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영정
표준영정

장계향(張桂香)은 340년전 최초의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하고, 빈민규휼의 애민사상을 실천한 여중군자(女中君子)입니다. (사)여중군자장계향선양회(회장 김행자)가 주최한 ‘장계향 공모전’은 경북을 상징하는 여성 인물 장계향(1598~1680)의 삶과 철학을 재조명하기 위해 진행됐습니다. 여성신문은 경상북도지사상과 경북도교육감상 등 수상작 중 일부를 게재합니다. 수상작 전문은 장계향 선양회 홈페이지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지사상>

그녀의 참나무는 둥글다, 송현주

 

그녀는 둥근 것들을 따라 나선다

 

두들 마을에 참나무

둥근 열매를 툭툭 던져주는 날

제 몸을 다 내어주는 것이

집 주인을 닮았다

구석에 떨어지는 도토리

껍질이 부서져 둥근 소리를 낸다

 

함지박에 담아 불거진 울음 잠재우고

썩어서 까실한 것들은 둥근 채로 걸러내

알갱이만 곱게 갈아 맑은 물에 담근다

장작을 태우고

목이 긴 주걱으로 오랫동안 저으면

껄죽해진 도토리 죽

여기저기 물방울 터지듯 보글거릴 때쯤

뜨거운 열기는 풀어진 허공을 말아 쥐고

그녀의 가슴도 함께 끓어 오른다

 

가마솥은 소박하고 정갈하게 차린 구휼 두레반이 된다

시린 손 어루만지는 순백의 사발

오물 오므린 입안에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달도 별도 댕강댕강 떼어주는 손

책갈피에 숟가락이 들락날락

꺼지지 않는 불씨

아이들의 눈동자 안으로 들어가 빛난다

 

그녀의 대문 밖

참나무 환하게 비추는 달 하나 걸어 놓았다

둥근 것들은 왜 그렇게 환하게 웃는지

 

<경북도교육감상>

여중군주자 장계향의 삶과 꿈-‘나눔은 작아도 크다’를 읽고, 상지여고 2학년 배가영

처음 ‘장계향’이란 인물을 주제로 한 책을 읽게 되었을 때 장계향은 내게 굉장히 생소한 인물 이었다. 부끄럽지만 내가 알고 있는 여성인물은 주변에서도 흔히 알려진 신사임당뿐 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새로운 인물을 알 수 있는 뜻 깊고 좋은 기회였다. 아마 주변에 알려진 인물 중 여성은 많지 않기에 더욱 기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푼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쓰기에 앞서 장계향에 대해 조금 더 알고자 싶어 몇 가지 알아보자 가장 눈에 띄는 말은 조선의 큰어머니라는 말 이였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러한 칭호로 불리는 것 일까? 나는 더욱 궁금해졌고 그러한 찰라에 ‘나눔은 작아도 크다’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134페이지의 크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속을 보기 전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듯이 책 안에는 장계향의 일생, 자라온 배경, 남에게 베푼 일, 모성애, 진정한 현모양처는 무엇인가 등 장계향의 갖은 고생과 사랑으로 책안이 채워져 있었다.

첫 시작은 15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문으로 문명이 높은 학자 장흥효와 안동 권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다. 장계향 또한 여아라는 이유로 주변에 많은 아쉬움을 샀는데 장계향과 나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비슷한 경험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과 아픔을 말하자면 어머니가 나를 갖고 10달이 넘는 긴 시간동안 애지중지 품어 내가 세상 밖에 나왔을 때 할머니께서는 나를 한 번도 안아주시지 않으셨다. 할머니가 나를 대하는 행동에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 했다. 남자가 아닌 여자여서 나를 바라보시는 눈빛은 실망에 가득 찬 눈빛 이였고,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날카로운 화살은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내게는 괜찮다하시며 내색하지 않으시고는 나를 다독여주셨다. 어렸을 적 그때는 미처 못 봤지만 어머니 가슴은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한날은 가족끼리 친가 쪽 어른 분들을 뵈러 갔다. 거기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관심은 온통 오빠에게만 쏠렸고, 우리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이라며 모두 오빠 주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자연스레 눈 밖 이였다. 사랑받고 관심 받고 싶었던 어렸던 나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달랬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던 것은 할머니께서 오빠에게 너는 대를 이을 장남이라며 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며 말 하신 것은 어린 시절의 아직도 나를 눈물짓게 한다.

