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부터 현재까지 남성지식인이 주도한 중국 페미니즘

대다수 혁명파 인물들, 여성권리는 ‘나중’으로 보류 혹은 지연

 

1. 남성/국가 주도형의 중국 페미니즘

중국에서 ‘페미니즘’은 ‘부녀주의’ 또는 ‘여성주의’로 번역한다.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대체로는 ‘여성해방사상’ 또는 ‘여성의 눈으로 보는 세계관’을 가리킨다. ‘여권주의’라는 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여권주의=부르주아사상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지난 7월13일 류샤오보(劉曉波)의 사망으로 중국의 사상통제와 인권탄압의 민낯이 드러났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여권을 포함해, 인권을 논하는 것이 서구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한다. ‘중국 특색의 부녀이론’에서 ‘여성’보다 즐겨 사용하는 ‘부녀’는 “(공산당의 지도 아래) 운동을 통해 자각한 여성”을 의미한다.

중국 페미니즘은 탄생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성지식인이 주도했고, 진정 여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늘 국가와 민족의 이익에 종속돼, 사회개조 및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투쟁과 혁명에 동원됐다. ‘정치-정권 주도형의 페미니즘’ 또는 ‘국가 페미니즘(State Feminism)으로 칭해지는 이유다. 누구보다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마오쩌둥(毛澤東)의 말을 빌리자면 “(중국에서) 여성 해방은 계급 해방, 민족의 독립과 내재적 관련이 있었다”.

남성이 주도한 페미니즘,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에 종속된 여권, 이것이 바로 중국 페미니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이다. 허전(何震)이나, 딩링(丁玲), 장아이링(張愛玲) 등 극소수의 페미니스트를 제외하고 여성 스스로도 이러한 남성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수용했다. 현재 류샤오보의 죽음에 대해서도 미국 유학 출신의 사회학자 리인허(李銀河)를 제외하면 공산당과 정부를 비판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2. “여성의 지위는 문명의 척도”-서양선교사, 중국 페미니즘의 초석을 놓다

여성의 시점에 서서 여성을 수동적 피해자 아닌 적극적 행위자로 자리매김해 온 중국계 미국학자 도로시 고(Dorothy Ko, 중국명 高彦頤)는 중국여성을 “봉건주의와 가부장주의의 피해자”로 보는 것은 오사신문화운동과 공산주의혁명, 그리고 서구 페미니즘에 의해 ‘발명된 전통’이라고 한다. 그녀는 중국여성의 억압을 상징하는 코드였던 전족을 여성문화의 시점으로 재해석했고 명청시대에 유행했던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女子無才便是德)”이라는 말은 당시 상층 재녀들의 활발한 문학활동과 교류에 대한 남성들의 우려 섞인 시선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도로시 고의 저서 『Cinderella`s sisters : a revisionist history of Footbinding』. 전족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도로시 고의 저서 『Cinderella`s sisters : a revisionist history of Footbinding』. 전족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1960년대 반전운동(베트남전 반대), 흑인민권운동과 함께 일어난 제2차 페미니즘 사조뿐 아니라 1980년대말 유행한 후기구조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도로시 코의 시점과 방법론을 이 자리에서 논평할 여유는 없다.(관심이 있다면 역사학보 200집에 실린 필자의 글을 참고하시라) 다만 그녀가 ‘억압받아 온 중국여성’이라는 전통을 발명한 것으로 든 서구 페미니즘과 신문화운동, 그리고 공산혁명이 중국 페미니즘 역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세 단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 천하의 흥망에는 우리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 옹호』(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1792)를 발표한 지 꼭 100년이 지나 중국에도 여권이 논의되기 시작한다. 그것을 처음 전한 것은 서양선교사들이었고 점차 중국지식인들도 주목하게 됐다. 제1, 2차 중영전쟁(아편전쟁, 1840~42, 1856~60)에서의 승리로 중국에서 합법적인 선교활동을 보장받은 서양의 선교사들은 ‘전족’과 ‘여아살해(익녀)’, ‘매매혼’, ‘축첩’ 등 중국여성의 “끔찍한”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중국이 이러한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려면 기독교의 “남녀평등”이라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문맹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여권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문명도 발달해 있다고 가르쳤다. 서구근대의 시선으로 중국여성을 야만의 상태에 놓인 피해자로만 본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페미니즘을 좁은 의미에서 ‘여권주의’로 번역할 수 있다면 여성의 교육권과 혼인권, 직업권을 전파한 서양선교사들이야말로 중국 페미니즘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이었다. 이후 여권은 문명과 동의어가 되었고, 근대화 프로젝트의 중요한 범주가 됐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주장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중국인들도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여성’의 계몽을 부국강병을 위한 중요한 기획으로 받아들인다. 일본의 승리한 배경 중 하나가 여성교육의 발달과 그로 인한 국민자질 향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제군주제를 일본처럼 입헌군주제로 개혁해 국민국가를 형성하려고 했던 량치차오(梁啓超), 캉유웨이(康有爲) 등 개혁파(유신파)는 우수한 국민을 낳고 기를 수 있도록 여성의 지적 교육과 신체 단련을 주장했다. 이때 이론적 뒷받침이 된 것은 옌푸(嚴復)에 의해 『천연론(天演論)』이라는 책으로 번역된 사회진화론이었다. 옌푸는 늘 “건강하고 똑똑한 어머니가 튼튼하고 머리 좋은 아이를 낳는다”고 말했다. 여성교육을 우생강국의 기초로 본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도 줄곧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전족’은 정치적 입장을 초월해, 그리고 여성 스스로도 야만의 상징으로 여겨, 도시의 여학생에서 시작해 심지어 폐지의 대상이 아니었던 기녀들도 전족을 풀기 시작했다.

