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유별...남성 의사 기피한 여성들 치료 못 받아 죽기도”
“남녀유별...남성 의사 기피한 여성들 치료 못 받아 죽기도”
  • 진주원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17.06.12 16:19
  • 수정 2017-06-20 1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7차 여성사박물관포럼

이배용 (사)역사·여성·미래 이사장 발표

조선시대 의녀부터

한국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까지

 

‘남녀유별’을 절대적 규범으로 따랐던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이 몸이 아파도 남성에게 몸을 보이기 싫어서 치료받지 못한 채 죽어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배용 (사)역사·여성·미래 이사장은 지난 8일 개최된 제7차 여성사박물관포럼에서 기조발표를 통해 근대화 시기 여의사의 출현 배경에는 생명을 일깨우고 살리는 조선시대 의녀의 활동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이 이사장에 따르면 조선시대 의녀들은 관비라는 신분적 제약은 있었지만 의술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당시에 주목받는 여성 전문인으로 부각되었다. 원래 의녀제도는 태종 6년에 설치됐다. 여성들이 내외법으로 인해 병이 나도 남자의사에게 보이기를 꺼려해서 급기야는 생명을 잃는 일이 허다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자의사의 보조역으로 의녀제도를 만들어 제생원에 소속되었다.

비록 신분적으로는 한계가 있었지만 의녀들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지식층이었다. 의녀들은 의술을 닦기 전에 우선 천자문, 효경, 정속편의 한자를 익힌 뒤 산서를 비롯한 의학서와 간병, 침술을 습득했다. 독서와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 성종 대에는 상벌규정까지 만들고,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었다. 게다가 의녀는 인명을 다루기에 의술뿐 아니라 덕을 갖추어야 된다고 하여 기초교양으로 사서를 읽히기도 했다.

처음에 의녀들의 의술활동은 남자의원과 동행하여 특히 여성 환자를 직접 대면하고 증세를 진찰하는 일을 맡아보았으나 종기나 치통같이 직접 여성 환자의 피부를 접촉해야 하는 질병은 의녀가 맡았으며, 해산에 조산원 구실뿐 아니라 맥을 짚고 침을 놓는 일을 의녀들이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스스로 의술을 습득하고 독자적 의술을 개발하여 이름을 날린 의녀도 많았다.

제주도의 장덕이라는 의녀는 치통과 부스럼을 잘 고친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퍼져 사대부 집안에서 서로 다투어 진료를 받으려 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 의술의 재능을 전수하기 위해 국가가 관리하기도 했다. 중종대 장금도 왕실여성을 치료한 유명한 의녀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이 의녀는 여성들 특유의 섬세함과 잠재된 능력이 제한된 기회나마 주어지면 적극적인 자기 개발의 의지로 남성을 능가하는 전문성을 발휘하여 사회적 인정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사회 의녀의 잠재력이 개화기 의술의 근대화로 기회가 열리자 여성들의 능력이 분출된 것이다.

 

조선 말기 여자의사가 출근하는 모습 ⓒ한국여자의사회
조선 말기 여자의사가 출근하는 모습 ⓒ한국여자의사회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김점동)의 헌신

조선 내에서 여의사 양성을 위한 근대 의학교육이 시작된 것은 1890년 외국인 선교사인 ‘홀’부인이 이화학당 졸업생 5명에게 의학을 가르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는 1900년에 와서야 출현했다. 그가 바로 박에스더다. 그의 본명은 김점동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1900년에 졸업했다.

에스더는 세례명이고 결혼 후에 남편 박유산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라 불렸다. 박에스더는 선교사인 아펜젤러 밑에서 일하며 일찍이 서양사상에 접했던 아버지 덕분에 1886년 11월 한국 근대 최초의 여학교로 설립된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유달리 재능이 뛰어났던 박에스더는 특히 영어에 능숙해 보구여관의 의사이자 이화학당의 교사로 취임한 홀(R. S. Hall) 부인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보구여관은 1887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파송된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 B. Scranton)이 당시 한국 사회에서 소위 남녀유별이라 하여 여성들이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여성들과 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하기 위해 만든 병원으로, 이화학당 구내에 설치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에 명성황후 민비가 보구여관이라고 명명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한국여자의사회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한국여자의사회

홀 부인과의 만남은 박에스더의 생애에 커다란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홀 부인은 철저하게 폐쇄적인 생활을 강요당해온 한국 여성들의 진료를 위해서는 여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임을 간파하고, 박에스더에게 의학을 가르치고자 했다. 박에스더는 그때부터 보구여관에서 의료보조원으로 일하며 기초적인 의료기술을 습득했고, 시료소에서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했다. 박에스더는 서양인 의사가 언청이 수술을 하는 것을 보고 감동해서 하나님 사랑은 인간의 마음만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습도 아름답게 한다는 믿음으로 의사가 되는 꿈을 키웠다.

