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사회주의 노동으로

빠르게 전환하려 낙태권을

합법화한 소비에트 정부

 

러시아의 혁명세력에게

페미니즘은 일종의 금기

 

러시아 여성들, 동원과 자기실현

경계서 삶의 전략을 모색하다

 

2월 23일 국제여성의날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 시위자들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가족들에게 병사를” “수호자들에게 자유와 평화를”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State Museum of Political History of Russia
2월 23일 국제여성의날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 시위자들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가족들에게 병사를” “수호자들에게 자유와 평화를”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State Museum of Political History of Russia

여성의 권리 증진, 지위 개선 그리고 여타의 억압으로부터 여성해방을 목표로 하는 페미니즘은 러시아에서 매우 역설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계급(class) 모순의 해결이 성(sex) 모순의 해결보다 앞선다는 도그마 앞에서 유보됐던 성평등은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함께 도리어 여성의 부담을 과도하게 늘려 여성들을 이른바 ‘이중의 질곡’으로 들어가게 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혁명의 대의 향해 나아가다

또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더 이상 여성문제가 없다고 선포되던 시기에 여성조직운동의 기반이었던 여성부가 폐지됐다. 소련시대 내내 금기시된 페미니즘은 1979년 ‘사미즈다트’ 반체제 운동의 틀 안에서 다시 태어났으며, 소련 해체 후 활기를 얻었다. 예컨대 1998년 러시아 법무부에 등록된 여성단체가 600개가 넘을 정도로 풀뿌리 여성조직이 생겨났다.

러시아 페미니즘의 역사는 여성해방에 대한 편견과 오해, 여성에 대한 전통적 태도 그리고 당-국가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여성들을 호명해온 과정을 확인하게 해줄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처한 정치사회적 조건과 맥락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전략을 찾고 변화를 이끈 강인한 러시아 여성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러시아 페미니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단일한 하나의 모습이 아니었으며, 역사의 변곡점마다 매우 다르게 변화했던 상황을 살펴보는 작업은 유의미하다.

19세기 중엽 러시아 사회개혁을 둘러싸고 전개된 지식계층의 논의 안에서 여성해방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를 때, 일단의 귀족 출신 여성들이 박애주의 모임과 상호부조회를 토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성의 교육권,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비롯해 여성참정권을 주장한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지향성과 이념은 러시아에서 지지기반이 허약한 자유주의에 그 토대를 뒀다.

1870∼80년대에는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사회주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 여주인공 베라와 같은 여성들이 러시아 사회에 등장했다. 어떤 이들은 위장결혼을 통해 가족을 떠나 독립을 얻었고 성장의 발판으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전제정의 억압 밑에서 고통을 겪는 민중에 대해 엄청난 부채 의식을 지니고 민중 속으로(v narod) 들어갔으며 러시아 사회주의의 한 갈래인 인민주의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테러단체 ‘인민의 의지’를 이끌고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참여한 혁명가의 전형 소피야 페롭스카야와 베라 피그네르 그리고 트레포프 사령관 암살을 시도하고 멘셰비키로 전향한 베라 자술리치 등의 여성혁명가들은 그러한 여성들의 빛나는 전형이었지만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것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이네사 아르만드는 국가주도의 산업화 정책에 의해 새롭게 출현한 여성노동자 계급을 주시하고 마르크스주의 이념에 기초한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 속에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여성해방을 “늙은 부인네들의 넌센스”라고 폄하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우에서 보듯 가장 진보적인 독일사민당은 물론이고 러시아의 혁명세력에게 페미니즘은 일종의 금기였다.

 

붉은 옷을 입은 여성이 망치를 들고 뒷편의 도서관, 어머니의집, 여성노동자클럽, 탁아소 등을 가리키는 포스터.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여성들을 대상으로 전시회와 토론회, 포스터 제작이 이뤄졌고 독자들을 위해 다양한 읽을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radical.ru
붉은 옷을 입은 여성이 망치를 들고 뒷편의 도서관, 어머니의집, 여성노동자클럽, 탁아소 등을 가리키는 포스터.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여성들을 대상으로 전시회와 토론회, 포스터 제작이 이뤄졌고 독자들을 위해 다양한 읽을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radical.ru

전러시아여성대회와 평행선 달려

1차 전러시아여성대회는 페미니즘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성평등권을 위한 로비와 공론화,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 갈라진 여성운동의 규합 등을 목표로 부르주아페미니스트들이 조직한 대회였다.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시청에서 열린 이 대회는 20세기 초 러시아 여성들의 상황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들과 러시아 페미니즘 집단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상호부조회, 여성평등권연맹, 여성진보정당 출신의 여성 1053명과 소수의 남성들이 모인 이 대회의 주요한 기조는 러시아 민주주의 발전의 경로에서 여성과 남성 모든 시민의 책임에 있었다.

