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레바논 배우 줄리아 카사르·요르단 프로듀서 나디아 엘리와트
올해도 아랍의 여성 영화인들이 한국을 찾았다. 지난 1일 서울·부산에서 동시 개막한 ‘아랍영화제’ 개막작 ‘결혼 대소동’(2017)의 주연배우 줄리아 카사르(Julia Kassar·55), 같은 작품의 프로듀서 나디아 엘리와트(44·Nadia Eliewat)다. 레바논과 요르단 출신인 이들은 아랍 영화계와 여성의 일-삶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할리우드 감독 중 여성은 4%뿐인데, 아랍의 독립영화 감독 중 26%가 여성이다.
줄리아 카사르(이하 ‘카’) : 맞다. 아랍 영화를 말하면서 여성을 빼놓을 수 없다. 레바논만 해도 나딘 라바키(Nadine Labaki·배우이자 감독, 영화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로 2011년 칸영화제·토론토영화제 등 수상), 란다 샤할 사바그(Randa Chahal Sabag·감독, 영화 ‘연’으로 2003년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등 수상) 등 큰 성과를 거둔 여성 영화인이 많다. 대학 연기영화과 학생 성비도 여성이 남성의 곱절에 달한다.
나디아 엘리와트(이하 ‘엘’) : 여성의 영화계 진출은 확실히 할리우드보다 아랍이 훨씬 더 활발하다. 특히 감독·프로듀서·배우 중 여성이 많다. ‘결혼 대소동’도 제작진의 80%가 여성이다. 사실 가부장제가 낳은 현상이다. 아랍 사람들은 ‘영화 = 돈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들은 영화보다 금융·공학 같은 ‘돈 되는 일’을 하길 원한다. 딸이라면? 돈 안 되는 예술을 하건 뭘 하건 상관없다(웃음).
- 아랍 영화와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만나면 여성 억압·차별을 다룬 영화들이 먼저 떠오른다.
엘 : 억압·차별받는 여성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아랍 여성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특정 영화 펀드와 페스티벌이 강하고 주체적인 아랍 여성을 그린 영화를 두고 어두운 영화를 골라 해외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유통 채널이 드물다 보니 그런 게 ‘아랍 여성’의 이미지가 돼 버린다. 글쎄다. 아랍 여성은 오히려 ‘전사’들이다. 출신 배경을 막론하고 일, 가족 부양, 육아·가사노동을 다 해내는 ‘슈퍼우먼’이 많다. 이런 여성들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삭제할 수는 없다.
카 : 동의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랍 영화를 보면 여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성은 내 나이쯤 되면 ‘모성애가 강한 어머니’ 역만 맡는다. 나이 많은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얘기는 그것보다 더 다채롭다. 이를테면 ‘결혼대소동’에서 나는 결혼에 발목 잡힌, 옛 추억과 증오에 갇힌 중년 여성을 연기하려 했다.
엘 : 짚고 넘어갈 문제는 있다. 요르단 사회에서 육아는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남아 선호 사상도 여전하다. 전통적으로 대가족을 선호하는 요르단 문화 속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자연히 출산과 육아를 반복하며 전업주부로 살게 된다. 교육이 중요하다. 여성들도 스스로의 인권 문제에 눈을 떠야 한다.
- 성평등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여성의 역할만큼이나 남성의 역할도 중요하다. 여러분 주위의 남성들은 어떤가.
엘 : 다들 나를 존중하고 지지한다. 특히 내 남편은 나의 열렬한 지지자다. 지금 그는 두바이에서 5개월 난 아기를 돌보고 있다. 완벽하다(웃음).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도 결국 설득해냈다. 대학생 때부터 영화가 좋았다. 가족들은 “넌 성공해야 한다”며 영화를 포기하고 건축가가 되라고 압박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촬영을 마치고 새벽에 귀가할 때마다 아버지는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냐’, ‘그런 옷차림으로 다니면 큰일 난다’며 나를 나무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우연히 내 일터에 나타났다. 아버지가 길을 가는데 웬 여자가 남자들 속에서 메가폰을 들고 ‘액션!’ ‘컷!’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더란다. 아버지는 그게 나라는 걸 알고 환히 웃었고, 비로소 내 선택을 존중하기 시작했다.
카 : 나 역시 일터에선 성차별이나 성폭력을 겪은 적 없다.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내 부모도 나를 존중하고 지지한다. 다만 고통스러운 기억이 하나 있다. 길을 가는데 한 소년이 나를 향해 성적인 말들을 내뱉었다. 10살도 채 안 된 아이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나 할까? 그 이후로 교육에 관해 고민하게 됐다.
- 최근 한국에선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영화계 내 성차별·성폭력 문제 등 다양한 젠더 이슈가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여러분의 아랍 내 페미니즘 체감도는 어떤가.
엘 :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누구나 젠더에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바논, 요르단에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다만 아랍 문화권엔 ‘페미니즘은 인구의 절반인 남성을 혐오하는(man-hating) 극단주의’라는 인식이 아직 존재한다. ‘페미니즘은 사치’라는 인식도 만만찮다. 기본적인 보건의료서비스도 못 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여성 문제가 급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소수자 문제는 아직 공론 대상조차 못 된다.
카 : 나도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남성들은 수천만 년 이상 세상을 지배해왔다. 이제 바뀔 때도 되지 않았나. 어머나, 이 인터뷰가 나가면 남자들이 날 증오하겠네! (웃음)
엘 : 레바논 영화계는 성차별·성폭력 문제와 거리가 멀다. 윤리적 감수성이 높은 ‘작은 공동체’랄까. 누구든 그런 일을 저질렀다가는 소문이 퍼져서 일할 수가 없다. 노동조합 등 영화인 권익 단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임금 차별을 받은 적은 없다. (레바논 영화계는) 아직 파이가 작고,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 한국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카 : 아랍은 매우 다양한, 풍부한 문화가 혼재하는 곳이다. 선입견을 깨면 깜짝 놀랄 것이다. 서울에 와서 만난 한국인 중엔 기존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아랍 각국의 독특한 특성과 문화에 대해 직접 알아보려는 이들이 많아서 인상적이었다. 그게 시작이다.
엘 : 북한, 시리아 난민, 전쟁이 우리가 서로에 관해 지닌 지식의 전부여서는 안 된다. 나도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