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징집할 인구 없다?

저출산의 인구정치학 부상

 

여성 군 입대는 ‘남성 중심 평등’

남성 직종 여성 진출, 논란 빚는 건

그 직업이 남성에게 매력 없기 때문

 

문재인 대통령이 5월 17일 취임 후 처음으로 합동참모본부 작전통제실에서 보고를 받고 나와 근무 중인 여군들과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문재인 대통령이 5월 17일 취임 후 처음으로 합동참모본부 작전통제실에서 보고를 받고 나와 근무 중인 여군들과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현재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마약상이나 강간범을 체포 즉시 처형하고, 여성 비하적 언행을 일삼는 인물이다. 필리핀대를 나온 검사 출신이지만 ‘깡패’처럼 살고 또 그것을 즐기는 듯하다. “힘에는 힘으로”를 철저히 신봉하는 인물인데, 필리핀 페미니스트들조차 그를 지지한다. 그들에게는 그만큼 일상생활의 안전 욕구가 큰 것이다.

전쟁보다 내전

다른 범죄자들에게 시달리기보다는 ‘다소 비정상적인’ 합법적 폭력이라도, 이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필리핀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안전하다’. 6년째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에 비해서도 한국은 ‘안전하다’. 시리아는 내전으로 인해 이미 40만명이 숨졌으며, 해외 난민 480만명과 국내 난민 760만명이 발생했다. 시리아 난민 사태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원인 중 하나였다.

전 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미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는 남한은, 터지지 ‘않았을 뿐’ 가장 촘촘한 화약 창고다. 그런데도, 필리핀이나 시리아보다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내가 서울에 살기 때문일 것이다. 미군 기지로 인한 안전 문제(폭발음, 기름 유출, 미군 범죄 등)는 서울의 강남이나 여의도가 아니라 매향리, 강정, 성주 시민의 고통과 투쟁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역 차별이고, 국가의 국민이 평등하지 않은 양상이다. 아니, 평등 문제를 넘어 일부 지역 국민은 생명권을 위협받고 있다.

한국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 전쟁 이미지는 1, 2차 ‘세계’ 대전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전쟁은 국가 간 전쟁보다 내전이나 국지전의 형태가 횟수, 피해 규모, 회복력 문제에서 훨씬 심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기도 하고, 근대 국가 생성 과정에서 여러 민족을 강제 통합하려는 과업이 바로 전쟁이었다.

역사상 살상 규모 4위의 한국전쟁에서도 군인들 간의 전투보다 군인의 민간인 살해나 마을 단위에서 민간인들끼리의 학살 규모가 훨씬 컸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자체가 공식적인 발발 이전인, 38선이 그어질 때부터(1945년)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접경 지역의 전투의 확전이었다. 매일 싸우다가 터진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을 포함해 7년 7개월간 진행된 제주 4‧3도 일방적인 국가폭력이 아니라 내전 성격이 강하다.

국가 간 전쟁보다 내전이 더 빈발하고 피해가 크다면, 국가 안보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국경‘선’에 불과한 국가, 그런 국가들이 모인 국제사회라는 가상의 공간에서의 갈등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여기 공동체의 민주주의 여부가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이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전쟁을 뜻하는 단어가 달랐다. 다양한 그리고 크고 작은 민족들이 모여 살던 중국에서는 모든 전투를 같은 전쟁으로 보지 않았다. 어떤 주체끼리 충돌했는가에 따라 정(征), 토(討), 침(侵), 습(襲), 벌(伐), 전(戰) 등 다른 문자로 표기했다. 전(戰)이나 적국(敵國)은 동등한 정치 집단 간에만 사용했다.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일상의 정치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의 안전 문제다. 가정폭력이 대표적인 예다. 가정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폭력의 정도는 공적 영역에서 말하는 테러나 고문에 가깝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안전은 정치적 의제로 다뤄지지 않는다.

국가 안보가 실제가 아니라 통치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 자체가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고 이들이 겪는 안전 문제가 성별, 나이, 지역 등에 따라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처럼 실제 외세의 침략 시절조차 ‘친일파’는 안전했던 이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지배 세력에게 국가 안보는 가장 설득력 있고 중요한 통치 수단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중에!” 국가의 안보나 중요한 정치를 위해, 일상의 정치는 유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장의 안전 문제로 고통 받고 저항하는 지역민이나 여성을 억압한다.

