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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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평등 심어주기’ 내 삶은 노둣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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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딸 그리고 우리의 딸들이 가부장제에 희생되는 비극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도록 오늘도 나는 여성운동을 합니다”라고 말하는 대구여성회 김은희 회장(42).



그는 아이가 셋이다. 위로 딸 둘에 아래로 막내아들 하나. 종가집 맏며느리라는 자리에서 딸만 둘을 둔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그의 시어머니는 딸 하나 낳고 6년 동안 아들 없는 서러움을 톡톡히 치른 분이셨다. 그런데도 김회장의 남편을 낳고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는 얘기를 무용담처럼 하며 김회장에게 아들낳기를 강요했다.



“시어머니와의 긴 전쟁이였죠. 결국 아들을 낳긴 했지만 패배감과 굴욕감에 견딜 수가 없었어요. 잘못된 관습이 그대로 답습되어 나에게 강요된 데 대해 분노했죠. 내 윗대의 여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나. 그렇게 원망 아닌 원망을 하면서 내 딸들에겐 절대로 이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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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곤과 폭력 추방을 위한 여성 대행진.



12년 교직생활 접고 대구여성회 활동



결혼하면서 김회장은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남녀불평등 문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삶은 없고 한 집안의 며느리일 뿐인 자신을 발견한다.



시골에서 교직생활을 하던 그는 학생들에게 남녀평등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애썼다. 그는 여성도 당당하게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해 주며 교과서가 다 가르쳐 주지 못하는 올바른 인식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천직으로 알고 충실했던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친다.



“두 딸을 친정어머니가 봐 주셨는데 셋째 낳기 전에 친정어머니가 암 수술을 받으셨어요. 아이들을 맡길 형편이 안되었죠. 시어머니께서 봐주신다고는 했지만 맘이 불편하더라구요.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버는 돈도 시집에 속하는 것이라며 친정 어머니 용돈 드리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렇지만 친정에서 아이들 봐 주는 것은 또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셨던 분이니 제가 맘 편히 아이들을 맡길 수가 없었죠.”



당시 그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결코 해소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부장적인 사회문화가 사라지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만든다면 지금처럼 고부갈등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김회장은 12년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대구여성회에 동참한다. 이 사회 속에서 여자로 살면서 벼랑 끝까지 왔던 그에게 여성운동은 하나의 외침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들에게 ‘반쪽 삶, 분노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행사장, 토론장으로 바쁘게 뛰어 다녔다. 그것은 ‘나의 권리, 내 딸의 권리, 우리 모든 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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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여성회 실무진들과 함께(가운데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김회장).



‘반쪽 삶, 분노의 삶’ 물려주고 싶지않아



1988년에 창립한 대구여성회는 창립 초부터 중반까지 성폭력, 가정폭력, 부당해고 문제 등 여성과 관련된 모든 상담활동을 했다. 또 IMF이후부터는 ‘실업극복여성지원센터’를 개설하여 여성실직가장은 물론 실업 여성과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다.



“여성문제를 백화점 식으로 해결한다는 비판도 받았어요. 하지만 분야별 전문성을 가진 여성단체가 없었기에 모든 문제를 다 떠 안고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요즘은 전문성을 띤 단체들이 나오고 있어 다행이죠.”



대구여성회는 대구여성의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소가 개설되면서 여성노동자고충상담활동에 집중하게 됐다. 그리고 95년부터 맡아 왔던 정신대 할머니 문제도 ‘정신대 시민모임’으로 넘겼다. 또한 얼마 전 사무실을 새로 연 여성장애인연대 소식은 김회장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총선시민연대활동 이후 지역에서도 여성연합이 사회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적극 동참하게 됐다. 그런데 시민단체 내에서도 여성단체들을 여느 단체로서의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어 바라보고 있는 것이 김회장에게는 매우 안타깝다. “대표 중에도 구색 맞추기 정도로 여성을 끼워 주는 듯한 일들도 있어 속상해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활동을 하며 그가 절실히 느끼는 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민주나 정치참여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내지만 성추행 문제처럼 성과 관련된 여성인권문제가 터지면 “여성계가 할 일이다”라고 침묵하고 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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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현장 경산 폐코발트 광산에서 합동위령제.



구색맞추기로 여성 끼워주는 일 거부



“일반인들의 이해부족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분들조차 심지어는 같은 여성들도 여성이 성폭행을 유발시켰다고 공공연히 말해요. 그런데 그건 성폭행사건의 피해자들이 사건이 알려진 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하는 얘기죠”라며 직장내 성폭행 사건 후 해결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피해여성이 직장에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작년에 경북대 이충섭 교수 제자 성폭행 사건의 경우를 봐요. 합의는 됐지만 그 여학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대구를 떠났어요.” 결국 표피적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성범죄에 대해 일반화된 그릇된 시각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것에 책임을 느끼고 반성을 하게 된다”며 “여성의식전환과 성범죄를 바라보는 시각교정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한때 이런 김회장도 불평등에 부딪쳐 체념하고 안주했던 시절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체념하지 않고 잘못된 불합리함을 깨 나가기 위해 남녀차별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그는 여성들이 여성문제에 대한 시각을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문제로 확장시키길 바란다. 그래서 사회 전반의 왜곡된 부분들을 바꾸기 위해 여성들이 동참하는 더 넓은 정치적 활동을 강조한다. 남녀평등, 여성인권운동을 하면서 그는 삶의 숙제들이 하나하나 풀려나가고 있는 듯 신이 난다고 한다.



“학교를 그만둘 즈음에 꿈을 꾸었어요. 노둣돌이란 단어에 대해 설명하는 꿈인데 전 그 단어 뜻도 몰랐어요. 사전을 보니 ‘말을 타거나 내릴 때 발돋움으로 쓰던 돌’이래요. 그 꿈의 의미가 일년 후에야 절실히 다가왔죠. 이제는 꽃을 피우는 일보다 노둣돌로 살아가는 것이 내 역할이라는 생각을 해요.”



권은주 경북통신원



김은희 회장 약력

1982년 대구카톨릭대 국문과졸

1982∼1994년 중등학교 국어교사

1995∼1996년 대구여성회내 ‘올바른 소비활동을 위한 주부모임’모임장

1997년 대구여성회부 회장

1999∼현재 대구여성회 회장

1999∼현재 대구시실업대책위원회 위원

2000∼현재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를 위한 연대 상임대표.

대구·경북여성연합단체연합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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