이와 같이 나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기에 장계향의 심정이 잘 이해되고 공감이 간다. 어쩌면 그 시대 자체가 남성중심인 유교 사회였기에 장계향은 나보다 더 큰 아픔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아라는 편견이 무색하게도 장계향은 뛰어난 덕성을 가진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 일찍이 문학에 눈을 떴다. 그 당시 나이에는 믿기 어려운 ‘학발’ 시 같은 수준 높은 시를 써냈고, 그 당시 나이에는 믿기 어려운 실력이라고 한다. 시를 읽는다면 읽는 내내 감탄은 멈추지 못할 정도라 하였다. 나 또한 그 시를 읽어보니 어린 시절 쓴 실력이라니 내 자신이 부끄럽기 까지 했다.

장계향은 자신에게 꼭 맞은 신을 찾은 듯 학문 쪽으로 우월한 재능을 보였고, 주변사람 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아버지 장흥효도 그런 딸을 굉장히 어여삐 여기며 자랑스러워하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장계향이 남자아이였다면 하는 아쉬움을 애써 감추었다. 장계향은 당시에 학문은 그 시대에 남자만 논할 수 있었기에 학문의 길을 벗어나 여성으로서 할 일을 다 하기위해 학문 책을 접었다. 책을 접기까지 장계향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여성으로써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학문을 할 수 없어 서글펐을까 ? 그 마음을 내가 다 헤아릴 순 없겠으나 나였다면 성별과 그 시대 배경이 밉고 원망스러울 것 이다.

장계향은 그런 내색도 없이 마음을 가다듬고 ‘예기’라는 책을 폈다. 그 책은 남성은 하늘과도 같은 존재이며 여성은 남성의 옆에서 묵묵히 보필하는 것이 여성의 도리임을 알려주었고 그렇게 여성으로써의 삶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된다. 이 구절을 보고 나는 여성은 왜 남성에게 이끌리며 살아야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보니 오래 전부터 여성의 위는 남성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다가왔다. 왜냐면 내가 살아온 배경자체가 그랬으니 말이다. 우리 친가 쪽을 봐도 그렇다. 명절이나 어느 날을 보아도 우리는 삼촌, 아빠 등 남성과 식사를 다른 상에서 했다. 마치 계급을 매기듯이 당시에는 당연하다 느꼈지만 이제와 보니 이것이 남성주의 가부장제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내가 사는 이 세대는 점차 가부장제에서 멀어져 예전과는 점차 변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남성이 죽으라하면 시늉까지 해야한다하니 글에 써 있진 않지만 지금과는 비교조차 안될 만큼의 설움이 있을지 모른다.

예기를 다 깨우쳐 여성이 되었을 무렵 꽃다운 19세, 1616년 장흥효가 각별히 아끼던 이시명과 혼인을 치르게 된다. 장계향은 어머니의 가르침과 자신이 직접 책을 읽고 배운 것에 따라서 이시명을 보필했고 6남 2녀를 순산하였다. 또한 전처소생의 1남 1녀를 자신의 자식처럼 받아드려 보듬어 키웠다. 그리고 지아비와 힘을 합쳐 손수 자식들을 직접 훈육하기로 하고, 자식의 가르침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 정성이닿은 것인지 7남은 영남학파의 칠현자로 이끌었다는 것을 보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어느 어머니나 자식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중학교 시절 적응을 못하고 말 수가 적어 왕따를 당해 겉돌고 힘들어했었다. 내가 10대 시절 가장 힘들었던 때를 꼽으라 하면 이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학교에 있는 것이 절벽 끝자락에 서있는 것 마냥 아슬아슬하고 무서웠다. 그 밑에는 무엇이 있을까 떨어진다면 그 곳엔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싶어 너무 무섭고 지옥 같았다. 한 시도 학교에 있기 싫었다. 매번 핑계를 대며 학교가길 거부했다. 가게 되는 날이면 나는 아프다며 학교를 도중에 빠져나왔고 밤새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울었다. 내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질 때 어머니의 가슴을 몇 번이고 쿵 하고 내려 앉았겠지 내가 소리 내 울 때 어머니는 마음 속 으로 더 크게 우셨는지 모른다. 자식의 울음소리는 어머니들에게 천둥과 같다 하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더 엉엉 울었다. 아마 천둥보다 더한 비바람 태풍이 몰아친 것과 같을 것이다. 울던 나를 한참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언제나 똑같이 아기처럼 소리 내어 우는 내게 괜찮다 시며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내가 다시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셨다.