1894년 5월 닥터 홀 내외가 평양 선교기지 개척 담당자가 되어 평양 유일의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하자, 박에스더도 함께 평양으로 동행했다. 당시 청일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에 닥터 홀 내외와 박에스더는 의료 활동으로 수많은 부상자를 간호하며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다. 바로 직전 선교사 선생님들이 소개한 박유산과 결혼하고 함께 1894년 말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한 박에스더는 1895년 2월 뉴욕의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했고, 9월부터 뉴욕시 유아병원에 들어가 생활비를 벌면서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했다. 1896년 10월 박에스더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대학교)에 입학해 의학을 전공했다. 유학생활 중 아내의 장래를 위해 농장 일을 하며 박에스더의 의학 공부를 뒷바라지하던 남편 박유산이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나, 박에스더는 역경을 딛고 1900년 6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한국 여성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08년 신축한 평양의 광혜여원 ⓒ한국여자의사회
1908년 신축한 평양의 광혜여원 ⓒ한국여자의사회

1900년 11월에 귀국한 박에스더는 미국 감리회 여선교부의 정식 파송을 받고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여성들이 남녀유별의 내외법에 젖어 남자의사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여의사인 박에스더의 활약은 눈부셨다. 서울 정동의 보구여관에서 헌신적으로 진료활동을 펼치던 박에스더는 1903년경 콜레라가 유행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구석진 촌락까지 환자를 찾아다니며 무료 순회 진료를 했다. 그리고 무지한 국민들의 위생계몽을 위해 곳곳에서 위생 강연을 실시하며 국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1903년 박에스더는 홀 부인이 의료사업을 벌이고 있던 평양의 광혜원으로 옮겨 의료 활동을 펼쳤다. 이 무렵 박에스더는 놀랍게도 10개월 동안 3천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다고 하며, 그의 훌륭한 외과 수술 실력은 당시 사람들이 귀신이 재주를 부린다고 여길 정도였다. 의사로서 명성을 쌓은 박에스더는 우리나라 최초로 장애자들을 위한 교육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홀 부인이 세운 맹아학교의 교사로 힘썼다. 또한 홀 부인과 함께 장차 한국 의료계를 짊어질 여성 의료 인력의 보급을 위해 간호학교의 설립을 주도했다.

 의료사업, 계몽활동, 선교활동, 사회사업 등

한국의 계몽과 발전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

고된 생활로 얻은 폐결핵으로 34세 사망 

활발한 의료 활동이나 사회사업 외에도 박에스더는 항상 여성의 계몽과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박에스더 스스로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활동하며 여성의 훌륭한 능력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강연을 통해 한국의 장래를 위해 무엇보다 여자 교육이 급선무임을 주장하며 여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의료 활동과 함께 선교활동을 펼치며 기독교의 보급에 힘썼다. 이러한 박에스더의 업적을 찬양하고 격려하자는 의미에서 언더우드와 윤치호, 김필순 등 사회 유지들의 발기로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박에스더를 비롯하여 구미 5개국에서 유학했던 윤정원,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김란사(결혼 후 하란사로 불림) 등과 함께 1909년 4월 28일 관민 합동으로 경복궁에서 초대 여자 외국유학생 환영회가 개최됐던 것이다. 다수의 관련 인사, 사회 유지, 각 여성단체 및 종교 단체의 내외빈객 수많은 인파가 모인 대성황 속에서 박에스더는 김란사와 함께 여성교육협회와 여성기획협회가 공동으로 수여하는 표창장을 받았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서 의료사업, 계몽활동, 선교활동, 사회사업 등 한국의 계몽과 발전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한 박에스더는 고된 생활로 얻은 폐결핵으로 인해 1910년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비록 짧은 생애를 마감했지만, 여성 의료에 최초의 횃불을 밝힌 박에스더의 역할은 이 땅에서 소외받은 여성들에게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워준 값진 역사적 업적으로 길이 새겨져 있다.

<‘여의사화 한국 근대화-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다’ 발췌>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의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