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대학로서 ‘2017 청년포럼, 문화·예술이 젠더를 묻다’ 열려

​여성예술인연대(AWA) 유재인 작가

‘방송작가유니온’ 황민주 작가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

‘찍는페미’ 연홍 감독 등 강연

 

 

‘성평등’은 우리 시대의 질문이다. 연이은 젠더 불평등과 부조리 고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문화예술계라면 더더욱 피할 수 없는 문제제기다.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이해관계도, 처지도 제각각인 문화예술인들이 어떻게 변화를 위해 연대할 수 있을까?

18일 서울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열린 ‘2017 청년포럼, 문화·예술이 젠더를 묻다’는 이 문제를 논의하는 장이자, 여성연대의 한 출발점이었다. 래퍼, 방송작가, 영화감독, 예술가 등 다양한 여성 문화예술분야 종사자들과 청중 150여 명이 모였다. 사전 참가 신청이 사흘 만에 마감될 정도로 큰 기대를 모았다. 참석자들은 방송, 시각예술, 영화, 음악 등 분야의 생생한 불평등 사례를 공유했다. 개개인의 성찰과 용기가 변화의 불꽃이 되려면 더 큰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 이날 모인 이들은 성평등한 문화예술계, 성평등 사회의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으자고 제언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여성예술인연대(AWA)의 유재인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예술인연대(AWA)의 유재인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해 말 한국 사회를 뒤흔든 ‘#○○_내_성폭력’ 말하기 운동은 예술인들의 자성과 연대의 계기가 됐다. 여성예술인연대(AWA)의 유재인 작가는 이날 포럼에서 “서로 알지도 못하고 당장 먹고살기 바쁘던” 여성 예술인들이 어떻게 한목소리로 성평등을 외치게 됐는지 설명했다. 

지난해 10월, 국립현대미술관 모 큐레이터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됐다. 예술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미술관에 민원을 제기했고, 큐레이터는 결국 사임했다. “한번 구르기 시작한 돌멩이는 커다란 눈덩이”가 됐다. 12월25일, 이들은 ‘여성예술인연대’의 이름으로 ‘예술계_내_성폭력 성명서’를 발표했다. 서명엔 2000명 이상이 동참했다. 목표는 정책적 변화다. 올해 1월과 5월 국회에서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주제로 두 차례 토론회를 열었다. 교육부, 여성가족부와 만나 구체적인 개선 요구안을 전달했다. 

연대의 동력으로 그는 “여성 예술인들의 우정”을 꼽았다. “생업과 작품 활동도 겸하려니 바쁘지만, 서로 시간을 쪼개 나눠 해나가고 있습니다. 같은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면서 끈끈해지는 과정엔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은 지난 3월4일 ‘세계여성의날 행진’에 참여했고, 4월4일엔 여성단체연합과 만나며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다. 

방송작가=여성이 하기 좋은 일? 글쎄요

 

‘방송작가유니온’의 황민주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방송작가유니온’의 황민주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드라마와 예능 현장에 ‘카메오’처럼 출연하는 사람들.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고, 일과 삶의 균형을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는 선망의 직업. 실제 방송작가의 삶도 그럴까? ‘방송작가유니온’의 황민주 작가는 “누구든 자유로이 제약 없이 일을 시키는 존재, 언제든 자유로이 자를 수 있는 존재”에 더 가깝다고 했다. 60시간에 육박하는 주당 평균 노동시간(현재 근로기준법상 주당 최대 노동시간은 52시간), PD의 말 한마디에 당장 잘릴 수 있다는 불안감, 비일비재한 성폭력이 그들의 현주소다. 방송작가의 90% 이상이 여성이다. 

이렇게 버는 돈은 터무니없이 적다. 막내 작가 10명 중 7명은 월급 100~150만원을 받는다. 세전 액수다. 내 급여도, 월급날도 모른 채 구두계약을 맺는 게 다반사다. 황 작가도 3년째 한 번도 계약서를 쓰지 못했다. 4대보험에 가입한 방송작가도 소수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더 불합리한 대우로 이어지기도 한다. 막내 작가 시절, 황 작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분장팀 대신 출연자의 분장을 떠맡았다가 결과물이 어색하다는 이유로 꾸중을 들었다. “야, 막내. 여자가 돼서 화장 하나 제대로 못 해줘? 너 여자 맞아?” 일반적으로 비품 구매, 점심 주문, 간식 챙기기 등 모든 잡일을 막내 작가가 떠맡는데, “남자가 들어온다면 그런 일을 시킬 수 없다는 인식”도 존재한다. “제작팀과 작가팀의 연봉 차이를 비교해 보면 여성이 더 많은 작가군의 주급이 더 낮게 책정됐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지난해 출범한 ‘방송작가 유니온’은 이렇게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려온 여성들이 함께 뭉쳐 만든 방송작가 노조 준비 모임이다. 지난해 황 작가는 “같이 싸워주시지 않아도 좋다. 여성들이 모여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고, 힘내라고 해 달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여혐 없이도 힙합 할 수 있다