나를 달래시며 안아주신 따뜻하고 아늑한 어머니의 품은 아직도 여운이 남아 나를 감싸 안아 준다. 그 품이 까마득해질 무렵 나는 어머니의 손을 보았다. 괜히 눈물이 났다. 그리고 손이 가는대로 만져보았다. 혈액순환이 잘 안되어 퉁퉁 부어버린 어머니의 손은 거칠고 따뜻했다. 얼마 만에 만져보는 손인가 싶은 와중에 엄마가 반대로 내 손을 어루만졌다. 희고 부드럽다하셨다.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올려 어머니의 변해버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피부 결도 곱고 주름이란 걸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 어느새 주름살도 깊어졌다.

언제나 모자라지 않게 나에게는 몇 십만 원이 되는 옷을 사주시고 정작 어머니는 시장에서 만원으로 티 2장을 샀다며 웃으시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내가 어릴 적부터 가고 싶었던 간호과로 가게 됐을 때 나보다 좋아하시며 어린아이처럼 웃으실 때 그 때가 계속 생각나서 글을 쓰는 내내 울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어떻게 이렇게나 시간이 흐른 걸까 싶었는데 흘러버린 시간 안에서 나는 몇 번 아니 몇 백번이고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내 마음에 안든다 해서 비난의 목적지는 어머니였고 나를 위해주시는 행동인줄 알면서도 난 더 삐딱하게 굴었다. 내가 지금에서야 못을 박은 것을 빼내준다 해 그 상처가 아물지는 않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어머니에게 죄송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 어미와 같은 마음으로 장계향이 보살핀 사람들이 있다. 천하다하며 박대당하는 노비들을 차별하지 않으며 한글을 손수 가르쳐 주었고 여성 노비들에게는 여성으로서의 살아가는 일을 가르쳐 주었다. 노비들은 이런 장계향을 어머니 따르듯 존경하고 잘 따랐다. 그리고 17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자신을 희생하며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듯 시아버지를 보살폈다. 그러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며 길에는 피난민들이 들끓었다. 그 모습이 어느 모습보다 처참해 보기 힘들다 한다. 모습을 보고 장계향은 직접 나서서 수천 명의 피난민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서로 살기위해 남을 헐뜯을 때 장계향은 피난민들을 가슴으로 안아 그들을 진심으로 도왔고 그로 인해 수백 명이 전쟁 통에 버텨낼 수 있었다. 장계향은 자신의 식량이 바닥을 보여 당장 주저앉을 위기에도 남에게 자신을 바쳐가며 남을 도왔다.

계향이 남에게 헌신하며 봉사하는 것을 보고 내가 예전부터 꿈 꿔오던 간호사라는 꿈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남을 보살펴야 하는지 장계향이 피난민을 보살핀 마음을 보고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에 길가에서 작고 허리가 금방이라도 땅으로 꼬부라질 듯 허리가 굽으신 한 할머니를 보았는데 하이얀 도라지를 몇 바구니 내 놓으신 채 살갗이 베일 듯 스치던 추위에 한껏 웅크려 버티고 계셨다. 나는 다가가 도라지가 얼마냐 묻자 3천 원이라 했다. 이 추위에 버텨내는 이유가 삼천 원이라니 서글펐다. 할머니는 다 팔아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겠지 라는 생각에 나는 3바구니 달라하자 고맙다시며 비닐봉지에 담으셨다. 3천원 보다 훨씬 더되는 양이였다. 나물의 양에 놀라있다 나는 만 원짜리를 건네고 나는 도망치듯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뛰었다. 뒤에서는 잔 돈 받아가라며 부르시는 소리를 못들은 채 하고 계속 걸었다. 작은 돈이지만 그 돈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랬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벼울 수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그 날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산 도라지를 보여주자 빙그레 웃으며 기특하다 하셨다.