한편 콜론타이를 비롯해 사회주의 반대파세력도 이 대회에 참석했으나 콜론타이가 마르크스주의의 틀 안에서 전국여성평의회 설립을 주장하며 대회장을 떠난 후로 그들이 더 이상 부르주아 페미니스트와 함께 할 일은 없었다. 콜론타이는 전통적 사회적 유대를 끊게 하고 인간해방을 이끌 수 있는 수단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후 1909년에 ‘페미니즘의 사회주의적 기초’에 대한 글을 시작으로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의 결합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저작들을 남겼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시기에 레닌과 같은 의견을 지녔고, 1917년 혁명에서 레닌을 지지했다.

러시아의 구력으로 1917년 2월 23일,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3월 8일 국제여성의날에 섬유노동자들을 비롯해 러시아 여성들은 굶주림을 호소하고 파업 동참과 전쟁 종결을 주장하면서 행진했다.

여성들의 행진은 2월혁명을 촉발했고, 그 결과 300년 이상 존속한 전제정이 붕괴했다. 2월혁명 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에 놀라운 인상을 받은 볼셰비키는 여성에 주목하는 프로그램을 고안했으며, 10월 혁명 이후 나온 여성관련 법령과 젠더정책은 여성들의 삶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줬다. 볼셰비키는 우선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로 여성을 위한 법적, 시민적 평등권, 교육과 직업의 평등권을 공표했다.

곧이어 1918년 혼인과 가족에 관한 새로운 법령을 공표하고 아울러 여성들의 권리 향유를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가사, 육아, 모성보호 관련 사회 서비스 정책을 고안했으며, 1919년 중앙집행위 산하에 독자적인 여성부의 설립은 여성해방을 둘러싼 오랜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성별 차이 고려 안한 인민동원

볼셰비키에게 이는 여성의 종속을 벗어나게 하는 1차적 조치로, 진정한 여성해방은 오직 사회주의혁명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 여성평등권은 ‘전제조건’이 있음을 의미했다. 즉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여성들의 참여와 동원을 연결시키는 프레임은 신생소비에트국가 수립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는 레닌을 포함해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사항이다.

레닌의 언명을 살펴보자.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시작된 이 일은 수백 명의 여성이 아니라 러시아 전역에 걸쳐 수백 만 명의 여성과 수백만 명의 참여가 이뤄질 그 때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사회주의 건설 작업이 확실히 향상될 것이다.”

이는 여성평등권 달성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 한편으로 여성들의 해방과 평등을 공식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을 다양한 산업 영역으로 동원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전쟁, 혁명, 내전 등 엄청난 변화 속에서 조속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 전통적 성별 분업을 폐지하고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사회적 노동력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소비에트정부에 매우 중요했다.

스탈린 체제 아래서 여성의 경제적 동원은 절체절명의 문제였다. 급속한 농업집단화, 공업화정책은 여성의 참여 없이 불가능했다. 스탈린은 여성의 경제 자립을 선언하면서 농민여성에게까지 그 대상을 넓혔다. 이에 따라 남성과 평등하게(?) 여성농민에게도 노동일이 부과돼 성별 차이는 더 이상 고려되지 않았고 여성들에게 과도한 노동 부담을 지울 수 있었다.

소비에트 젠더정책의 첫 번째 요강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노동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요강은 여성의 ‘사회적 의무’로 ‘어머니 되기(materinstvo)’에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여성을 사회주의적 노동으로 빠르게 전환하기 위해 낙태권을 합법화했으며, 혼인과 가족에 관한 법은 법률적 효력이 간편한 시민결혼을 정당화했다.