 

래퍼 슬릭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래퍼 슬릭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긴 아직도 기집애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 (내가) 지금부터 이 바닥의 제대로 된 HELL OF **** FEMINIST.” 이 랩으로 혜성처럼 떠오른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도 이날 연단에 섰다. 

‘미스 박’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 등 여성혐오가 녹아든 가사들 가운데, 여성을 향한 차별과 폭력에 맞서고, 여성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슬릭의 랩은 단연 눈에 띈다. “사랑 노래를 만들 때도 가부장적이고 ‘언피시’한 노랫말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가부장제, 여성혐오적 요소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반성하려 한다”고 했다. 

그는 상투적인 ‘여자 래퍼’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그것이 “여성혐오 프레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여성’의 이미지와,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 요소를 ‘스웩(swag)’이라며 과시하고 경쟁자들에게 싸움을 거는 ‘래퍼’의 이미지를 빈약한 상상력으로 결합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서슴없이 비판한다. ‘여자 래퍼’라는 수식어의 한계도 지적했다. “그저 제 생각을 음악으로 표현할 뿐인데, 그게 ‘여성’ 꼬리표를 달고 소비되죠. 발전적 논의를 가로막아요.”

안티들의 공격도 만만찮다. 슬릭은 “페미니스트는 테러리스트라고 하더라. 힙합 씬에서 제 이름은 입에 담아선 안 될 ‘볼드모트’가 됐다”고 쓰게 웃으면서도, “저는 앞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됐다. 그런 사람이 해야 할 말을 하기로 했다”고 담담히 말해 박수를 받았다. “제 음악이 여러분께 ‘내가 나로 살아도 괜찮구나’라는 심심한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그 많던 여성 영화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영화감독 ‘연홍’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영화감독 ‘연홍’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영화계 내 성차별이 정말 있느냐는 분들께 묻습니다. 여성 영화감독의 이름을 얼마나 말할 수 있나요?” ‘연홍’(익명) 감독의 질문에 청중은 일순 동요했다. “2016년 기준 여성 감독은 11.6%에 불과합니다. 그 많던 영화학과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지난해 10월 #영화계_내_성폭력 말하기 운동의 여파로 만들어진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페미’는 “영화계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왔다. 연홍 감독은 영화계 내 성차별·성폭력 문제의 핵심에는 “공고한 남성 카르텔”이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 영화인들은 전문성을 무시당한 채 ‘꽃’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작품을 둘러싼 의사 결정과 논의 과정에서도 소외됐고, 존엄성을 침해당해왔습니다.” 

그는 “성평등한 노동환경, 여성 영화인 양성, 여성 영화 제작·투자·상영 확대 등을 통해 영화계 내 여성들의 자리가 더 많이 생겨나야 한다”고 했다. 해외 모범 사례도 소개했다. 영화제작 지원 시 남녀 감독 쿼터제를 도입하고, 이로써 여성 감독 비율을 40% 이상으로 끌어올린 스웨덴, 여성 인력 중심 영화 제작 지원에 나선 노르웨이, 영화 현장 노동자도 일반 직장인과 동등한 ‘노동자’로 인정하는 프랑스, 영화 노출 장면 촬영 시 특수 계약서를 필수 작성하고 불이행 시 규제하는 미국 등이다. 

그 첫걸음은 “영화 속 다양한 여성 캐릭터, 여성의 시각이 반영된 시나리오가 더 많아지는 일”이다. 연홍 감독은 “영화 속 성차별은 없는지 비판적으로 감상하는 일”부터 시작해보라고 권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몰입하게 만드는 게 영화잖아요. 성적 대상화, 여성혐오 없이 다양한 여성, ‘여성’과 ‘남성’ 이분법 밖 소수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영화가 늘어난다면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겠죠.”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