함을 간직한 소녀다. 봉준호 감독은 정하담이 연기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파괴력이 엄청나다. 올해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인생에 있어서 한 시기가 지난 것 같아요. 지금 1막이 잘 끝났고, 이제 제2막이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그리운 것은 아니지만 생각하면 아련하고, 또 소중하고 감사하죠.”

정하담은 ‘꽃 3부작’을 마친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아직 신인이지만 정하담이라는 이름은 독립영화 팬들 사이에서 꽤 익숙하다. 차세대 ‘시네아스트’(영화인)로 불리며 주목받고 있는 박석영 감독(이하 박 감독)과 ‘꽃 3부작’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나의 그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그림을 통과해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하며 그와 세 작품이나 같이 한 이유를 설명했다.

꽃 3부작이 진행되는 동안 ‘하담’은 계속해서 성장했다. ‘하담’은 ‘들꽃’에선 차디찬 길가에 버려지듯 내몰린 가출 청소년이었다. ‘스틸플라워’에선 제 한 몸 누일 곳 내주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향해 “일하고 싶어요”라고 처절하게 외치며 분투했다. 생존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고전하던 ‘하담’은 ‘재꽃’에선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해별을 품을 수 있는 존재로 자랐다. 극 중 ‘하담’이 자란 만큼 배우 정하담도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고등학교 연극부 활동뿐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신인에서 독립영화계의 스타가 됐다.

 

배우 정하담은 “이제까지 보지 못 했던 여성 캐릭터들을 보고 싶다”며 “인간의 다양한 본성을 담은 여성 캐릭터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배우 정하담은 “이제까지 보지 못 했던 여성 캐릭터들을 보고 싶다”며 “인간의 다양한 본성을 담은 여성 캐릭터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그런 그에게 ‘재꽃’은 좀 더 힘든 작업이었다. “‘재꽃’ 촬영 때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었어요. ‘스틸프라워’에서는 늘 혼자였잖아요. 그런데 ‘재꽃’에서는 하담이가 해별이랑 교류하는 장면이 많았어요. 누군가와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관계에 놓인 것은 해별이가 처음이어서 내가 잘 표현하고 있는지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그래도 무엇보다 하담이에게도 상냥하고 다정한 면이 있다는 게 관객들에게도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대화를 하는 내내 캐릭터 ‘하담’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물씬 느껴졌다. “‘하담’이라는 캐릭터는 가지지 못 했을 뿐이지 마음씨가 예쁜 사람이에요. 저보다도 훨씬 선량하고 품이 넓고 따뜻하죠. 감독님도 그런 느낌을 받으셨고, 그 부분을 더 보고 싶어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스틸플라워’와 ‘재꽃’도 계속된 것 아닐까요.”

연기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연기에 대한 생각은 견고해 보였다. “연기는 때로 본능적이기도 하지만 이성적인 것에 가까운 것 같아요.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잖아요. 구체적으로 상상을 하고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죠.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연기를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정하담은 ‘들꽃’을 준비하며 극 중 옷을 입고 한 달 동안이나 밤거리를 걸었다. ‘재꽃’ 촬영 전에는 충남 당진에 미리 내려가 극 중 하담의 집에서 한 달간 거주했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소녀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두운 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온전히 견뎌야 했다. 녹록치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영화 촬영은 정말 미지의 세계였어요. 하지만 하담이라는 역할을 맡았다는 게 제겐 정말 큰일이었고 꼭 해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아요. 밤에 캐리어를 끌고 걸어 다닐 때는 등골이 오싹하기도 했어요. 나로 인해 영화에 피해가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단순히 대사를 외우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연기에 접근하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아마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이 안 가는 캐릭터는 좀 (연기하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재꽃’의 ‘하담’이를 이야기할 때는 눈물이 날 것 같거든요. ‘하담’이처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아니 사랑하기 좋은 흥미진진한 캐릭터를 또 만나보고 싶어요.”

 

배우 정하담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배우 정하담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그는 “작품을 볼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캐릭터’”라며 한국 영화 속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도 나타냈다. “이제까지 보지 못 했던 여성 캐릭터들을 보고 싶어요. 자유로울 수도 있고, 폐쇄적일 수도 있겠죠. 인간의 다양한 본성을 담은 여성 캐릭터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연기하면서도 재밌을 것 같고, 보기에도 재밌지 않겠어요?”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는 김혜자를 꼽았다. 김혜자가 연기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순간적으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김혜자 선배님이 연기를 하시는 거 보면 마음이 철렁철렁해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요. 언젠가는 꼭 같은 작품에서 만나 뵈면 좋겠어요. 꼭 닮고 싶은 선배님이세요. 제 연기를 본 사람들도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연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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