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주여성 위한 한국어 교재서

여성은 살림 도맡는 존재로 그려

성별 고정관념 조장·편견 강화 

 

 

정부기관이 발간한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어 교재가 여성을 가사노동 영역에 한정된 존재로 묘사해 성역할 고정관념을 조장하고, 이주여성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는 논란을 낳고 있다.

2010년 국립국어원이 펴낸 『결혼이민자와 함께하는 한국어 1·2』는 결혼이주여성이 일상에서 겪을만한 상황을 설정하고, 각 장마다 예문을 통해 한국어를 익힐 수 있도록 했다.

교재에는 필리핀 여성 흐엉과 수잔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예문에서 가사노동은 대개 결혼이주여성의 몫인 것처럼 묘사된다. 이는 교재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다. 1편 △8과 배추는 얼마예요? △14과 이제 한국 음식을 만들 수 있어요 △20과 과일 좀 드시면서 보세요, 2편 △3과 총각김치는 담글 줄 몰라요 △11과 살림을 하면서 배우게 됐어 △12과 매운탕을 끓이고 있어 △17과 프라이팬을 세게 닦지 마 등이다.

 

‘결혼이민자와 함께하는 한국어’ 교재에 속한 2편 3과 ‘총각김치는 담글 줄 몰라요’와 11과 ‘살림을 하면서 배우게 됐어’ ⓒ‘결혼이민자와 함께하는 한국어’ 교재 캡처
‘결혼이민자와 함께하는 한국어’ 교재에 속한 2편 3과 ‘총각김치는 담글 줄 몰라요’와 11과 ‘살림을 하면서 배우게 됐어’ ⓒ‘결혼이민자와 함께하는 한국어’ 교재 캡처

2편 11과 ‘살림을 하면서 배우게 됐어’에서는 두 이주 여성이 ‘어떻게 하면 살림을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흐엉은 “언니는 요리를 정말 잘하는 것 같다. 나는 음식을 잘 못해서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이에 수잔은 “나도 요리를 전혀 못했다. 힘들고 어려웠다”며 “살림을 하면서 천천히 배우게 됐다. 좀 더 살아봐라. 그러면 (너도) 잘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2편 3과 ‘총각김치는 담글 줄 몰라요’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오늘 총각김치 좀 담그라”고 말한다. 이에 결혼이주여성 흐엉은 “총각김치는 담글 줄 모른다”고 말하고, 시어머니는 “총각김치는 처음이지? 먼저 양념과 새우젓을 준비하고, 여기 있는 총각무를 다듬어서 깨끗이 씻으라”고 지시한다.

또 이들의 일상은 대부분 남편 혹은 남편의 가족 위주로 돌아간다. 1편 △4과 남편은 무엇을 해요? △6과 남편 생일이에요, 2편 △5과 아이들은 산보다 바다를 좋아할 것 같아요 △7과 아버님 선물로 모자는 어때요? 등의 내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편의 ‘20과 과일 좀 드시면서 보세요’에선 시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시청하고, 며느리는 90도로 허리를 숙인 채 과일을 바친다. ⓒ‘결혼이민자와 함께하는 한국어’ 교재 캡처
1편의 ‘20과 과일 좀 드시면서 보세요’에선 시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시청하고, 며느리는 90도로 허리를 숙인 채 과일을 바친다. ⓒ‘결혼이민자와 함께하는 한국어’ 교재 캡처

예문에 사용된 삽화도 문제로 지적된다. 특히 1편의 ‘20과 과일 좀 드시면서 보세요’에선 시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시청하고, 며느리는 90도로 허리를 숙인 채 과일을 바친다. 대화도 가사노동과 관련된 내용에 머물러있다. “내일 아침 뭐 먹지?”라는 시어머니의 질문에 며느리는 “미역국이나 콩나물국으로 할까요?”라고 답한다. 이에 시어머니는 아들의 취향에 맞춰 밥상을 차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아범이 미역국을 좋아하지?”라고 말한다. 시어머니의 말에 며느리는 “(아침을) 미역국으로 하겠다”고 답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닌, 고용인과 가사도우미의 대화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내용이다. 외국인의 눈에는 ‘노예’로 보일 정도다.

온라인 서점에 기재돼있는, 해당 교재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여성결혼이민자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학습해 한국의 일상·사회생활에 적응하고, 한국사회 구성원들과 원활하게 의사소통 하도록 하며, 자녀교육과 직장생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교재를 들여다보면 실상은 매우 다르다. 실제 내용은 ‘자녀교육과 직장생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보다는 ‘아내·엄마·며느리로서 해내야 하는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혼이주여성은 직장이나 마을 등에서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가족 또는 친척관계에서 편견과 차별을 경험하기도 한다. 따라서 가정 내부의 문제인식과 변화가 시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충남여성정책개발원이 지난 3월 발표한 ‘충남 결혼이주여성 생활 실태와 정책방향’이라는 주제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배우자의 가족이나 친척관계에서 차별을 경험한 결혼이주여성은 전체 응답자의 28.2%에 달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관계자는 “우리사회는 결혼이주여성을 한 시민으로, 이 사회에 정착할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한국사회가 이주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어떻게 이 교재가 만들어지게 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재에서 결혼이주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며 “결혼이주여성을 그런 식으로(가사노동을 도맡아 하는 이로) 바라보기 때문에 교재도 그렇게 나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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