이 문제는 서구 중심적 사고의 집약이기도 하다.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국가 위주의 권력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주장한다(‘국가에 저항하는 사회’가 아니다). 권력의 진정한 형태는 서구 문화-잘 발달된 국가 제도-에서만 실현된다는 확신으로부터 권력에 대한 사고한다면, 즉 서구적 통치 형태를 기준으로 사고한다면 우리는 국가안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가가 가장 중요한 집단이 되기 때문이다.

 

전쟁기념관 여군실에 있던 1972년 지용미 여군선발대회 전시물. 여성신문의 비판 보도 이후 교체됐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전쟁기념관 여군실에 있던 1972년 지용미 여군선발대회 전시물. 여성신문의 비판 보도 이후 교체됐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저출산이라는 복병

일반적으로 국제정치학이나 실전 군사학에서는 그 어떤 뛰어난 용병술이나 인간의 의지보다도, 결국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무기의 발전이라고 본다. 특히, 무기가 인간의 손을 떠나 리모콘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부터 무기는 한 사회의 과학기술, 정보력, 인적 자원, 자본의 총량 등 ‘문명’의 속도를 측량하는 기준이 됐다.

첨단 무기전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무기를 가진 자는 아무 곳에서나 전장을 지정, 선택할 수 있게 됐고 인간이 이동하는 상륙 작전 같은 것은 필요 없게 됐다. 공중에서 미사일끼리 전쟁을 벌이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가 이러한 상황을 상징한다.

무기 투하 이후 민사 작전, 즉 그 지역의 행정력 등을 접수하는 ‘안정’, 평정하는 일(pacify, 이 말이 ‘peace’의 어원이다)만이 남을 뿐이다(이조차 점차 전쟁대행회사가 처리하는 추세다). 무기전 이후의 민사 작전. 현재까지의 전형적인 전쟁의 양상이다. 그러나 한국의 매향리나 아프가니스탄처럼 더 이상 파괴할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곳에 연습 삼아 계속 폭탄을 퍼붓거나 북한처럼 치킨 게임으로 버티는 국가도 있다.

심지어 북한의 치킨 게임은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의 표현대로 “인상적이다”. 미국이라는 기차가 맹속으로 달려와도, 북한은 선로에 서 있어 오히려 기차가 탈선, 전복하는 형국이다. 어쨌든 이처럼 국방정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축(pivot)은 과학 기술(매체)이다. 여기서 스핀 온(spin on), 스핀 오프(spin off)라는 말이 나왔다. 무기의 발전과 ‘가전제품’ 발달, 의료 기술, 기계 산업의 상호 관계를 말한다. 그 최초는 주지하다시피 카메라와 권총의 동반 발전이다(둘 다 영어 단어가 ‘shoot’으로 같은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사회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요소가 등장했다. 세계 초유의 저출산. 한 마디로, 얼마 가지 않아 징집할 인구가 없다는 것이다. 인구정치학이 남한 국방정책(=한미동맹)의 키워드가 됐다. 저출산이 멈출 기미가 없기 때문에, 국방 당국자의 입장에서는 획기적인 대안이 없는 한 인구 감소는 지속적인 정책 의제가 될 것이다.

보봐르는 여성은 생명을 낳고(give) 남성은 생명을 죽인다(take)는 말로 가부장제를 요약했는데, 한국 여성들은 비교적 간단한(?) 출산 파업으로 더 뛰어난 진화생물학적 선택으로 한반도 안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젠더는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분석 범주였지만 이제까지 한국사회에서 젠더는 그러한 인식론적 지위를 갖지 못했다. 돌발 변수처럼 보이거나 에피소드로 간주됐을 뿐이다. 저출산은 병력 문제뿐 아니라 노동력, 가족 구조, 교육 제도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변화를 가져왔다.

아무리 첨단 무기전 시대라고 해도, 인구와 인구 구성은 국방정책에 중요한 요소다. 무기가 전쟁을 해도, 인구는 여전히 중요하다. 첨단 무기 시대에 군인은 덜 필요할지 몰라도, 안보 위기 담론 자체로만으로도(?) 국가가 유지되는 남한이나 무기 산업으로 먹고 사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 세계에서 전쟁이 발발해줘야 한다. 또 중국처럼 인구 자체가 국(방)력인 나라도 있다. 지금까지도 북한의 남성 성인 인구는 국제사회의 감시 대상이 되고 있다. 북한이 정확하게 발표하지 않는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저출산의 젠더 이해(gender interest)는 한 번도 논의되지 못한 채, 국가는 무조건 이를 ‘문제’로 보고 대대적인, 그러나 필패할 정책만 계속 내놓았다. 저출산은 누구에게 이익일까.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성에게 이익일까, 그렇지 않을까는 사유의 대상이 아니었다. 저출산의 원인은 저출산이 아니다. 여성들의 결혼 기피와 만혼이다. 기혼 가정 출산율은 1.9명으로 2명에 육박한다. 결국 저출산의 원인은 여성들의 의식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한남’들의 행태와 고실업 지속 상태다.

