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은 예의, 미소는 업무 능력?

하이힐 안 신고 화장 안해 강사료

삭감 당한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

 

“여성노동의 기본조건에 감정노동,

외모관리 포함” 왜 한국사회엔 아직

고루한 사고의 소유자가 많을까 

 

여자 연예인은 충분히 친절하지 않았다거나, 애교를 거부했다거나, 심지어는 집들이 음식을 충분하게 장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도 논란이 된다. 믿을 수 없게도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여자 아이돌이 무표정 단답형으로 대답했다는 게 뉴스가 되는 세상이다. 

웃음은 일하는 여자의 의무?

논란의 프로그램을 찾아 다시 본 결과 내가 보기에 그녀는 자주 웃었다. 하지만 일부 시청자들이 만족할 만큼 ‘열심히’ 웃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또 다른 여자 아이돌은 팬 사인회에서 안경으로 위장한 몰래카메라를 잡아냈다. 이 행동에 대해 일부 남성들은 몰래카메라 적발이 문제가 아니라 ‘정색’을 한 게 문제였다며 댓글을 달았다. 애교를 요구하거나 몰래 촬영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 그런 요구를 거절하는 방식을 논란으로 만들어버린다. 주객전도를 넘어서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웃어주지 않는 여자들에 대한 불만은 비단 연예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여성 노동의 기본 조건에 감정노동과 외모관리가 포함돼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는 화장을 하지 않고 하이힐을 신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사 측에서 강사료를 20% 삭감했다. 수강생을 무시했다는 이유였다. 

여자의 화장은 예의이고, 미소는 업무에 필수적인 기술이다. 판매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의 대부분은 여성이고, 이 여성들은 항상 미소를 띄고 고객을 응대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미소를 잘 짓고, 더 친절한 목소리를 유지한다고 해서 승진이 되는 건 아니다. 콜센터 근무 8년차인 A씨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친절하게 응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승진이 안된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남자 사원들이 진상 고객들의 상담 전화에 대한 인내심이 더 적을 거라고 생각해서 상담 전화를 받지 않는 매니저로 더 빨리 승진시켜준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자가 일하기 위해서는 화장과 옷차림을 갖춰 입고 항상 미소띤 얼굴로 지내도록 강제되고 있는데다가, 이에 따른 보상도 주지 않는다. 웃음은 일하는 여자들의 ‘의무’가 됐다. 의무이므로 이에 따른 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웃어주지 않는 여자는 그 자체로 논란이 된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은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웃는다. 대체 왜 남성 사회는 웃어주지 않는 여자를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걸까.

왜 여성에게 웃음을 강요할까

남성 사회는 여자를 사물로 취급하거나 비인간화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미소와 친절과 같은 적극적인 동의를 필요로 한다. “많은 남성 지식인들은 여성들의 문제제기가 공동체를 각박하게 만들고 해체시킨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공동체 대표/남성의 명예와 욕망을 어느 정도 수용해주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허용’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김은실, 2005) 인용한 여성학자 김은실의 지적대로, 많은 여자들은 때로는 공동체를 지키고 공동체를 대표하는 남성들의 행동에 대해 문제제기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웃는다. 

모 기업에서는 공식 행사에서 회장이 성희롱 발언을 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 회장의 발언 수위가 조절된 것이 아니라 중간관리자가 돌아다니며 여자 신입 사원들에게 “웃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분명히 다른 여자들은 자신의 똑같은 농담에 웃었다며, 이제 와서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부장님들이 많다. 이들은 문제를 제기한 이가 유별난 사람일 뿐 다른 여자들은 분명 웃어줬다며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억울해한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당신의 농담은 사실 웃기지 않았다.

2011년 사진작가 그레이스 브라운은 ‘언브레이커블 프로젝트’에서 성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들이 한 말을 그대로 종이에 적어서 어떤 코멘트도 붙이지 않고 두 손으로 들고 사진을 찍도록 했다. 이 작업에 참여한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 직접 들은 말은 욕설이나 위협보다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휠씬 많았다. “닥치고 좋아하는 척 해”, “너도 이걸 원하는 걸 알아”, “걱정마, 너도 좋아하게 될 거야”, “난 네가 저항할 때가 좋더라.”…. 그 중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사랑해”였다.