나는 중학교 시절 추위에 떠시는 할머니를 보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도라지를 샀고, 내가 간호를 배우는 데 있어 흥미를 가지지만 흥미만으로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 진정으로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장계향 또한 나의 중학교 시절과 같이 단순히 동정하는 마음으로 남을 도왔다면 자신을 아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며 헌신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 한 층 성장한 나는 장계향과 같이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고통을 잊고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장계향이 댓가도 없는 봉사를 하며 자신까지 험난한 세상으로 내몰렸고 가난에 늪에 들어서 빠지게 됐을 때 그럼에도 남의 손을 잡아 숨을 쉬도록 돕는 장계향은 피난민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장계향은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살아생전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보고 듣고 맛보고

배운 음식의 조리법이나 음식간의 조화를 직접 한글로 써 알리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음식디미방’이다. 이것은 시집 갈 딸에게 주려고 기록하였다고도 전해지는 한글최초의 조리서인데

자신이 직접 조리하고, 연구하여 긴 시간 끝에 만들어낸 조리서이다. 만드는 동안 뜻대로 되지 않고

어렵고 고민해야 할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장계향은 또 자신이 아닌 그 당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후세에 있을 우리를 위해 또한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애쓴 장계향의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장계향은 살아생전 위에 쓰여진 것 같이 공로를 많이 세웠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하나같이 장계향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고생하고 일생을 보낸 것 일까 ? 그 이유는 장계향이 마음이 그쪽으로 갔기 때문 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왜 장계향이 조선의 큰 어머니, 여성군자, 큰 별 이와 같은 칭송을 받는지 차츰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조선의 큰어머니란 칭송은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 어미와 같은 아끼고 자식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진정으로 대했기 때문 일 거라 생각한다.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문을 놓아 버려야 했던 그 시대의 배경이 한스럽고, 장계향이 안쓰러웠다. 내가 어른들이 모이시는 자리에 가면 매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말이 있었다.

지금 공부 할 수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기라는 말이다. 말씀하실 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배우는 것에 있어 그렇게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 장계향이 어쩔 수 없이 놓아했던 학문을 나는 큰 어려움 없이 배우는 것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로에도 여성이라는 그늘에 가려 지금에서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나는 여성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올바른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깨달음과 교훈을 배웠다. 특히 장계향이 자신의 지아비와 자식을 극진히 보살피는 것을 보고 진정 이 시대에 살아가는 여성들이 마음에 새겨 닮고 배워야 하는 인물이 아닌가 생각했다.

처음 ‘나눔은 작아도 크다’라는 책을 열기 전에는 앞서 말했듯 새로운 인물을 알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과 호기심이 많이 들었는데 책을 덮게 된 지금은 나의 꿈, 그리고 어린시절, 어머니 등 잊고 살았던 것이나 나의 장래와 같은 깊게 들어가 보지 못한 것들을 돌아보고 생각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내게 돌아왔다. 아직 장계향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아닌 남성도 장계향에게 봉사정신이라든지 일생에 대해 배워가야 할 인물이다. 이 책을 읽고 장계향이란 인물을 알게 되고 오늘 나는 많은 교훈생각도 배웠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것은 나 자신과 일생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자면 내가 너무 나만을 위해 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주저 없이 두 손 걷어붙이고는 도울 줄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서로 살기 바쁘고 단절 되었지만 나라도 장계향처럼 남을 먼저 챙기고 나선다면 세상은 조금이라도 따뜻해지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장계향이 베풀고 나눈 많은 정과 사랑은 오늘 날 우리에게 전해져 많은 이들에게 교훈을 심어준다.