특히 제정러시아시대에 불결한 환경에서 무면허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불법적인 낙태 시술은 여성들에게 영구 불임과 수많은 질병으로 고통 받게 한 최대의 문제였다. 이제 무료로 행해지는 안전한 낙태권은 사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될 때 어떤 진전이 있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가 된다.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매우 앞선 것이었다. 공동식당, 공동탁아소, 공동세탁장 같은 혁명 초기의 실험들이 온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스탈린 보수반동적 정책이 도입됐다. 우리는 1936년에서 1944년까지 낙태 금지가 다시 도입됐고, 결혼의 의무적 등록 그리고 위자료 미납에 대한 형사 책임이 채택됐음을 알고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의 전시 체제는 교육 개혁을 가속화해 1943년부터 1954년까지 청소년들의 남녀공학은 사라졌다. 학교는 사병을 준비시키고, 병사를 낳을 어머니를 준비시키는 장소가 됐다. 여성의 낙태권은 스탈린이 사망한 지 2년 후 1955년에 다시 주어졌다.

 

“부엌의 노예제를 타도하라”는 내용을 담은 포스터. 혁명은 여성을 부엌에서 해방시킨다. 문 밖으로 공동식당 등이 보이고, 여성들은 여가 시간에 공놀이를 즐긴다. ⓒradical.ru
“부엌의 노예제를 타도하라”는 내용을 담은 포스터. 혁명은 여성을 부엌에서 해방시킨다. 문 밖으로 공동식당 등이 보이고, 여성들은 여가 시간에 공놀이를 즐긴다. ⓒradical.ru

사미즈다트 운동과 페미니즘 부활

1979년 반체제 운동의 틀 안에서 페미니즘운동이 부활했다. 사미즈다트 운동세력은 『여성과 러시아』 연감에 대한 출판을 준비하면서, 소련에서 ‘여성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연감이 출간되자마자 편집자 타티야나 고리체바, 나탈리야 말라홉스카야, 타티야나 마모노바는 KGB에 체포되고 이민을 강요받았다. 다른 저자들은 자녀들을 빼앗긴다는 위협을 받고 자신이 ‘반소련분자’라고 자백해야만 했다. 그러나 KGB가 계속해서 아래로부터 터져나오는 사회적 균열을 막기는 어려웠다.

한편 기독교페미니즘 기조의 저널 ‘마리야’도 간행됐는데, 전체 6호 가운데 3호가 해외에서 나왔다. 이 잡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적극 반대하고 소련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마리야’ 출간의 토대 위에서 소련 시대에 최초로 페미니스트 단체가 등장했다.

러시아 페미니즘 운동은 소련 해체 후에 새롭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여성 NGO 조직들은 자본주의 이행과정에서 고통을 겪는 여성들을 위해 다양한 안건을 제기하고 있다.

재훈련을 통한 노동시장에서 여성차별 퇴치, 저임금 가족에 대한 지원 등을 비롯해 몇몇 조직은 여성 기업을 발전시키고 지원하기도 한다. 또 정치 분야에 니나 안드레예바, 발레리야 노보드보르스카야, 갈리나 스타로보이토바, 카지미라 프룬스케네 등이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993년 12월 러시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바 있는데, 정당 ‘러시아 여성들’은 8.13%의 투표율을 얻어 두마에서 진영을 형성했다. 모스크바 젠더연구센터에 따르면 1993년 선거블록 후보 명부에서 여성이 7%를 차지하고 1995년에는 이미 14%가 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매우 희망적인 전조로 비쳐지고 있다.

러시아 페미니즘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결론을 들려준다. 여성에 대한 혐오나 편견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성평등에 기초한 시민사회는 법령과 칙령으로 도입되지 않는다는 것. 페미니즘 운동의 실천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2000년 이후 푸틴정부 하에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에 맞서 2011년부터 2016년까지 페미니스트 공동체 네트워크는 낙태권 보장을 포함해 다양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페미니즘의 기치 위에서 러시아 여성들이 깨어나고 있으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승리의광장에 있는 기념비. 조국 수호를 위한 여성들의 기여와 공헌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계형
상트 페테르부르크 승리의광장에 있는 기념비. 조국 수호를 위한 여성들의 기여와 공헌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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