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페미니즘 두 갈래로

구세대 온건파부터 급진파까지

공창제 폐지운동, 참정권운동도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큰 영향력

자유주의 여권운동보다 회원 10배

여성노동 조합원 21만명 활동

 

독일에서 활동한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에서 활동한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구 국가들에 비하면 프로이센의 군사주의 전통과 권위주의 정치체제 속에서 보수주의가 사회 도처에서 강하게 뿌리를 내렸던 사회다. 이런 까닭에 자유주의 세력이 허약한 독일에서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운동은 양극화됐다. 자유주의운동의 뿌리에서 자라온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온건파는 너무 온건했고, 급진파는 이례적으로 과격했다.

군사주의 전통과 권위주의 정치

이렇게 자유주의 세력의 위축과 중간층의 정치적 취약성 속에서 독일은 사회주의운동이 서구에서 가장 먼저 시작돼 가장 성공적인 운동으로 발전한 사회가 됐고, 그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3년 선거에서 독일 최대의 정당으로 등장했다. 이런 정치‧사회적 흐름은 여성신문 기획 ‘다시 페미니즘 역사를 쓰다’ 첫 편에서 밝힌 대로 미국이나 영국의 여성운동에 비하면 독일 내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훨씬 영향력을 지니면서, 자유주의 여권운동에 비해 회원 수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거의 10배 이상에 이르는 결과로 나타났다.

1848년 등장한 독일여성총연합 활동은 기껏해야 여성의 교육, 자선, 경제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경제문제와 관련해선 당시 프로이센이 준비하고 있는 민법전에 기혼여성 재산권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창제 반대운동에 대한 영국 여성운동의 제안을 거절할 정도로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1900년을 넘어서면서 구세대 온건파 페미니스트 지도자들이 은퇴한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급진파들은 매우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이들의 급진성은 공창제 폐지운동이나 참정권운동을 조직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독일여성단체연합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성들도 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하는 참정권 운동은 가장 급진적인 이슈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정점이었다.

또 독일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운동에서 또 다른 선진적인 대목은 피임법 사용과 낙태의 합법화를 주장한 것이었다. 낙태문제는 당대 부르주아 사회를 충격에 빠뜨리는 과격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독일 사회에서 이 운동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여성은 1918년까지 선거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낙태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성매매는 최근에 와서야 합법화됐지만 그후 성매매 여성이 크게 늘고, 인신매매나 납치 등과 연루되면서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독일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고립은 비민주적인 독일의 정치체제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독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대변자였던 클라라 체트킨.
독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대변자였던 클라라 체트킨.

평화운동 선구자, 독일 여성들

독일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꼭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성들에 의해 먼저 평화운동이 시작됐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프로이센의 군사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신에 토대를 둔 애국주의 구호와 선동이 난무했지만, 여성운동가들이 반전 운동을 외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독일 내에서도 최초의 선구적 활동일 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운동에서 최초의 시도였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전야의 전쟁 열광 속에서 말이다.

1892년 단호한 평화주의자이자 반전소설 『무기를 내려놓으라!』 저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는 오스트리아‧독일평화협회를 창설했다. 그녀는 독일 여성단체연합에 전시 동안 여성권리 신장을 위한 운동 대신 평화운동을 펼칠 것을 호소했다. 헬레네 슈퇴커나 헤드비히 돔 그리고 클라라 체트킨 등의 지원과 함께 주트너는 헤이그에서 1915년 세계여성평화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유럽 여성들에게 전쟁에 저항하고, 전시 기간의 여성폭력에 대해 투쟁하고, 여성의 정치적 평등을 위해 개입하고, 군축을 시도하고, 여성 분과를 갖춘 국제평화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이런 노력은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국제여성자유평화연맹의 반전평화운동으로 결실을 거둔 셈이다. 이때 여성회의에서 제기한 20개 요구안은 이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전후의 평화계획을 세우는 데에 크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독일여성운동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이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을 좀 더 쉽게 풀어 썼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민주당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독서 목록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책을 통해 베벨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도록 여성을 동원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으로 여성을 유도하고자 했다.

당시 일부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상황에 경악하면서 이들을 조직하려 했지만 1878년 반사회주의자법이 작동하고 당 가입이 불법화되자, 이에 놀란 부르주아 여성들은 노동계급 여성의 문제에서 달아나 버렸다. 이런 가운데 여성노동자단체들이 독일 전역에서 생겨났는데 이러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중심에 클라라 체트킨이 있다.

“사회주의 사회가 실현되면, 여성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엥겔스나 베벨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체트킨은 “여성노동자들의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은 해방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해 사회민주당 남성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녀는 사회민주당 내의 여성들은 부르조아 페미니즘과 어떤 관계도 맺지 말 것을 엄중하게 요구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왼쪽)와 클라라 체트킨. 독일 사회민주당의 노선 투쟁이 격화됐을 때 둘은 당 좌파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왼쪽)와 클라라 체트킨. 독일 사회민주당의 노선 투쟁이 격화됐을 때 둘은 당 좌파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과 체트킨

독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1914년까지 17만5000명의 여성당원을, 21만6000명의 여성노동조합원을 가질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전체 여성운동의 주축을 이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딜레마는 도처에 산재했다. 당의 하부에서는 반페미니즘이 잠재돼 있었고, 여성부는 당 내부에서 그다지 실질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트킨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대변자로 그 존재감을 굳혔다. 또 당시 사회주의 정당 가운데 가장 크고 잘 조직화돼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영향 속에서 1907년 제2인터내셔널이 열린 슈투트가르트에서 사회주의여성인터내셔널이 최초로 탄생했고, 이를 통해 여성운동의 국제적 연대가 강화됐다.

사회주의자 여성으로 체트킨보다 더 알려진 인물은 로자 룩셈부르크다. 그러나 그녀는 여성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체트킨과 룩셈부르크는 깊은 우정을 나눴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의 노선 투쟁이 격화됐을 때, 두 사람은 당 좌파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룩셈부르크가 그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요기오와 헤어지고, 20년 연하인 체트킨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을 때 둘 사이에 생긴 갈등도 이들의 깊은 우정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독일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고, 이때 이후로 수십 년간 독일의 여성운동은 침체기에 들어갔다. 68학생운동의 시작과 함께 서독의 새 여성운동도 일어났다. 진보적인 사회운동이 고조되던 시기에 사회운동 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여성차별 의식이나 관행에 대한 여성들의 반발이 계기가 돼 자율적인 여성운동을 표방하며, 여성들은 기존의 정치조직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했다. 이들의 운동은 치열한 여성중심 사고와 사적인 영역의 문제를 끈질기게 제시하면서, 여성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오늘날까지도 도처에서 여성들은 대안적인 여성문화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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