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은 인간으로 깨어나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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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이라는, 아직은 인생의 반도 채 살지 않은 어린(?) 나이에 남들에겐 결코 쉽지 않은 여성운동을 ‘시원하게’ 해내고 있는 의정부 참여연대 임성수 사무국장. 그와의 첫 대면은 대추차 향기가 그윽한 전통찻집에서 이루어졌다. 첫 만남이었지만 전통찻집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그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평소에도 즐겨 입고 다닐 것 같은 그의 생활한복 때문이었다.

그의 여성운동에 대한 이론은 스무 살 때부터 직접 현장에서 부대끼며 마음보다 몸으로 경험한 것들인 만큼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임 국장은 1988년부터 동두천 신일섬유에서 노조위원직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노동법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94년 디딤돌 노동자 생활학교 결성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되면서 노동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 임 국장은 이후 시민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러다 96년에 마침내 참여연대로 운동방향을 정해 지금까지 활동해 오고 있다.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눈뜬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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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기행모임 회원들과 함께 한 임성수 국장(앞줄 오른쪽 첫번째).

그는 결코 남들처럼 이론으로 무장하고 모든 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절박감으로 온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그이었고 그것이 현재의 그를 만든 것이다.

85년, 동두천 신일섬유에서 일하던 당시 그는 적십자 청년봉사활동의 하나로 청소년 야학교사를 맡았었다. 그러나 너무도 열악한 노동환경이 그를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으로 내몰아 독학으로 노동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야학을 운영하면서 어려움도 많았다. 한번은 그가 가르치던 공장기숙사의 청소년들이 공장측의 방해로 야학에 나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장기숙사에 있던 많은 청소년들이 야학을 계속하기 위해 기숙사 담을 몰래 타넘어 나왔어요. 우린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구르고…”(잠시 그때의 심정이 되살아 나는 듯 임 사무국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후 그는 야학을 그만두고 90년 당시 고려대 사회과학 동아리 ‘새벽광장’과 함께 노동자 생활학교 ‘디딤돌’을 만들었다. 그리고 노조를 결성해 현장반장을 하면서 임금체계에 항의해 합의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운동방향을 선회하게 된 것은 95년경 동두천 민주시민회에 뛰어들면서이다. 당시 동두천 보산동에서는 미군들과의 마찰로 사건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거의 일방적으로 시민들이 당하고 있었어요. 한번은 명령에 절대복종인 미군 군견이 시민을 물어 크게 다치게 한 사건이 있었어요. 군견에게 민간인을 물라고 명령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사건이 벌어졌겠어요. 아무튼 그때도 우리가 들고 일어나고 난리가 났었어요. 그나저나 미군부대 반환문제가 눈앞에 왔는데 지자체에서 너무 안일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노른자위 땅에다가 예를 들면 대학교를 지어 지금 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상가들이 학생들 상대의 장사로 전환해서 얼마든지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는 확실한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등 뭔가 일을 추진해 나가야 되는 거 아니냐구요”라며 지자체의 안일한 자세에 답답해 하는 듯 했다.

미군에 의한 사고에 주민과 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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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 변호사 비리사건 시민소송인단 모집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임성수 국장(왼쪽에서 두번째)

그가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참여연대에 소속되면서부터 본격화된다.

97년도에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의정부 지역 부녀회를 중심으로 여성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강의식으로 이루어진 1차 교육은 주로 여성이 지역사회에 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지, 왜 나나 내 가족에서 우리지역 우리국가로 여성의식이 확대되어야 하는지를 교육했다.

소모임으로 이루어지는 2차 교육은 세미나형식을 취해 자유로이 토론하여 자연스럽게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소모임은 지금까지 4차에 걸쳐 진행된 ‘으뜸 엄마를 위한 아카데미교실’을 수료한 300여명의 여성을 적극 활용하여 점차 확대시켜 나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남성들이여, 아내의 열렬한 후원자 되라”

“처음에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여성교육을 하는데 어떤 것에 중점을 두면 좋을지 설문조사를 해봤더니, 첫번째가 여성의식전환 문제, 두번째가 자기계발, 세번째가 가족과 자녀 문제였어요. 저도 적잖이 놀랐어요. 가족과 자녀문제가 첫번째일 줄 알았거든요. 우리 여성들의 의식전환에 대한 필요성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구나 싶어 기뻤죠.”

이 때 교육에 참여했던 주부들이 으뜸 엄마를 위한 아카데미교실을 수료하고, 의정모니터 요원으로 활동하거나 NGO 및 유관단체조사 등에 활동창구를 마련하는 등 지역문제에 더 열심히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다고 임 국장은 전한다. 이는 지역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자 가족의 문제라는 인식에 동감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어려운 점이요? 제가 아직 미혼이잖아요. 사실 결혼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게 되면 이 많은 활동들을 다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꾸 미루게 되구요. 전 가정이나 자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게 일반 주부들과 좀 다른 것 같아요. 난 마구 달렸으면 좋겠는데 그분들은 한발 뺄 때가 있거든요. 제 욕심이 과한가 봐요. 제일 보람을 느낄 때는 남편들이 처음엔 자꾸 밖으로 나가는 아내에게 불만을 터뜨리다가 나중엔 아내가 하는 일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오히려 열렬한 후원자가 될 때죠. 실제로 남성들도 합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우리 목표 중 하나거든요. 여성끼리만 일을 하는 것보다 남자들도 같이 일을 하면 훨씬 효과적이더라구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던 20대를 지나 이제 많은 운동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운동이라는 지상 최대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는 임성수 사무국장.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되고 안정된 자세로 한발한발 나아가고 있다. 모든 여성들이 가정주부가 아닌 사회주부가 되기를 열망한다는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그만큼이나 기대하게 된다.

<이복형 동두천 지사장>

임성수 국장 약력 1966년 의정부 출생, 86∼92 대한적십자 경기도 지사 의정부 청년봉사 활동, 94 의정부 ‘디딤돌’ 노동자 생활학교 대표, 95 동두천 민주시민회 간사, 95∼96 경기북부 노동 정책 연구소 ‘우리노동자’ 편집연구위원, 97 의정부 쓰레기 문제 해결 위한 범시민 대책 위원회 실행위원, 98 의정부시 수해자원과 실상조사를 위한 시민대책위원회 연구원, 96∼현재 의정부 참여연대 사무국장, 96∼현재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의정부 시민연대회의 집행위원 총무, 2000∼현재 국민기초생활 범조례 제정을 위한 의정부 시민연대 집행위원, 2000∼현재 의정부 제21 추진협의회 시민자치분과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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