이 책을 읽고 장계향이라는 인물을 접하게 됨으로써 나는 너무나 가까이 있지만 잊고 살던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깨우치게 되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 내게 숨을 불어 넣어주시고, 주저앉아 더 이상 설 수 없을 때 온 힘으로 나를 일으켜 다시 서게 해준 어머니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었고, 나의 장래를 향해 더 가까워지고 깨달음을 준 장계향 여중군자님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여성신문사사장상>

울타리를 넘어, 김휘연

 

능소화가 소담히

울타리 넘어 담에서 담으로 조용히 이어 피어나는

 

님의 향기가

시공간을 넘어 전해지는 여름 밤입니다.

 

여기 지금 내 자리에서 나를 가꾸고 자녀를 가꾸고

이웃을 가꾸어 온전한 삶을 가꾸어 간 님의 향기를 느껴봅니다.

 

여인의 삶을 살아내기도 벅찼을

훌륭한 성품으로 나를 갈마하고 자녀로 스미게 하는

자녀를 독려하여 사회의 대들보로 세우는 그대는 여장부이십니다.

 

음식하나에도 정성가득하고

함께 나누는 마음에 덕이 흘러넘치니

이 또한 모두의 마음을 이어주는 대모이십니다.

 

이제

여기 이 자리에서

그대의 마음이 되어보고 그대의 손이 되어보고

그대의 머리가 되어보는 조용한 이 시간은

나에게는 명상입니다.

 

시공간을 넘어

내 한계에 맞닿아 울타리를 넘어 사유하는 이 시간

한 시대의 삶을 알뜰하고 당당히 가꾸어 간 여인을

지금 이 공간에서 만나는 이 시간

이제 나를 만납니다.

 

지천명을 바라보며

더욱 현명하기를 더욱 알뜰히 시간을 영위하기를

더욱 품성을 바로 세우고 흘러넘치게 하기를

더욱 성큼성큼 울타리 넘어

담을 이어 이어 소담히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최우수상>

1. 장계향-시공을 넘어 우리에게 온 군자, 장경순

 

시서의 경전을 읽어

학문을 시작하고

예를 읽어

학문을 끝내니

선비로 시작하여 군자로 마친 여인

 

천하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가

너무도 무겁고 또 무거운 짐이어서

강하지 않으면 맡을 수 없거니와

지혜가 없으면 그 또한 분별하기 힘드네

 

딸의 도리로 가문을 세우고

어머니의 도리로 자녀를 양육하였으니

그 지극한 도리는 사랑이라

 

시에 능하고 서화에 능해도

실천하지 않고 깨닫지 않으면

그 재주만 드러내 즐겼을 것을

학문에 근면하고 돈후해지도록 살았으니

시공을 넘어 불리어지고도 남을 이름

 

오늘에는

禮가 땅 위에 구르고

옛 성현의 말씀이 서가에 묵향도 없이 앉아 있어도

길 아닌 길 위에서 도리를 찾으니

여중군자

그의 삶이 더욱 귀한 이유라네.

 

2. 아식兒息에게, 김현묵

이제 이 어미는 늙고 병까지 들었으니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그리하여 정신없이 살아왔던 지난날을 잠시 돌아보며 필을 들어본다.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내 일생 동안 나와 함께 했던 두 가지 생각은 교육敎育과 애민愛民이었다. 가슴에 품었던 그 두 가지 생각이 있었기에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잘 이겨내며 살 수 있었다.

먼저 내가 교육에 대한 눈을 일찍 떴던 것은 너희들의 외조부 경당敬堂 어르신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듯이 나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랐다. 아들이 없었기에 너희들 외조부께서는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여염집 규수들은 글도 제대로 깨우치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외조부께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 가르침에 머물지 않고 배운 것을 이웃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쓰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런 중에도 살림살이를 배우고 익히며 틈틈이 한시를 지었고 그림을 그렸다.

내 나이 열 살 무렵에 너희들 외조부께서 제자들에게 ‘원회운세元會運世’를 강론하시다가 내게 대뜸 질문을 하셨다.

“회會는 무엇이고, 원元은 무엇이냐?”

“회는 1만 800년이고, 원은 12만 9,600년입니다.”

