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교육이 학교를 구원한다
페미니즘 교육이 학교를 구원한다
  • 이세아 기자
  • 승인 2017.08.15 22:43
  • 수정 2017-08-25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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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학기 대구 한 초등학교 5학년 한 반의 성교육 수업 시간, 학생들이 성 관련 낱말카드를 이용한 게임을 하고 있다. ⓒA교사 제공
지난해 2학기 대구 한 초등학교 5학년 한 반의 성교육 수업 시간, 학생들이 성 관련 낱말카드를 이용한 게임을 하고 있다. ⓒA교사 제공

‘레즈비언, 생리, 질, 난자, 자궁, 포경수술, 게이, 트랜스젠더, 동의...’ 지난해 2학기 대구 한 초등학교 5학년 한 반의 성교육 수업 시간. 다양한 성 관련 낱말카드가 책상 위에 쌓였다. 학생들은 순서대로 카드를 한 장씩 꺼내 개념을 설명하는 놀이를 했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개념이 많았지만, 학생들은 즐거워했고 ‘더 하자’며 A 담임교사를 졸라 2시간짜리 수업을 4시간으로 늘렸다. 모두가 함께 한 단어씩 거들어 설명을 만들었다. 많은 학생이 ‘사정’ ‘발기’를 이해하지 못해 A교사가 직접 설명해야 했지만, ‘대안생리대’의 경우 한 여학생이 직접 모둠을 오가며 수십 번 설명했다. 

“학생들은 호기심을 마구 표출하고 질문도 해요. 섹슈얼리티에 대해 얘기하거나 물어볼 기회가 없으니까요. 왜곡된 성 인식만 빠르게 퍼졌죠.” 초등학생들도 일상적으로 언어 성폭력을 주고받는다. 강당 수업 때면 몇몇 학생이 커튼을 부여잡고 성관계 장면을 연출하는 놀이를 했다. A교사가 “교과서에 안 나오는 진짜 삶에서의 성교육”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15년차 교사인 그는 청소년인권 활동가다. “성별을 필터로 학생을 구분하지 않을 것,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사가 되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소수자성을 커밍아웃할 수 있는 학급이 되도록 계기를 마련할 것, 교육자료를 고를 때 젠더와 신체의 다양성을 확인할 것. 성폭력 사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열심히 지원할 것.” A교사의 성평등 교육 원칙이다. 

A교사네 반은 지난해부터 한 달에 한 번 꼴로 다양한 ‘성평등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 3월엔 ‘나의 섹슈얼리티 탐색하기’ 수업을 했다. 사람의 몸을 그리고, 각자가 생각하는 신체 부위의 젠더를 색으로 표현해봤다. ‘머리카락은 여성의 부분’, ‘오른발은 공을 차니까 남성의 부분’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오른발이 축구 때문에 남자면 헤딩하는 머리도 남자냐?”, “아니지. 축구는 다(모든 부위를 활용해서) 하잖아”, “나는 축구 안 하는데?” 

“성 역할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알게 하는 수업이죠. 어떤 학생도 몸의 절반 이상을 한 성별로만 표현하지 않죠. 성별 정체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과대 대표되고 있다는 걸 학생들이 발견하길 바라죠.” 이런 논의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학생들도 있지만, “거부감을 잘 들여다보고 그것이 개인의 성적 지향인지, 차별이나 근거 없는 혐오인지 스스로 구분해내는 과정을 지원하는 것도 교사의 역할”이라고 그는 말했다. 

성평등 수업은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성교육 수업 이후 A교사네 반 학생들은 귓속말 없이도 ‘생리’를 이야기하게 됐다. 생리통을 앓는 여학생의 고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한 남학생은 쉬는 시간에 A교사를 찾아와 발기된 페니스에 관해 질문했다. “자신의 성적 호기심을 긍정하는 반가운 태도였어요. 올해는 성교육 수업을 더 확장해 진행하고 싶어요. 내 몸과 경험의 변화만이 아니라 성감대, 쾌감 등의 말도 포함해서요.” 

 

대구 한 초등학교 5학년 한 반의 성평등 수업 시간, 학생들이 ‘우리 학교 위계 찾기’ 게임을 하고 있다. ⓒA교사 제공
대구 한 초등학교 5학년 한 반의 성평등 수업 시간, 학생들이 ‘우리 학교 위계 찾기’ 게임을 하고 있다. ⓒA교사 제공

경기도 한 초등학교의 ‘별아’ 교사도 지난 1학기에 저학년 학생들과 성평등 독서 수업을 했다. 가사노동의 중요성과 분담을 다룬 ‘돼지책’, 공주가 용을 무찌르는 ‘종이봉지 공주’ 등 젠더 고정관념을 깬 동화를 함께 읽었다. 남녀가 함께 팔씨름 힘겨루기, 꼼꼼하게 수 세기, 고정관념을 벗어난 직업 맞춰보기, 서로 다른 옷 입혀보기 등 다양한 놀이도 했다. 학생들은 성평등한 환경에 금세 적응했다. “남학생들은 여학생과 팔씨름을 해서 져도 크게 상처받지 않았어요. 남학생도 꼼꼼하며 청소를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이 기뻐했고요.”