변법파와 달리, 부패하고 무능한 청왕조를 먼저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쑨원 등의 (배만민족주의)혁명파는 20세기초 중국에 소개된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예종』이나 허버트 스펜서의 『여권론』 등을 바탕으로 여권을 민권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다. 혁명파도 개혁파와 마찬가지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을 낳고 기르는 여성교육과 전족폐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교육과 군사훈련을 통해 여성을 암살과 폭동, 선전활동에 동원했다.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체조훈련을 하는 청말의 톈진여자고등학당 학생들을 묘사한 그림. ⓒ필자 촬영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체조훈련을 하는 청말의 톈진여자고등학당 학생들을 묘사한 그림. ⓒ필자 촬영

정치적 입장을 초월해 당시 여성들은 명말청초의 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천하의 흥망에는 평범한 남자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는 명언을 비틀어, “천하의 흥망에는 평범한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婦有責)”면서 남성이 주도하는 개혁과 혁명 등 정치운동에 동참했다. 남성의 논리를 내면화하면서도 공적 영역에서 입지를 넓히려고 한 여성들의 ‘책략’이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책임과 의무를 다한 뒤에 권리를 얻는다”고 하는 이러한 책략 덕분에 이후 전쟁과 혁명 등 그야말로 남성의 역사에서 여성은 ‘틈새’를 뚫고 활약할 수 있었다.

구국이나 혁명을 위해 여성 스스로도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를 우선시했고 여성적 특징을 장애로 생각했다. 남장을 즐긴 청말의 저명한 여성혁명가 추진(秋瑾)은 시부모와 남편, 자녀가 있는 가정을 뒤로 하고 홀몸으로 유학을 떠났고 귀국 후에는 선전과 혁명활동에 종사하다가 1907년, 서른둘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전설적인 여성혁명가로 부활한다. 사실 추진은 여성의 연대 및 경제적 자립 등에도 관심이 많았고 또 실천에 옮기기도 했지만 결코 여권(페미니즘)을 구국(민족주의혁명)에 앞세우지는 않았다.

민족주의에 종속되지 않는 형태의 여성해방을 추구한 페미니스트로는 남편 류스페이(劉師培)와 함께 1907~1909년 사이, 도쿄에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등 일본의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아나키스트 허전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녀가 주관한 잡지 「천의(天義)」는 일찌감치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의 『여성과 사회주의』일부를 번역해 소개했다. 그러나 시대사조였던 민족주의(청조타도)와 이상이었던 아나키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던 이 부부는 결국 혁명을 배신해버렸다.

 

청말의 혁명가 추진
청말의 혁명가 추진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은 무너졌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수많은 여성들이 백년전쟁의 잔다르크, 프랑스 혁명기의 롤랑부인 그리고 알렉산더2세의 암살을 주도한 러시아의 소피야 페롭스카야를 롤모델로 삼아 암살과 선전, 군사 등 다양한 정치사회운동에 가담했다. 그녀들은 궁극적으로 공화제 정부에서 참정권을 목표로 했지만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쑨원, 장빙린(章炳麟), 쑹자오런(宋敎仁) 등 혁명파 인물 대부분이 여성의 권리는 장래의 문제라며 ‘보류’ 또는 ‘지연’시켰다. 혁명 후 위안스카이를 비롯해 더욱 반동적인 군벌정치가 이어졌다. 군벌들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버렸다. 여성의 순종과 정절을 고취하고 포상했다. 곳곳에서 가문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곡기를 끊고 아사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4. 신문화운동과 ‘여성’의 발견

2000여년간 이어져 온 전제군주체제를 타도한 혁명의 ‘광명’이 반동적 군벌지배라는 ‘암흑’으로 빠져들자 중국인은 크게 실망했다. 청말 공교육의 제도화와 해외유학 붐으로 탄생한 신지식층은 중국이 변하려면 정치적 개혁과 혁명만으로 부족하며 사상의 해방과 정신의 개조가 수반돼야 한다고 여겼다. 1915년 창간된 「신청년」 등을 통해 그들은 ‘삼강오상’ 같은 중국의 전통사상 및 그로인해 굳어진 가부장제와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남성지식인이 주도하는 계몽운동의 대상(객체)에 불과했다면 「신청년」 창간과 함께 시작된 신문화운동 시기에는 1907년 여성교육의 제도화 이후 증가한 학생과 교사나 기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목소리도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1919년의 ‘오사애국운동’을 비롯해 다양한 시위에 동참했다.

