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성영화 서비스 앱 ‘퍼플레이’ 만드는 사람들

여성영화 볼 곳 없어 직접 나서

1달 만에 크라우드펀딩 300% 달성

“여성 감독·여성 주인공 영화는 안 된다는 편견 깨고파”

 

‘여성 기근’. 한국 영화계에서 흔히 나오는 말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인 영화,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가 없다는 말이다. 지난해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 24편 중,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는 2편, 여성 작가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은 9편, 여성 캐릭터가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영화는 6편뿐이다. 2015년 전체 개봉작 중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는 5.2%에 불과했다.

남성중심적 영화들이 지겨운 관객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여성 감독의 영화, 젠더 이분법에 도전하는 영화”를 모아 제공하는 온라인 서비스가 곧 나온다. 9월 오픈 예정인 동영상 스트리밍 앱, ‘퍼플레이’다. 페미니스트의 상징인 보라색(purple)과 플레이(play)를 합친 이름이다. 단편·장편 영화,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전 세계의 ‘여성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플랫폼을 표방한다. 오픈 초기에만 국내 작품 300여 편, 해외 작품 100여 편 총 300여 편을 제공할 계획이다. 타깃은 페미니즘에 관심을 지닌 20~30대 여성들이다. ‘나는 페미니스트 영화에 돈 쓸 준비가 됐다(I’m Ready to Pay For Feminist Films)’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지난달부터 약 한 달간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목표액의 300%(약 743만원)를 벌어들였다.

 

“호응을 예상했어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기이니, 빨리 해야 한다고 동료들을 졸랐죠.” (심보영 프로그램팀장) “텀블벅 펀딩이 약 5일 만에 목표액 100%를 돌파하는 걸 보고 깨달았어요. 다들 여성영화에 목말랐구나.” (우지영 홍보팀장) 

퍼플레이는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팀으로 선정돼 지난 6개월 이내에 정부 지원금 총 3000만원을 받았다. 이제 걸음마를 뗀 스타트업이지만, 비즈니스 모델의 사회적 가치와 잠재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다른 창업팀은 평균 2400만원을 받았다. 퍼플레이는 많은 준비를 했고, 활동 내용에 따라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육성사업을 위탁 운영하는 (사)여성이만드는일과미래 측의 설명이다. 

퍼플레이를 만드는 이들은 공무원, 성소수자 단체 활동가, 홍보대행사 직원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12년 지기 친구 6명이다. 모두 페미니스트로, 생업을 두고 시간을 쪼개어 전례 없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퀴어영화제 사무국장 출신인 조일지 씨가 대표다.

 

지난 5월 13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제17회 여성마라톤대회’에
 참여한 ‘퍼플레이’ 멤버들. ⓒ퍼플레이 제공
지난 5월 13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제17회 여성마라톤대회’에 참여한 ‘퍼플레이’ 멤버들. ⓒ퍼플레이 제공

시작은 소박했다. “회사 다니기 싫다. 불합리한 일들을 참으면서 일하려니 자아분열이 온다. 우리가 원하는 일터를 만들어서 재미있게 살아보자. 이런 얘기를 하다가 만들게 됐지요.” 왜 영화일까. “가장 일상적인 콘텐츠인 영화에 주목했습니다. 한국처럼 사람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보는 나라는 드물어요. 다양한 영화에 관한 관심과 갈증도 높고요.”(조 대표)

페미니스트 관객으로서 기존의 상업 영화에 느끼는 불편함과 아쉬움도 컸다. “여성 악당을 내세웠으나 알고보면 남성 없이 움직이지 않는 뻔한 여성 캐릭터, 뻔한 스토리에 실망했죠.” (우 팀장) “모든 영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를 필요는 없지만 너무 치우쳐져 있어요. 여성은 늘 주변적인 인물로 소모되죠.” (심 팀장) .“영화제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영화를 봤어요. 여성은 성적으로 대상화되거나 과도하게 순수한 존재로 그려지기 일쑤죠. 모두가 젠더를 떠나 편하게 즐길 만한 영화를 소개하고 싶었어요.” (조 대표)

여성영화를 모으는 작업은 만만치 않다. 영화제 관계자, 배급사, 감독들을 하나하나 만나서 상의해 영화를 가져오고 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영화를 최대한 많이 발굴해 대중에게 소개할 계획이다. “독립영화 감독의 절반이 여성인데,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여성감독이 연출하는 영화는 흥행이 안 된다는 편견 때문에 제작투자가 잘 이뤄지지 않아요.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드는 분들이 많죠. 이런 여성 감독들, 여성 영화학도들의 작품을 선보일 창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심 팀장)

여성영화를 어떻게 정의할지, 어떻게 소개할지를 두고 퍼플레이 멤버들은 오랫동안 토론했다. 작품 분류 방식도 독특하다. 로맨스, 액션, 호러 등 장르가 아니라 몸, 가정, 일터, 폭력 등 주제별로 작품을 나눠 소개하기로 했다. “관객들이 별점과 댓글을 통해 이게 왜 여성영화인지, 어떻게 감상했는지 이야기하는 장이 됐으면 좋겠어요.”(조 대표) 국내 영화의 경우, 제작에 참여한 스탭의 명단도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할 계획이다. 여성 영화인들이 퍼플레이를 통해 직접 돈을 벌 수 있도록 개별 콘텐츠에 수익을 지급하는 구조도 고려 중이다.  

여성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한국보다 먼저 발달한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업 모델이다. “우리가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도 아닌데, 대체 뭘 안다고 영화 앱을 만드나? 이런 반응도 있어요. 하지만 오히려 잘 모르니까 대담하게 시작할 수 있었죠. 저희의 멘토들은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아무것도 못 한다. 일단 저지르고 3년만 버텨라’고 하셨어요.” (조 대표) “많은 영화계 관계자들이 ‘너무 좋은 아이디어다’, ‘잘 됐으면 좋겠다’며 응원해 주시고 힘이 되어 주고 계세요.” (우 팀장)  

 

퍼플레이는 매달 다양한 주제를 정해 여성영화 상영회를 열고 있다. ⓒ퍼플레이 제공
퍼플레이는 매달 다양한 주제를 정해 여성영화 상영회를 열고 있다. ⓒ퍼플레이 제공

전 세계적으로 영화계 내 소수자인 여성들이 점점 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왜 더 많은 이들이 여성영화에 주목해야 할까?

“영상은 강력한 매체예요. 영화의 세계관, 작품에 깔린 성별 고정관념 등은 관객에게 큰 영향을 미치죠. 우리는 여성영화를 통해 다양한 여성상, 평등의 가치,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확산될 것을 믿습니다.” (심 팀장) “여성영화를 따로 분류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 때까지, 쉽고 빠르게 여성영화를 만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겠습니다.” (조 대표) “좋은 여성영화를 소장하고 계신 감독님들은 저희에게 연락 좀 주세요.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함께 하고, 돈도 같이 벌어요.” (우 팀장)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