집착의 이유

여자의 웃음을 의무로까지 생각하는 남성 사회의 집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작금의 이 상황은 젠더 기반 폭력을 설명해온 틀 중 하나인 여성의 성적 대상화(sexual objectification)와 ‘사물화(objectify)’라는 문제의식을 초과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지금까지 성폭력의 해악에 대한 설명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성폭력은 피해자를 ‘성적 대상’으로 만들며, 이러한 성적 대상화는 인간을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품이나 물건으로 만드는 ‘비인간화’ 과정의 하나이므로 존엄성을 해친다는 것이다(레몬체크, 1985 등) 

그러나 성적 대상화라는 개념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거나 사물로 격하시킨다는 의미로 바로 치환해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들 간의 성적 상호작용과 협상과정 중에 일어나는 권력과 폭력의 문제를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2017년 한국의 유력 대선 후보였던 자유한국당의 홍준표는 젊은 시절 친구들과 여자에게 ‘돼지흥분제’를 먹이려 한 일을 자서전에 무용담처럼 쓴 게 알려져 공개 토론 때 보이콧을 당했다. 공소시효가 지났을 뿐 엄연히 성범죄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백한 그는 785만표를 얻어 무려 2위를 차지했다. 그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는 한때의 치기어린 실수이며 그 나이 또래의 한국 남성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는 ‘증언’이 속출했다. 한국 사회의 참담한 젠더 의식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한 남초 커뮤니티들의 반응을 관찰한 결과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이 약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이 꽤나 많고, 관련 정보 역시 오랫동안 축적돼 왔다는 점이었다. 요힘빈(yohimbine)이라는 이름의 이 물질은 일종의 최음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실제로는 억제제라고 한다-이 약이 유독 남성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여성을 성적으로 흥분시켜 ‘자발적’으로 성교에 임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전파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웃음과 애교를 의무로 요구하는 사회는 여자를 무기력한 대상으로 만들거나 사물이 되길 원하기보다는 옷차림, 화장, 얼굴 표정 등을 점점 자세하게 지시하는 방식으로 여자들을 괴롭힌다. 사물화이자 비인간화 과정으로서의 성적 대상화라는 개념으로는 이러한 성적 대상의 적극적 ‘반응’에 대한 집착을 설명하기 어렵다.

적극적인 반응에 대한 구체적 요구

성적 대상화는 성애적 관계를 나누는 연인 관계에서는 문제 삼기 어려운 개념이다. 무성애자가 아니라면 상대를 성적인 존재로서 의식하는지가 연인 관계의 필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칸트는 성적 상호작용을 나누는 연인 관계에서 성적 대상화는 필연이라고 봤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위한 탐욕의 대상이 된 개인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며, 성적 존재로서의 개인은 사물화를 특징으로 하는 시장의 역동성에 지배당한다고 주장했다(로빈 메이 쇼트, 1999, 재인용). 

칸트가 성적 대상화와 사물화의 연결고리를 강하게 주장하며 금욕주의로까지 나아갔다면, 누수바움은 어떤 성적 대상화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누수바움, 1995). 즉, 연인의 엉덩이에 집착하는 등 부분적인 탐닉이 이뤄지거나 왕성한 성적 욕구로 성적 대상으로서의 존재규정이 둘 사이에 압도적인 시간을 차지한다고 해도, 상대가 신체적인 독립성을 가진 자율적이고 통합적인 개인이라는 사실이라는 점이 둘 사이의 관계에 분명하다면 이것을 성적 침해나 지배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칸트는 성적 대상화 자체가 사물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므로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본 것이고, 누수바움은 동의에 기반한 관계에서 자율성이 보장된다면 성적 대상화의 윤리적 문제는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동의와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특권을 준다. 우리의 현실에 편재돼 있는 성적 차이의 젠더화된 체계들이 실천되는 방식들은 성적 대상이 되는데 동의했는가, 아닌가. 성적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인간성을 포기한 것인가, 아닌가. 이런 식의 상황보다 휠씬 복잡하다.