역사학자들은 오사운동을 포함한 신문화운동 시기를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 페미니즘이 성립한 것으로 본다. 여성이 비로소 여성으로서의 주체를 자각하고 역사무대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여전히 페미니즘은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것이었다. 비록 여성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이 전개되었지만, 같은 시기 다이쇼 일본에서 일어난 유명한 ‘모성보호논쟁’처럼 여성이 주체가 된 논쟁이 없었다. 남성들은 이전 세대보다도 더 피해자, 희생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했다.

당시 남성지식인이 유난히 여성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여성을 동정했던 것은 그들 자신이 포판혼(중매혼)의 피해자인 데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가장(조부나 부친 등)의 막강한 권력행사로 인해 늘 웅크리고 살아왔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홀어머니 밑에 자란 루쉰(魯迅)이 어머니가 ‘기획’한 동네 아가씨 주안(朱安)과의 부부생활을 거부하고 제자인 쉬광핑(許廣平)과 동거하면서도 끝까지 어머니와 주안을 부양했던 것은 여성=피해자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서양의 다양한 페미니즘이 여과 없이 한꺼번에 소개, 수용됐다. ‘여성’, ‘부녀’ 등의 단어도 이때 등장했다. 그 전까지는 혼인 여부에 따라 ‘부인’이나 ‘여자’로 불렀다. 여기에서 ‘여성’은 사전적인 의미에서 남녀의 생리적 차이를 가리키는 성(sex)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남녀 차이를 가리키는 성별(gender)을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남녀의 생리적 차이에 대한 관심은 남녀의 성심리 차이에 대한 관심과 동시에 일어났는데 그 계기가 된 사건은 1922년 『이유 있는 반항』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산아제한론자 마거릿 생어의 중국 방문이었다. 그녀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피임방법을 상세히 소개했다.

그밖에도 『남과 여』 등 영국의 성심리학자 헤블럭 엘리스(Havelock Ellis)의 책들이 중국에서 번역되었고 “연애를 통해 낳은 아이는 우수하다”고 하는 엘리스의 서문이 실린 스웨덴의 교육학자 엘렌 케이(Ellen Key)의 모성주의와 연애신성주의가 담긴 책들도 번역되어, 개인주의와 사회개혁, 그리고 종족의 진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했던 중국지식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미국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우생학(eugenics)은 청말에 소개된 사회진화론 이상으로 차세대 국민을 낳고 교육하는 여성의 역할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여성의 성역할 차이, 즉 젠더에 대한 관심이 거꾸로 생물학적 성(섹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진정한 페미니즘은 (자연계에서처럼) 여성이 배우자선택권을 갖는 것”이라며, 남성의 매매혼이나 축첩을 반대하는 논리로도 작동했다.

「신청년」이 창간됐던 신문화운동 초기에는 서양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였다. 근대 중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자로 평가받는 후스(胡適)는 일찍이 “나는 부모의 성욕으로 인해 빚어진 존재이며 따라서 효를 다할 필요는 없다”고 했으며 그가 번안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1920년대 중국 페미니즘의 상징이었다. 집을 나가면서 했던 “나는 나 자신의 것. 타인은 절대 개입할 수 없어요”라는 노라의 외침은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욜로 You Only Live Once(한번뿐인 삶)’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자아를 찾아, 연애의 실현을 위해 가정이라고 하는 단단한 울타리를 뛰쳐나간 청년들의 이야기가 신문기사를 장식했다. 그만큼 당시 청년들은 가정이라는 구속이 불편했고 가부장의 권위가 두려웠던 것이다. 당연히 이 시기 청년지식인들은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아나키즘에 크게 기울었고,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의 아나르코 페미니즘이 여러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5. ‘하늘의 절반’은 과연 해방되었는가-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중국공산당

