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첫 전시회 연 백은주 작가

KLPGA 테스트 1위로 통과 후

제주에 정착 후 미술의 길로

“골프보다 미술 잘할 자신”

안쓰이는 피아노 3대 해체하고

100년된 집 기둥으로도 작업

회화에서 사진, 조형, 건축으로

“유형·무형 넘나들며 작업” 

 

백은주 작가와 영담한지미술관 관장인 한지예술가 영담스님과 함께 백 작가의 작품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 앞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백은주 작가와 영담한지미술관 관장인 한지예술가 영담스님과 함께 백 작가의 작품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 앞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이왈종 화백, 백남준 작가보다 더 대단한 작품이다.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빛날 보물이로구나!”

제주도에서 열린 아트페어 ‘아트제주2017’을 관람하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작품 앞에 이르자 감탄을 연발했다. 나란히 전시된 이왈종 화백의 작품 앞에 있던 관람객들의 이목이 쏠렸다. 큐레이터에게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며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즉석에서 작품 평론을 한 비구니는 40년 간 한지를 연구해오면서 우리나라 유일한 한지 전문 미술관인 영담한지미술관을 설립·운영하고 있는 한지예술가 영담스님(64)이었다.

영담스님이 찾는 이는 한국에서 첫 전시회를 연 백은주(45) 작가였다. 피아노와 목재로 만든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 ‘바이올린 연주자’, ‘첼로 연주자’, ‘피아노 건반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서로 마주보는 중앙에서 스님의 표정은 상기돼있었다. 작품 재료로 쓰인 피아노 부품은 더 이상 연주되지 않는 피아노 3대를 해체한 것이고, ‘고재’라고 부르는 나무는 작가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100년 넘게 초가집을 떠받치던 기둥이었다. 스님은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 음악이 들리는 듯하다”면서 “작가가 쓰임이 다해 버려진 무정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유정화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뼈 마디마디의 질감, 생동감이 인상 깊다고도 했다.

조형예술가 백은주 작가는 프랑스, 일본 등에서 유명 작가들과 전시를 해왔지만 한국에서는 전시를 하지 않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력도 다소 독특하다. 20대 중후반 미술을 시작해, 습작 기간을 포함해도 20년 남짓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전직이 음악가라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프로골프선수 출신이다. 1998년 KLPGA 한국여자프로테스트에서 1위로 통과할만큼 기량도 뛰어났지만 곧 필드를 떠났다. 골프채를 놓고 연필을 쥐었고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시작하면서 고향인 제주도에 정착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카메라를 장만했고 사진을 시작했다. 우연히 지인인 프랑스 사진작가의 주선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최민식 사진작가 등 한국 3인과 프랑스 3인의 전시에 참여한 게 그의 데뷔전이었다. 이후 일본의 쿠사마 야요이 등이 참가한 그룹전에 한국작가로 유일하게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여러 차례 전시를 했다.

 

미술을 따로 배우거나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뒤늦게 독학으로 예술을 시작했지만 오직 장담할 수 있는건 ‘골프보다는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는 것. ‘재밌고 신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금세 빠져들었고, 그 덕분에 스스로를 믿고 몰두할 수 있었다. 백 작가가 피아노로 조형예술을 시작한 계기도 독특하다. 프랑스에서 사진전을 끝내고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여행을 갔을 때다. 대표적인 관광지 성슈테판대성당 앞에 이르렀을 때 피아노 연주가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동양인 여성 피아니스트가 신들린 듯 연주하고 있는 거예요. 그의 피아노는 뚜껑, 현판 등 열 수 있는 것들은 다 열려 있어 부속품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는데 마치 살아서 춤추는 것 같았죠. 소리도 더 강렬하게 와닿았고요. 그 피아노를 해체해 부품으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곧장 한국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연주가 불가능한 피아노를 구해달라고 부탁했죠.”

제주도 집에 도착하니 낡은 피아노 4대가 백 작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3대를 해체했어요. 부품이 8000개 정도 나왔죠. 나사를 풀고 부속을 하나하나 닦고 청소하면서 뜯는 시간이 만드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렸어요. 대신 부속들은 오감과 시각을 통해 이미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졌죠. 어느 부품을 어디에 쓰면 좋을지 떠올라 크게 고민하지 않고도 모양이 자연스럽게 잡혔어요.”

 

제주도의 100년 넘은 초가집을 떠받치던 나무 기둥으로 만든 ‘바이올린 연주자’, 백은주 작. ⓒ백은주
제주도의 100년 넘은 초가집을 떠받치던 나무 기둥으로 만든 ‘바이올린 연주자’, 백은주 작. ⓒ백은주

그에게 무한한 시간과 자원이 주어진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은지 궁금했다. “제겐 결핍이 힘인 것 같아요. 무한한 것은 고통일 것 같고요. 가진 것으로 이렇게 저렇게 활용해서 만들어 보는 게 좋아요. 고재도 그래요. 다른 사람들에겐 어려운 소재로 여겨질 수 있지만 저는 골동품과 고재를 수집한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익숙하고 친근한 소재예요. 아버지가 옮기면서 하나 떨어진거 주워다 깎고 만들기도 했죠.”

그의 아버지는 제주 전역에서 수집한 희귀한 고사목 뿌리와 돌 등 6000여점을 모아 40여년간 탐라목석원을 운영했던 수집가 백운철 원장이다. 오래된 것, 버려진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아버지의 그 딸이다.

 

한국 여성운동의 산 역사 이이효재(94) 선생이 2015년 ‘여성평화선언 100인 기자회견’ 당시 멨던 스카프도 백은주 작가가 디자인한
 것이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 여성운동의 산 역사 이이효재(94) 선생이 2015년 ‘여성평화선언 100인 기자회견’ 당시 멨던 스카프도 백은주 작가가 디자인한 것이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불혹을 넘겼지만 그는 또 어떤 장르에 도전할지 알 수 없다. 20년간 회화에서 사진으로, 다시 조형물, 건축으로 장르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간혹 듣는다. 그러나 이해의 차이라고 생각한다고. “조각칼을 세모·둥근·납작 등 세트로 사용해서 하나의 판화가 완성돼가듯 앞으로도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나 소재를 발견한다면 유형·무형을 넘나들면서 작업 연주를 해나갈 생각”이라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영담스님이 떠나면서 남긴 말이 백 작가의 미래를 짐작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작품에서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작가의 내면이 느껴진다. 인간적 고뇌조차 하나의 재밌는 에피소드로 남길 수 있는 여유와 배짱도 느껴진다. 무한한 에너지를 쏟아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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