 

지난해 2월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육사 졸업식에서 졸업생도들이 곧은 자세로 줄을 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해 2월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육사 졸업식에서 졸업생도들이 곧은 자세로 줄을 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여성 징병제 가능할까

모병 방식은 크게 징병과 지원병제로 나뉘고, 여기에 여성을 포함시키는 여부로 다시 구분되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한 논의다. 더구나 식민 지배 이후 남북한 모두 애국주의와 전국민 동원의 국가 건설이 강조됐기 때문에, 지원병제 논의는 외국에 비해 생소하다. 남·북한의 통치 세력에겐 ‘전쟁’보다 평상시의 ‘전쟁 이데올로기’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자식이 군대 가는 문제”는 전 국민의 관심사여야 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징병제와 지원병제 논란은 생략하고, 여성 징병제 문제만 놓고 생각해본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군 입대 논의는 남녀 모두 의무적으로 가는 징병제든, 남녀 모두 원하는 사람만 가는 지원병제(the volunteer system)든 꾸준한 논의가 있어왔다. 여성의 군 입대를 찬성하는 세력은 1) 현재 60만 군인 중 올해 초 1만 명을 넘은 여군 전체 세력 2)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3) 인구 감소로 군 입대 남성 부족을 걱정하는 육군과 주한미군 당국이 대표적이다.

아마도 내 생각으로 이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연구하고 있는 집단은 미국의 랜드연구소가 아닐까. 1948년 설립된 미국의 민간연구소로 국방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싱크탱크다. 60년이 넘는 한미동맹(=미국의 ‘관리국방’)으로 한국 국방부는 독자적인 국방정책 수립 능력도 없고 집행 능력도 없다. 전시 군 작전권을 가져온다고 해도 당분간은 마찬가지다. 한미동맹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진영의 ‘진보적 전문가’들조차 “천천히, 준비가 되면”을 강조할 정도다. 당장 가져와 봤자 이를 운용할 인력이나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군 입대를 반대하는 진영은 1) 군축을 주장하는 평화운동 진영 2) 징병제로 인한 비효율적 군사 운영을 비판하고 군의 전문화를 주장하는 국방부 내 신자유주의세력 3) 나처럼 여성의 군 입대는 한반도 평화나 남녀 불평등 차원에서 모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남녀 불문, “여성의 군 입대 찬성”이 대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여론조사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여성도 군대 가라~”, “우리도 군대 가겠다!”는 선언적이지, 실제로 실행될 경우는 굉장히 다른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본다. 특히 남성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그들은 여성이 군대에 가는 것도, 가지 않은 것도 싫다. 군 입대로 ‘평등’해지는 것도, 이 상태로 ‘없는 남성’만 가는 것도 불만이기 때문이다.

사실, 여성 징병제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남성 민초들의 불만’이 아니라 육군과 주한미군의 공모 관계다. 대개 다른 나라의 육․해․공군의 비율은 4:3:3이다. 한국은 한미동맹의 위계적인 분업으로 인해 8:1:1이다. 육군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이는 육군 장교 실업 문제와 공군과 해군에 대한 육군의 일방적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육군이 이를 포기할리 없다. 이 문제는 가장 논쟁적인 국방개혁 사안으로 육․해․공군 모두가 논의조차 어려워하는 현실이다. 미국의 이해는 더욱 절실하다. 그들의 한반도 전략은 한국군은 “땅에 묶어두고”, 미군은 주변 강대국을 상대로 해군과 공군을 강화해 중․러․일을 견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 육군에게 한반도를 맡기고(?) 자신들은 한반도를 동아시아 기지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여전한 문제, 군대와 성평등

여성의 시각에서 문제는 또 다르다. 인류 역사상 여성의 군 입대가 평등을 가져온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 여성의 군 입대는 대표적인 ‘남성 중심 평등’ 정책이다. 남녀가 평등해지는 방식은 무엇인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균열을 낼 것인가, 아니면 여성이 그들과 같아질 것인가.