그 자리에서 암산을 하여 즉시 대답을 하니 사람들이 나를 두고 암산暗算의 천재라고 말했던 일화이다. 천재라기보다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던 마음가짐으로 강론을 들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답을 낼 수 있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말이 있지만 무엇을 할 때는 열심히 정신을 집중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배우고 익히는 일에는 정신을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일을 할 때도 공부를 하는 것처럼 혼을 불어넣어서 해야 하는 것이다. 매사에 혼을 불어넣는 마음가짐 없이 환경과 나이를 탓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어엿한 선비로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으로 너희들을 훈육했기 때문이다.

재령 이씨 집안에 시집을 오면서 나 스스로는 서책을 멀리하였지만 교육의 중요함을 일찍이 깨우치고 있었기에 너희들에게 마음껏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 임금님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너희의 부친이 세상을 등지고 영양 석보에 은거했을 때도 그냥 허송세월 하지 말고 후학을 양성할 것을 권면했다.

또 하나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애민愛民이었다.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내 이웃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무와 숲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듯이 이웃이 힘들고 어려울 때 돌아보지 않으면 나무도 홀로 살아남기 힘든 법이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듯이 내가 어려운 이웃들을 구휼救恤했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내 입으로 그 일들을 다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 되어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시집오기 전에 있었던 일 하나만 하고자 한다. 어렵게 짠 베를 여종이 실수로 불에 태우는 실수를 범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여종에게 함부로 야단치지 않았다.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음을 다해 그들을 가족처럼 대하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웃집의 계집종들도 내 밑에서 종살이 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고 전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저들을 대하니 저들 또한 진심으로 내 말에 순종하며 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엄하게 사람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사람은 진심이 통하게 되어 있다. 말 못하는 짐승들도 주인을 알아보거늘 하물며 같은 사람들이야 진심이 더 잘 통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진심으로 사람을 섬기고 아낄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성인이다.

내 나이 열아홉에 재령 이씨 집안에 시집을 와서 시부모님을 비롯해 부모를 일찍 잃은 조카들 다섯, 시동생 둘, 전처소생 남매까지 바라지를 떠맡았다. 시집살이가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남들에게도 마음을 나누거늘 하물며 집안사람들에게 못할 일이 어디에 있을까. 남들은 시집살이 힘들게 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기쁨으로 감당했다.

 

그렇게 본심으로 바라지를 한 은덕이었는지 너희들 모두 학명을 떨칠 만큼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주어 이 어미는 고마울 따름이고, 너희들이 학명을 떨쳐주었기 때문에 이 어미가 과분한 여중군자女中君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제 내가 음식디미방을 세상에 내 놓았던 일을 잠깐 생각해 보고 싶구나. 음식디미방을 쓰게 된 마음 밑바탕에도 이미 말했던 “교육敎育과 애민愛民”이라고 하는 큰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여성이 글을 쓰고 더군다나 책을 낸다는 것은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고초를 겪는 일이 생긴다 할지라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교육을 통해 배웠고, 또한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음식디미방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배우고 익혔던 바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글만 읽을 줄 알면 음식을 만드는데 별 어려움 없이 보고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그냥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음식 만드는 법을 정리한 것이다. 양반가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서민들도 쉽게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조리법이 있으면 음식을 만드는데 실수를 줄이고, 실수를 줄이면 낭비 없이 음식을 만들 수 있어 절약도 된다.

면병류麪餠類 18개 항목, 어육류魚肉類 74개 항목, 주류酒類 및 초류醋類 54개 항목으로 분류 하였다. 가능하면 음식의 재료에 따른 분류를 하려고 애를 썼다. 이 책이 널리 전해져서 애민愛民하고자 했던 내 마음이 전해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음식디미방이 어느 한 사람의 손에만 들어가면 그것으로 사장死藏되어 버릴 수 있기에 여식女息에게는 필사를 하여 가져가도록 하였다.

나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너희들의 어미 장계향이 마음 깊이 품었던 교육과 애민을 너희들도 항상 실천하고, 자만에 빠져 행실을 그르치지 않도록 당부하며 필을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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