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 선언하면서

불평등한 사회구조 바꾸는 일에

관심두지 않는다면 미사여구일뿐

 

위계적 젠더 이분법의 틈새

발견해 각자 균열 내는 방법뿐

 

3월 4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3.8여성의 날 기념 페미니즘 문화제 ‘페미답게 쭉쭉간다’에서 참가자들이 공연을 보며 환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3월 4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3.8여성의 날 기념 페미니즘 문화제 ‘페미답게 쭉쭉간다’에서 참가자들이 공연을 보며 환호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역의 여성 활동가들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주저한다고 한다. 20~30년간의 긴 활동과정에서 페미니즘을 접하고 자신의 경험을 재해석하며 새로운 생활양식을 모색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그들에게 여전히 무겁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된 페미니스트 선언은 가볍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학 강좌가 폐강되곤 했던 점을 기억한다면 이는 가히 ‘단박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저 없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이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이전에 불편하지 않았던 많은 사건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이전에 당연했다고 생각했던 생각들이 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니 당연히 까칠하고 단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누가 페미니스트이고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즘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소용돌이치는 지금, 지역 활동가들이 가리키는 페미니즘의 무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쉽게 페미니즘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너무도 어렵게 페미니즘에 다가갔던 활동가들의 이유를 한번쯤 반추하는 일은 우리에게 잠시 논쟁의 열을 식힐 수 있는 성찰적 태도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 페미니즘의 무게는 무엇보다도 실천 관련성에서 온다. 누군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면서 정작 성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와 일상을 바꾸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미사여구일 뿐이다. 페미니즘이 그 논리적 정합성만을 추구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현실과 유리된 단순한 담론, 누구도 실천할 수 없는 이상에 집착하는 태도는 현실적 실천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페미니즘의 어려움은 또 기존의 정체성에 기반하면서도 이를 해체해야 한다는 데 있다. 가령 나는 사회가 ‘여성’에 부여한 억압을 경험한다. 나는 바로 이러한 여성 경험에서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러나 나는 억압을 가져왔던 여성으로서의 경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해체할 때에만 해방된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기존의 정체성을 확인하거나 인정받는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그 정체성을 해체하는 실천의 과정이다. 내가 가진 작금의 페미니스트 정체성은 완결판이 아니라 잠정판이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스트의 곤란은 내가 이 세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온다. 지구 밖에서 살지 않는 이상, 사회적 관계를 완전히 벗어난 지점은 없다. 그 누구도 완벽히 여성혐오적인 이 세계의 밖에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우리가 서 있는 맥락은 서로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처한 그 맥락의 내부에서 위계적 젠더 이분법의 틈새를 발견해 균열을 내는 방법뿐이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 논쟁은 누가 더 올바르냐보다 각각의 맥락에 필요한 틈새 만들기의 방식이 무엇이냐에 집중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자신의 입장이 다른 이의 틈새 만들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성매매 대 성노동, 퀴어/비건/급진 페미니즘 등을 둘러싼 논쟁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페미니즘들은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니었을까?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진동하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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