병역은 봉건제에서 근대 대중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균질적 집단인 군대는 진보를 상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사들 간의 인종, 성 정체성, 성별, 국적을 둘러싼 논란은 끊인 적이 없다. 어느 군대도 내부가 평등한 곳은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결정할 만큼의 핵폭탄 문제인 ‘남성들 간의 계급 차이로 인한 병역 비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신의 아들에서부터 어둠의 자식들까지’의 문제다. ‘아들들’조차 평등하지 않다. 4급 이상 고위 공직자 본인의 면제 비율은 일반인의 33배에 달한다. 한 마디로, 특정 계급 남성들은 거의 가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원래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지는 않았다. ‘남성=군인’ 이미지는 국가와 남성 집단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 실제가 아니다. 신체검사에서 합격한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다. 병력은 조절되기 마련이다. 1986년에는 신체검사에서 51%의 남성만이 현역 판정을 받았으나, 2012년부터 20세 남성 인구는 지속적인 감소로 2014년의 징병률은 89%, 2020년 이후엔 90% 이상으로 예상된다. 인구 감소로 인한 징병률 증대. 사실, 국민개병(國民皆兵, 국민 모두가 군대에 간다) 국가에서 ‘중증 장애인’을 제외한다면 모든 남성이 다 입대해야 하므로 이론상 90% 이상의 징병률은 당연한 것인데, 지금 국가는 징병률 증대로 긴장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도 징병제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나는 여성 징병제가 실현된다면 남성과 똑같이 ‘있는 집’ 딸들은 군대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여성들 간에도 불평등이 드러날 것이다.

모두 실화를 근거로 한 텍스트들을 보자. 알제리 출신 프랑스 감독인 라시드 부샤렙의 ‘영광의 날들’(2006)은 2차 대전에 프랑스군으로 참가한 알제리 병사의 상황을 묘사한다. 사병인데도 식사부터 차별이 있다. 유색인종의 식판에는 우유와 과일이 없다. 이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야, 알제리 출신 참전 군인들에게도 연금이 지급될 정도였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는 ‘간호사’가 아니라 실제 2차 대전에 참전했던 100만 명이 넘는 여성이 겪은 실화를 200명의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준다. 여성들은 총을 들었고 살상 훈련을 받고 동토 행군을 했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남성들은 털옷을 입고, 여성들은 다 헤어진 얇은 옷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보호? 최근 한국 여군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군대에서 남성으로부터 보호받은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단 한 명도 그런 적이 없으며 늘 성폭력의 공포에 시달린다고 대답했다. 쿠바 혁명 당시, 동성애자의 혁명과 참전을 그린 영화 ‘비포 나잇 폴스(Before Night Falls)’도 마찬가지다. 게이들은 혁명에 헌신했지만, 카스트로는 혁명이 성공하지마자 ‘안전하고 정상적인 국가 건설’과 이를 가족 이미지에 활동하기 위해 대대적인 게이 헌트에 나선다.

이 글에서 가장 강조하는 싶은 바는 이것이다. 여성이 군대에 간다고 해서 평등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군대라는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남성 직종의 여성 진출과 그 논란은, 언제나 그 직업이 더 이상 남성에게 매력과 자원이 되지 않을 때다. 쉽게 말해, 한국사회에서 가장 군인의 지위가 높았던 1950년대에 군인은 근대화의 선두에 있었다. 당시 군인은 대개 엘리트로 우선적으로 미국 유학 등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럴 때 여성의 군 입대는 절대로 사회적 의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군 입대와 남성 시민권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고 할 만큼 ‘남성’보다 신자유주의적 개인이 선호되는 시대다. 현역으로 군대를 마친 남성의 자부심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피해의식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1990대 후반 이후 대학가에서 여학생의 총학생회장 당선이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회자된 적이 있었다. 이 역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학생운동이 사회적 역할을 잃고 남학생들이 학생회 간부 대신 취업에 몰두해 출마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역사가 있다. 남한 군대는 1958년 미스코리아 대회가 창설되자,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미스여군선발대회’를 운영했다. 육군 군악대의 연주 속에 수영복과 드레스 심사가 있었다. 선발 기준은 용․지․미(勇·智·美). 수영복을 입은 모습에서 어떻게 용기를 평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국방부는 여군을 모집하기 위한 홍보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필자 정희진씨는

서강대 강사,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저서에 『낯선 시선-메타 젠더로 본 세상』, 『정희진처럼 읽기』, 『페미니즘의 도전』, 『아주 친밀한 폭력』, 『한국남성을 분석한다』(공저) 등이 있고, 최근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를 편저했다. 45권의 공저서와 300여권의 책에 서평과 해제를 쓴 글쓰기 강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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