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은의 페미니즘 책장/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

 

‘외로움의 연대’ 이루고

타인을 ‘덜’ 오해할까

이 물음에 단서 준 책

 

허술한 세상, 허접한 나와

함께 해준 네게 감사할뿐

 

외롭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외로움이 환절기 감기처럼 찾아온다. 올봄은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세 가지 덕분이다. 외로움의 공동체, 나의 오해 그리고 『쇼코의 미소』.

지난 글쓰기 모임에서 한 청년이 외로움에 대한 글을 썼다.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심지어 결혼해도 마음 한편이 비었다며 A4용지 한 장 분량을 쓸쓸함으로 가득 채웠다. “외롭다”는 말이 열 번 넘게 반복된, ‘외로운 글’이었다.

글을 읽자마자 공감이 이어졌다. 스무 살 대학 새내기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앞둔 서른여섯 청년까지. “저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어요.” 휴학한 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 중인 A의 말에 곳곳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A가 이어서 말했다. “가족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저는 혼자 방에 누워서 가만히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었어요. 그런데 문득 ‘나, 왜 살고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외로움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때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여섯 살의 외로움. 나이와 상황과 관계없이 각자를 관통하는 외로움은 비슷한 무게였다.

그 밤 내내 각자의 외로움을 활짝 드러내니, 말해지는 만큼 투명해졌다. 슬픔이 슬픔을 물리치듯, 외로움도 말해질 때 더는 내게만 머물지 않는다. 외로움의 공동체는 서로가 외로운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함께일 수 있다는 위안을 준다.

둘, 나의 오해. 오해는 외로움과 닿아 있다. 외로움은 결코 인간에게 구원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 내 모든 외로움을 채워주길 바란다. 한 사람을 뮤즈로, 어머니로, 신으로 대상화한다. 최근 나는 가까웠던 관계에서 내가 상대를 멋대로 오해하고, 역할을 부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4년을 만났지만, 나는 그를 잘 몰랐다. 우리 관계는 오해와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그 오해 속에서 나는 이번 봄을 보냈다.

홀로 외로움을 견디다가, 함께 외로움을 터놓고, 어느 순간 상대를 오해하고, 다시 외로워진다. 도대체 어떻게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외로움의 연대’를 이루고, 타인을 ‘덜’ 오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단서를 준 책이 있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

총 일곱 편의 이야기는 하나하나 내게 말을 건다. 어제까지 사랑했던 연인이 오늘 멀어지고, 내가 불쌍하게 여겼던 타인이 알고 보니 나를 더 불쌍하게 여기고 있고, 불편했던 상대가 둘도 없는 인연이 된다. 끝내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쓸쓸한 만남과 이별, 죽음이 곧 삶이다. 이 낯선 감각은 삶이 언제나 수학 공식처럼 분명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일러준다. 아무것도 고정된 것은 없고, 영원한 것 또한 없다고. “우리는 그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이동했을 뿐이다.”(130p)

 

책을 읽으며 내 나쁜 습관 하나를 발견했다. 내 외로움과 타인의 외로움을 비교하며 위안하기. 그 사람보다 내 처지가 낫다는 위안은 연대와 다르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의 한 장면. 가난한 ‘언니’는 ‘내’가 사온 닭을 허겁지겁 뜯어 먹고, 공안검사의 모진 고문에 불구가 된 ‘언니의 남편’은 바지에 소변을 본다. 소변이 흘러 치킨을 적시고, 언니는 허겁지겁 치킨을 치운다. ‘나’는 깨끗한 이불과 안락한 평안함이 있는 집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속 ‘나’를 따라 어느새 나도 그녀를 불쌍하게 바라보는데, ‘언니’가 내게 말한다. “항상 이런 건 아니라고. 나, 항상 이렇게 사는 건 아니야.”(120p)

아, 다시 오해하는 날 발견하고, 비로소 껍데기 벗은 상대를 다시 본다. 허술한 세상, 허접한 나와 함께해주는 당신에게 나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적막한 곳에 와줘서 고마워.”(126p)

 

쇼코의 미소 / 최은영 / 문학동네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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