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논단] ‘여성의 일’에 대한 단상(斷想)
[여성논단] ‘여성의 일’에 대한 단상(斷想)
  •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 승인 2017.08.15 15:26
  • 수정 2017-08-22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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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이 선택하는 길의 하나가

비혼, 결국 저출산 사회 낳았다

 

그녀는 넉넉지 않은 가정의 큰 딸로 태어나 상업학교에 가라는 가족과 교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열심히 공부해 둔 영어 실력 덕분에 교환학생을 마치고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CEO의 비서직이란 위치는 지극히 단순한 업무 수행에 제한됐다. 주경야독으로 업계에서 알아주는 자격증을 따고 이직해 전문직으로 일하게 된 그녀는 모두들 부러워하는 ‘뉴욕 출장’을 다녀오고 큰 프로젝트 수주까지 따는 등 회사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꿈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던 순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는 그녀의 회사에도 몰아닥쳤고 “어떡하냐? 가장인 남자들 대신 네가 나가줘야지”라는 부장의 회유반 압박반 메시지 앞에서 사직했다. 배신감, 분노, 좌절감은 회사 생활에서만 얻은 게 아니었다. 가난한 가정의 장녀로서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고 병치레까지 돌봐야 했다. 삶에 지친 그녀는 결혼을 했고 화려한 경력 덕분에 재취업에 성공했지만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쓰느라 자리를 비워야 하는 그녀를 회사는 곱게 보지 않았다. 육아휴직 후 복직한 그녀를 회사는 폭언과 무시, 왕따, 굴욕의 레퍼토리를 섞어가며 괴롭혔고 결국 회사 밖으로 몰아냈다.

최근 필자가 인터뷰한 씩씩하고 매력적인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지식과 기술, 일에 대한 열망과 인간관계 역량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일도 잘하고 성품도 반듯한, 말 그대로 ‘엄친딸’ ‘워너비’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번은 ‘가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 한번은 ‘아이를 키운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짤렸다’. 그녀가 동생들의 학비와 용돈을 대고 아이만큼이나 일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던 그녀는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이란 결국 족쇄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처럼 강한 성취욕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혼도 출산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모파상의 『테스』였는데, 여성의 삶이 갖는 구속성 때문이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삶 역시 구속적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19세기 여성이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로 인해 남성에게 구속받았다면, 21세기 여성은 출산과 양육으로 구조적으로 구속된다. 실비아 월비가 말한 ‘사적 가부장제’에서 ‘공적 가부장제’로의 이행이다. 이 공적 가부장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이 선택하는 길의 하나가 비혼(非婚)의 삶이고 결국 저출산의 사회를 낳았다.

성취에 대한 욕망을 갖지 말라고 이야기하지 마시길. 성취욕이든 돌봄이든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자 책임이며 가능성이다. 만약 ‘그녀’가 ‘그 남자’였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40대를 앞둔 ‘그 남자’는 부장이나 차장쯤 되는 직함을 달고 상사와 부하 직원들 사이에서 눈치 보며 일찍 들어오라는 아내의 잔소리에 또 눈치 봐야 하는 삶의 피로감을 토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남자’는 ‘남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일터에서 쫓겨나는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한 문재인정부에서 여성들이 실현해 가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큰 그림을 그리고 과제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은 정부 관료의 몫이지만, 일자리 몇 개를 더 만든다는 의욕으로 여성들이 처한 구조적 조건에 대한 고민을 뒷전으로 밀어두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전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는 것도 말해야겠다. 구체적인 조건과 상황 속에서 일터 속 여성의 위치를 점검하고 회사와 여성 모두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을 찾아가는 것은 지극히 섬세하고 현실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찾기도 쉽지 않거니와 수행도 만만치 않다. 더 많은 담론, 더 많은 고민이 사회라는 광장에 터져 나올 때,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때, ‘여성의 일’은 더 이상 ‘여성의 일’이 되지 않아도 되는 전환점을 찾을 수 있다. 문재인정부가 그 전환점을 찾기를 바란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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