1917년 러시아혁명의 소식과 함께 전해진 마르크스주의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균점으로 끝난 제1차세계대전 후 파리강화조약에 실망한 중국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잡지 「신청년」 초기의 구호였던 과학과 민주는 점차 ‘마르크스주의 만세’로 변했고, 여성의 해방도 사유재산의 타도와 여성노동의 사회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 이후에는 그때까지 중국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엘렌 케이의 연애신성주의나 노라식 개인주의를 대신해 점차 콜론타이(Aleksandra Kollontai)나 베벨, 그리고 엥겔스의 여성론이 유행한다. 대체로 보면 단 몇 년 만에 부르주아페미니즘에서 사회주의페미니즘으로 바뀐 것인데 훗날 승리자가 되는 중국공산당이 페미니즘의 번역어로 ‘여권주의’를 꺼리는 이유는 그것이 부르주아페미니즘을 의미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로 마오쩌둥에 큰 영향을 주었던 리다자오(李大釗)는 중국의 페미니즘을 여성의 경제상태의 차이에 따라 부르주아여권주의와 프롤레타리아여성해방론 두 가지로 나누었다. 이후로 여권주의는 그 자체로 부르주아라는 딱지가 붙게 됐다.

1930년대에는 전쟁이 중국의 중심과제가 되면서 민족대립과 계급대립 앞에 여성의 특수한 권리를 말하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게 되었다. 공산당 주도하에 수많은 여성들이 대장정과 항일전쟁, 그리고 내전에 동원되어 활약했다. 1937년 난징 함락 후 장제스의 아내인 쑹메이링(宋美齡)을 비롯한 국민당계여성들도 후방에서 적극 활약했다.

부르주아페미니즘도 마르크스주의페미니즘도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경제활동을 여성해방의 전제로 본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특히 중국공산당은 탄생부터 신중국 수립(1949)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대거 생산노동에 참여시켰다. 여성의 경제 참여, 경제적 기회, 정치적 권한, 교육적 성취 정도, 건강과 복지 등을 기준으로 조사하는 성별격차지수(GGI)에서 중국이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낮은 결과로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우리나라는 일본보다도 높다).

1950년대 말의 대약진운동 때는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는 무리한 목표 설정으로 여성의 생리적 특수성을 거의 무시한 채 노동에 투입한 결과 실신이나 유산, 사망 등 비참한 사건도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비극은 문화대혁명(1966~76)시기에도 이어졌다. 마오쩌둥이 즐겨했던 “남자와 여자는 각각 하늘의 절반을 지탱하고 있다(婦女能頂半邊天)”는 말은 “여자도 남자가 하는 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구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혁명이 기회가 된 여성도 적지 않았지만 가부장적 사고가 여전한 농촌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오히려 이중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신중국 수립 이후 ‘혼인법’ 반포와 함께 자신의 의사에 따른 결혼과 이혼이 가능해졌지만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 때문에 사망에 이른 여성도 적지 않았다. 생산노동의 참가가 곧바로 여성지위의 향상을 가져올 수 없다. 여성지위의 향상을 위해서는 경제관계뿐 아니라 법, 제도, 의식, 규범, 이데올로기, 가치의 변화도 수반됐야 한다.

 

6. 부련의 한계

NGO운동이 극히 미미한 상황에서 현재 중국의 여성운동과 정책은 1949년 4월에 탄생한 여성관련 최대조직인 중화전국부녀연합회(약칭 ‘부련’. 성립 당시 명칭은 ‘중화전국민주부녀연합회’였다가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부녀연합회로 명칭 변경.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활동이 정지됐다가 1978년 개혁개방과 함께 활동 재개)가 이끌고 있다.

부련은 공산당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있는 중요한 단체이자 전국조직으로서, 여성 차별을 철폐하고 여성을 노동의 주체로 동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경제주체로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노력해왔다. 하지만 관변단체라는 한계상 개혁개방 이후, 특히 베이징 세계여성대회(1995) 이후 대거 유입된 다양한 서구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신세대 중국여성의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부녀정책’의 대리자 역할을 할 뿐이다.

개혁개방 이후 그간 소멸되었던 성매매가 다시 부활하고 경제발전 과정에서 남녀 경제격차가 심화되는 등 과거의 적폐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당의 눈치를 보는 부련이 이러한 문제에 유연하게 대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의 시대(2012~ ) 이후 중국의 대국화는 더욱 가속화하고 있으며 서양이 강요한 근대적 가치들을 대신해 유교적 인본주의를 보편적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인권도 여권도 결국은 중국이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서양에 의해 강요받은 하나의 가치일 뿐 결코 절대적이고 보편적 가치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2015년 이후에는 성소수자나 성폭력 문제에 관해 발언해 온 대표적인 여성운동가들이 계속 구금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중국의 전통에서 근대화의 방향을 모색하고 중국적 페미니즘을 구축하려는 중국 정부에게 “전족을 악습으로 본 것은 서구 페미니즘적 시각일 뿐”이라는 도로시 고의 시각은 본인이 의지와 무관하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 여성권리의 신장을 위해서는 서구 페미니즘을 거부하기보다는 인류가 공통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에 더 힘을 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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