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밤거리를 지날 때는 두렵다고 했었죠. 아무리 남성이라도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엔 예외가 없다는 말도 했었죠. 그러나 당신의 두려움과 나의 두려움은 달라요. 당신의 두려움은 단지 두려움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지만 나의 두려움은 언젠가 반드시 현실이 되고 말 것이라는 암시를 끊임없이 받아요. 날마다 뉴스로 보도되는 강간과 살인 범죄의 피해자가 대부분 여성인 것을 보며 내 차례는 과연 언제쯤일까 한 번씩 생각해 보게 되죠.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짐작이라도 할 수 있나요?

강간과 살인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남성들에 대한 뉴스를 매일 접하게 된다면 당신은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오직 남성들만 노려서 강간하거나 살해하는 어떤 괴물 같은 종족이 있어서 남성 혼자서는 밤거리도 못 다니고 두려움과 경계심을 매순간 습관처럼 되새겨야 하며 밤에 잠들 때마다 오늘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어야 한다면, 그런 삶을 일평생 살아야 한다면 당신은 어떨 것 같은가요? 그럼에도 내가 당신에게 그저 “조심하라”고만 말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도 않고서 무조건 “조심하라”고만 되풀이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으려면? 차를 조심해야겠죠.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청결을 유지하고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할 거예요. 집에 도둑이 들지 않게 하려면? 평소에 문단속을 철저히 해야 할 거고요. 물론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불운이 겹치다 보면 사건 사고를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생겨요. 그래도 교통사고든 감기든 도둑이든 무엇을 어떻게 조심하면 되는지 우리는 어릴 적부터 배우며 자라죠. 일종의 매뉴얼이 있는 셈이에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의 지시에 따라 길을 건너면 차에 치여 죽을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죠. 감기도 도둑도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대폭 낮출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궁금해요. 대체 어떻게 하면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죠? 대체 어떻게 하면 남성에게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죠? 대체 어떻게 하면 남성이 찍는 ‘몰카’에 찍히지 않을 수 있죠? 대체 어떻게 하면 남성의 성희롱과 성추행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죠? 대체 어떻게 하면 아무 걱정 없이 밤거리를 거닐 수 있죠? 대체 어떻게 하면 두려움과 경계심을 일상적으로 품고 살지 않아도 될까요? 무얼 어떻게 조심하면 그럴 수 있나요? 좀 알려 주세요. 너무나 궁금해요. 당신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조심하라”는 말에 당신의 선의가 섞여 있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아요.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당신이 이야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요? 당신은 강간과 살인을 조심하는 것이 오로지 내 책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강간을 당하지 않는 방법? 짧은 옷을 입지 않는다? 밤늦게 다니지 않는다? 집에만 붙어 있는다? 그러나 강간 범죄 통계를 보면 옷차림과 시간에 관계없이, 심지어 집안에서도 강간 범죄는 일어나요. 살해를 당하지 않는 방법? 술을 마시지 않는다? 집에 일찍 들어간다? 그러나 맨정신에 집에만 있어도 여성은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아들에게 살해당하죠. ‘몰카’에 찍히지 않는 방법? 몰래 찍으니 ‘몰카’일 텐데 그걸 조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애초에 ‘몰카’라 불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교통사고처럼, 감기처럼, 도둑처럼 뭔가 매뉴얼이 있어서 그것만 달달 외워 실천함으로써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대폭 낮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강간이든 살인이든 ‘몰카’든 말 그대로 ‘조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범죄를 조심하는 방법은 없어요. 있다면 좀 말해 주세요.

여성들은 모두 알고 있어요. 자신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성폭행과 살인과 ‘몰카’를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만일 조심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것들이 여성들의 일상적 두려움이 되지도 않았겠죠. 조심하면 피할 수 있는 것을 왜 두려워해야 하나요? 당신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나요?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도둑이 집에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장담하건대 그런 생각들을 거의 하지 않아도 당신이 살아가는 데엔 크게 지장이 없을 거예요. 그러나 여성들에게 강간과 살인과 ‘몰카’는 날마다 되새겨야 하는 끔찍한 현실이에요. 일단 당신부터가 습관적으로 이야기하잖아요. “조심하라”고. 강간당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살해당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몰카’ 찍힐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당신은 말 한마디 툭 내뱉고서 자기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의 악몽은 시작돼요. 아, 내 몫의 두려움이 여전히 살아 있구나.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책임이구나. 내가 강간당하든 살해당하든 ‘몰카’에 찍히든 그건 충분히 ‘조심’하지 못한 나의 탓이구나.

그러니 “조심하라”고 말할 거면 대체 내가 뭘 어떻게 조심하면 되는지도 좀 함께 알려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조심할 거 아니겠어요? 차라리 호신용 스프레이나 가스총 같은 물건이라도 손에 쥐여 주면서 말하기라도 하면 좀 나을 텐데, 당신은 돈 한 푼 들지 않는 무성의한 말 한 마디로 자신을 여성의 현실에 관심이 많은 선량한 인간으로 포장하고 있어요. 말이 심하다고요?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 말고,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강간과 살인 범죄를 줄이기 위해 당신이 하는 일이 뭐죠? 아무것도 없잖아요.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선의는 현실을 털끝만큼도 바꾸지 못해요. 실천하지 않는 선의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오히려 마음 편하게 상대방에게 “조심하라”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의 느긋함과 여유로움은 당신과 내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만 할 뿐, 나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당신은 “조심하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어요. 그러고는 결코 주워 담지도 않죠. 범죄자를 조심해야 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일 뿐 당신에겐 그 어떤 책임도 없어요. 결국 내가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하거나 ‘몰카’에 찍힌다면 그건 당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조심하지 않은” 내 책임이 되겠죠. 그래서 당신의 말이 싫은 거예요. 당신은 “조심하라”는 말로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내고 있잖아요. 조심하라고 말했으니 할 만큼 했다는 식으로요. 그냥 부탁 하나 드릴게요. 내가 뭘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말해 줄 수 없다면 차라리 당신의 주변 남성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해 주세요. 여성을 강간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여성을 살해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몰카’로 여성을 찍을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그래야 맞잖아요. 여성을 강간하거나 살해하거나 몰래 촬영하는 이들은 거의 100% 남성이니까요. 가해자를 배출하는 집단에 가서 “가해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는 건 대단히 상식적인 행동 아닌가요? 남자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으니 당신이라도 좀 그래 줬으면 좋겠어요.

이제 “조심하라”는 말은 너무나 지겨워요. 나도 당신처럼 누군가에게 “조심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끊임없이 누군가를 “조심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요. 가끔씩 당신의 삶은 어떨지 상상해 볼 때가 있어요. 어떤가요? 이어폰 귀에 꽂고 밤거리를 거닐 수 있는 삶은? 강간당할 걱정이 없는 삶은? 남성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품을 필요가 없는 삶은? 공중화장실 벽에 나 있는 구멍을 휴지로 막지 않아도 되는 삶은? 그런 삶은 적어도 내 삶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을 거예요. 일상적인 두려움과 경계심 없이도 지속 가능한 삶. 바로 당신이 살고 있는 삶.

이 글은 최지혜 님이 지난 2일 페이스북에 쓴 글입니다. 외부기고문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의견은 saltnpepa@womennews.co.kr 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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