별아 교사는 초등성평등연구회 소속이다. 지난해 6월 결성된 연구 모임으로, 10여 명의 교사들이 매달 모여 다양한 교과에 성인지적 관점을 접목한 교재를 개발한다. 남성 독립운동가 위주로 서술된 교과서의 한계를 넘어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책이나 자료를 함께 읽는 식이다. 젠더 관점에서 미디어를 모니터링하는 수업도 있다. ‘드라마 속 남녀 출연자들의 손목잡기 동영상을 보고 생각과 느낌 나누기’, ‘뽀로로 속 캐릭터 분석하기’ 등이다. 고학년 학생들은 경제 단원을 배우며 직접 ‘고용 게임’을 제작해 여성이 취업시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경험하고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국어 수업에선 학생들이 직접 온라인에서 많이 쓰는 여성혐오 표현의 의미를 배우고, 유튜브 영상의 욕설 댓글을 신고해 보기도 했다. 

별아 교사가 체감하는 초등학생 전반의 젠더 감수성은 바닥 수준이다. 저학년 학생들에게 ‘여자는 날씬해야 할까요?’라고 물으면 학생들은 당연하다는 듯 ‘네’ 라고 했다. 여학생의 대답 소리가 더 컸다. 6학년 남학생들 사이엔 스타벅스는 ‘돈 쓰는 여자들이 가는 비싸고 유별난 곳’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가장 심각한 건 ‘앙 기모띠’ ‘기집애가 까부니까 처맞는다’ ‘창X’ 등 여성비하 표현이 아무 제재 없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최근 온라인에선 여성 BJ를 공격하고 신상을 유포하고 살해 협박까지 하는 방송이 오락거리로 소비됐다. 다수의 남자 초등학생 BJ들이 유사한 방송을 하거나 이에 동조했다. 이런 가운데 성평등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서울시교육청 지원으로 교내 페미니즘 공부 모임을 만든 서울 위례별초등학교 교사들은 남성들의 항의와 협박에 부딪혀 활동을 접고 흩어질 위기에 처했다. 

별아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런 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심어주는 게 올바른 사회를 위한 시작”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인터넷 문화가 단지 ‘재미있어서’ 받아들이고, 그게 옳은 일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많은 남학생들이 여성의 입장에 공감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거나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죠. 그래도 성평등 수업을 해 보니 남학생들도 본인이 쓰는 표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면 달라지더라고요. 장난으로나마 서로 대화하다가도 ‘얘가 지금 여성비하 표현을 썼어요!’라고 지적하기도 하고요.” 

 

대구 한 초등학교 5학년 한 반 학생이 도덕
 시간에 ‘샘나다’라는 말을 설명하며 그린 그림. ⓒA교사 제공
대구 한 초등학교 5학년 한 반 학생이 도덕 시간에 ‘샘나다’라는 말을 설명하며 그린 그림. ⓒA교사 제공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대통령이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천명했고, 교육청도 이미 성평등 교육 강화를 이야기한 이상 페미니즘 교육은 정당한 명분을 갖춘 교육입니다. 적극적인 교육 지원과 교권 보호가 함께 시행돼야 위례별초 같은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A교사는 “결국 젠더 차별, 젠더 폭력이 빈발하는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학교 현장에 필요한 건 성평등보다는 ‘반차별’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교육에 늘 착하고 좋은 말만 가져다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어떤 ‘선’, ‘사회적 합의’라는 불분명한 개념이 등장하면 다 허물어지죠. 성평등 교육도 더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해요. ‘성별을 기준으로 줄 세우지 않겠다’, ‘학생을 남학생, 여학생으로 호명하지 않아야 한다’처럼요. 학생들이 나중이 아닌 지금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일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야만적이지 않은 감수성, 일방적 전달이 아닌 대화와 토의에 익숙한 세대의 출현이 곧 사회변화일 수 있겠죠.”

교사들 간 연대도 강조했다. A교사는 최근 위례별초 페미니스트 교사를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페미니즘으로 학교를 구원하기’ 모임을 만들었다. 앞으로 교생 실습과 실제 수업에서 실천할 수 있는 성평등 캠페인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젠더 이슈는 모든 교사의 고민이자 과제라고 확신해요, 성폭력 사안이 너무 많고, 학교는 ‘남자는~’ ‘여자는~’이라는 말의 천국이거든요. 교사도 여러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되죠. 그런 일들이 곧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공론화될 거라고 봐요.” 

별아 교사도 동의했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몹시 고단하고 힘든 가시밭길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페미니즘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어요. (...) 내가 하는 페미니즘 수업이 아이들의 인생의 잘못된 가치관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보람된 일이 될 겁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학급의 절반의 학생에게 억압된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고, 또 그 나머지 절반에게 잘못되게 휘두르는 힘을 멈출 수 있는 자유를 줄 수 있는 일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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