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이 움직일 최소한의 명분

여당이 줘야 협치가 가능하다

 

문 대통령, 내각 인선 과정서

5대 공직 배제 기준 못 지킨 것 

사과하고 재발 방지책 제시해야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후 청와대 충무실에서 김상조 신임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후 청와대 충무실에서 김상조 신임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정국이 급랭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인사 청문 보고서 채택 없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임명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경제 민주주의의 새 기조를 만들어야 할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김 위원장을 임명하게 됐다”고 밝혔다.

물론 김 위원장 임명은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 국회가 정부의 인사 청문 요청 이후 20일 이내 청문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일정 기간(10일 이내)을 정해 청문 보고서를 요청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국회에 12일까지 보고서를 보내달라고 했으나 야3당이 거부하자 하루 뒤 전격적으로 김 위원장을 임명했다. 여하튼 문 대통령은 내각 인사에 대한 야당의 반대가 ‘흠집내기’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청와대에서 김 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인사청문회 과정이 자질과 능력, 정책적인 지향을 검증하기보다 흠집내기식으로 하니까 특별한 흠결이 없어도 인사청문회 과정이 싫다고 고사한 분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 것 때문에 폭넓은 인사에 장애가 있다”고 언급한데서 잘 드러난다.

야3당은 즉각 반발했다.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협치 포기 선언”이라면서 “국민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독선·독주 정권이 더 이상 협치를 입에 올리거나 야당의 협력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신환 바른정당 대변인은 “소통과 협치를 하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불통과 독재로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의당도 “문재인 대통령이 말하는 협치와 야당이 말하는 협치가 과연 같은 것인지 의문”이라며 “협치는 상대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한데 상대가 무조건 틀렸다고만 하면 협치는 있을 수 없다”고 논평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야당을 국정운영 동반자로 대하는 협치는 원칙적으로 지켜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문재인 정부가 부르짖는 협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끝없이 시작되는 정국 혼란 속에서 ‘문재인표 협치’가 찾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분 한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군림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문 대통령은 추경예산 편성 국회 시정연설에서 “저와 정부도 국회를 존중하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협의해나가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시정연설 다음날 김 위원장 임명을 강행한 것은 대통령이 협치하겠다는 의지가 약해 보이는 것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협치가 가능하다. 협치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인내 없는 협치는 없다. 야당이 다소 못마땅하고 몽니를 부린다고 해도 시간을 갖고 대화하고 설득해야 협치가 살아날 수 있다.

더불어 정치는 명분이다. 야당이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을 여당이 줘야 협치가 가능하다. 가령 문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직접 이번 내각 인선에서 자신이 약속했던 5대 공직 배제 기준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고, 선거 과정에서 했던 약속들을 꼼꼼하게 챙기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내각 구성에서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2기 내각 인선에서는 반드시 국민 눈높이에 맞추겠다고 약속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청문회 정수를 보이고 있는 미국처럼 청와대가 인선에서 검증한 자료들을 국회에 제출해 스스로 검증받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이것 하나만 지켜져도 청와대가 검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부실 검증이 사라질 것이다. 여야 모두 상대방을 비판하기 전에 선천성 상생 결핍증, 집단 기억 상실증, 도덕 불감증과 같은 3대 정치 난치병을 치유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의 이중적 잣대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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