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섭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이 6월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일자리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무역업계 일자리위원회와의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이용섭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이 6월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일자리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무역업계 일자리위원회와의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새 정부서 의욕적으로 출범한

일자리위에 여성 위원 3명뿐

구색 맞추기? 여성이 ‘토큰’인가

『양성평등기본법』 21조 2항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위원회를 구성할 때 위촉직 위원의 경우에는 특정성별이 위촉직 위원 수의 10분의 6을 초과하지 아니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항은 다만 “해당 분야 특정성별의 전문 인력 부족 등 부득이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어 실무위원회의 의결을 거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

잘 알려진 조항을 길게 인용하는 이유는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서 별다른 느낌도 주지 못하는 이 조항이 현실의 누군가에는 매우 불편한 주장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현실의 누군가’에는 여러 집단이 있겠지만, 중앙과 지방 정부의 공직자 중 상당수가 포함될 것이다.

그 증거가 새 정부에서 출범한 일자리위원회다. 누가 어떤 과정을 통해 구성했는지 필자의 능력으로서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간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보도를 통해 새 정부의 첫 번째 주요 사업이 일자리 창출이고 여기서 핵심적 역할을 해낼 기구가 일자리위원회라는 것 정도는 안다. 첫 사업뿐이랴? 문재인 정부 5년 내내 일자리 문제는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고 위원회의 사명도 늘어나면 늘었지, 줄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일자리위원회는 우리―여기서 ‘우리’라 함은 여성의 노동조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여성신문 독자들을 가리킨다―의 기대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것이 중론이다. 신문에 실린 위원 임명장 수여식 사진은 우리가 늘 보아왔던, 식상할 만큼 식상한 여느 위원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저런 직함을 가진 단체와 기관의 남성 대표자들 사이 고작 세 명의 여성이 끼여 있는 사진에서 과거 무수한 비판을 받았던 ‘토크니즘(Tokenism)―소수자를 배제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한 두 명의 소수자를 끼워 넣는 행위―’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근심일까?

이유는 있을 것이다. 일자리위원회라는 것이 노사정 대표자들의 협의체니만큼 각 기관에서 파견한 분을 위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는 정부의 ‘고충’도 있고, 성별 비율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긴급하고 중대한 사안’이어서 일단 조직부터 하고 보겠다는 열정의 소산일 수도 있다. 또 법의 예외규정처럼 여성 전문가들을 찾기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현실타협주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그 어떤 이유도 납득할 만한 해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사정 대표자들을 위촉한다면, 해당기관에 성별 구성요건에 관한 법령 준수를 요청했어야 한다. 각 기관에서 위원을 선정할 때 성비 요건을 충족할 수 있도록 감독하는 것이 중앙정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또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여성과 같은 소수집단의 목소리가 정책결정과정의 첫 자락부터 적절히 반영돼야 한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더욱이 여성 전문가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도 자명하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발표한 성명서가 그 증거다.

“한국에는 세계 수준의 법이 있지만 지키지 않아 실효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필자는 한국의 법이 세계 수준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나마 있는 법도 지키지 않는 현실은 또 다른 질문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법을 지키지 않는가?” 이 질문의 대답 중 ‘국가’가 포함돼 있다면, 그것도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 있다면 좀 슬프지 않은가?

한나 아렌트는 민주주의는 ‘책임의 나눔(sharing of responsibility)’에서 시작된다고 썼다. 인간의 취약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각자의 생존을 위한 책임을 함께 나누고 짊어져야 하며, 그것이 곧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 속에서만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임을 나눠야 할 의무는 국가에도 있다. 새 정부가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려면 지키기 힘든 법부터 스스로 지켜나가야 한다. 그것이 책임을 나누는 진정한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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