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DEAD GAKKAHS에 새롭게 합류한 후 컴백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 ‘Don’t Need You – The Herstory of Riot Girl’가 떠올랐다. 여성 펑크인들이 펑크 씬의 가부장성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밴드 위주의 공연을 기획하고, 남성에게는 입장료를 두 배로 받는 내용이었다. 무릎을 탁 쳤다. 이거다. 멤버들도 재밌겠다며 그렇게 만들어 보자고 했다.

어느 날 친구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여성만 참석할 수 있는 록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인연이 있나. 밴드 멤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참가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너무 좋았다. 나 혼자서 꿈꾸던 공연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자서 기획단을 모으고 제안할 힘이 없어서 나중에 힘이 생기면 해야지, 하고 미뤘던 꿈이었다.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면서 여성들이 숨을 쉬고 맘껏 놀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각색의 생존자들이 모여서 함께 소리 지르고, 말하고, 노래하고, 웃고 뛰고 싶었다. 사건 공론화 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는 그간 서로가 겪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지와 응원을 나누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떠들었다. 누구는 여성이 무서운 괴물로 나타나는 영화를 보고 있다고 했다. 누구는 가해자들을 모아 놓고 피해사실들을 말하고 싶다 했다. 나는 피해자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만난 여성들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밀려나고, 폭력을 당하고,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아닌, ‘여성’의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밴드 씬을 비롯하여 수많은 씬들에서는, 특히 단순노동이 아니라 전문화된 고위직일수록 여성들을 찾기가 힘들어질까? 가부장제가 여성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짓밟힌 여성들이 씬에 남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번은 남성인 A가 술에 잔뜩 취해서 여성인 B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고, B는 뒤로 물러났다. C는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고 “술 취해서 장난치는 거잖아”라고 말했다. 한 번은 “너 게이냐”라는 말이 특정 그룹에서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웃으면서 내게 “이런 거에 (동조하지 않는) 꽉 막힌 사람 아니죠?”라고 말했다. 자신들은 게이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농담을 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또 다른 A가 “B는 존나 섹시해. B랑 자고 싶어”라고 말했다. B는 여성 관객이자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어떤 A는 내 옛 애인에게 “네 여자친구 죽이고 놀러 가자!”라고 외쳤고, 모두가 웃었다. 남성인 A가 공연 도중 팬티를 벗고 자신의 성기를 보였을 때 모두가 웃었다. 여성인 B가 공연 중 팬티를 보였더니 사람들은 뒤에서 “일부러 팬티 보여주는 공연”이었다고 평가하며 비하했다. 

이 A들은 모두 각각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여준 폭력은 아주 가까운 집단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대학교 단톡방 사건을 비롯해 술집이나 대중교통, 미디어에서도 남성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이것은 A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폭력을 선택할 수 있었던 남성 중심적 문화, 즉 가부장제의 문제다. 남성은 인간이고, 여성은 인간이 아닌 보지로 보며, 저런 장난과 농담과 평가가 비남성에게만 향하도록 하는 가부장제의 문제다. 

나는 온전히 인간으로서, 드러머로서 공연하고 싶었다. 내가 몰래 찍힐까, 누가 내 신체를 감상할까, 내가 가진 지향과 내가 가진 특성으로 인해 눈치 봐야 하는 공연 말고, 걱정 없이 마음껏 나대고 설칠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주변에 그런 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당장 사회를 그렇게 만들지 못한다면, 공연이라도 그렇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온 차별을 견디며 굳건히 음악인의 자리를 지킨 여성 뮤지션, 예술계 내 성폭력을 고발한 용감한 여성들, 음악으로 교감해 온 수많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지고, 서로를 응원하고 싶다. 그래서 만들었다. 그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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