현재 우리 문화는 여성의 몸은 남성의 성욕과 관련해서 유용한 것이라는 생각에 침윤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인들 사이에서의 성적 대상화는 당연하거나 필연적이라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지속돼온 이성애 남성 중심적인 성욕의 ‘해소’라는 관념을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카힐, 2011).

성욕은 반드시 해소돼야 한다거나, 성관계에 동의했다면 성적 대상화는 필연이라거나 하는 말들은 이 관계 내부에서 권력이 작동되고 서로의 욕구에 대항해 길항하는 방식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고 사실은 진정한 동의가 아니었다며 지금까지 관계 내에서 당사자로서 참여해온 모든 행위성을 부정하고 관계성을 삭제하는 것은 오히려 몸의 통합성을 부인하고 피해자의 피해자화라는 자기 소외로 이어지기 쉽다. 새로운 모험과 시도, 망설임 그리고 어떤 것을 감수해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 등등 성적 상호작용을 나누는 관계에는 많은 감정들이 떠다닌다.

우리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반응하기’를 원한다. 어떨 때는 자신에게 욕해달라고 하거나 어떤 옷을 입어달라고 하거나 어떤 말을 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불편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런 일들은 연인 사이의 상호 동의와 존중 하에 일어날 수 있는 성적 상호작용이기도 하다. 

누수바움은 주체성과 수동성을 지나치게 단순 대립시켜 수동성을 항상 수치스럽도록 간주하는 문화를 비판한다. 병리적 나르시시스트들은 수동성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남성적 힘과 상처받지 않음을 지나치게 소중하게 여긴다. 하지만 존엄성이란 무엇인가를 행동 할 수 있는 역량만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수동성에도 있다는 것이다(누수바움, 2015).

주체성을 좋은 것, 수동성을 나쁜 것으로 이항대립적으로 두는 것은 한편 주체성을 능동성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체성(subjectivity)이란, 능동이나 수동의 형식이 아니라 세계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의 ‘나’라는 실존적 감각을 가지고 자유로운 존재로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어쩌면 문제는 성적 대상화나 사물화, 수동성이나 능동성, 동의 여부 등이 아니라 매우 단순하고도 직관적이게도 ‘일방적’이라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너가 아니다

앞서 말한 연인들 사이의 다양한 성적 상호작용이 폭력으로,  지배/피지배 관계로 변화하는 순간은 상대가 성적 ‘대상’이 된 순간이나 ‘수동적’인 순간, ‘사물’처럼 취급받을 때 등이 아니라 오직 지배자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행동하기를 요구하고, 그가 정해준 한도 내에서만 욕망하고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할 때이다.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라는 말은 수동성의 고백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 감동적인 사랑 고백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필요를 위해 너는 항상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원하는 방식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부터 폭력이 발생한다. 이때 지배자는 상대가 자신의 욕망에 적합하게 파생되고 변환된 존재인 것처럼 취급하며 지배자의 욕망을 초과한 행동, 말, 존재는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상대를 자신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로,  자신의 욕망을 담을 수 있는 유도체(derivative)로 취급할 때 해악이 발생한다(카힐, 2011). 성적 대상화라는 개념 대신에 유도체화(derivatization)라는 개념을 제안한 카힐은 이 개념이 행위성을 드러내면서도 지배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유용하다고 봤다. 유도체화란 화합물의 구조를 조금씩 바꿔서 합성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작용기를 바꾸며 원하는 성질의 화합물을 찾아내는 방식을 말한다. 카힐이 유도체화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대상-사물화가 이뤄졌는지 여부보다는 요구의 일방(향)성이 관계의 폭력성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성적 대상화 이후에 벌어지는 상호작용 과정에서 나와 대상 간의 차이가 사라지고 한 사람의 욕망만이 동일자의 형식으로 남아 있게 되는 문제 말이다. 

이러한 해악에 가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타인의 타자성을 타자화하지 않는 것으로 가능하다. 나는 너가 아니다. 너는 내가 아니다. 타자의 욕망이 나와 같지 않고, 심지어는 같은 내용도, 형식도 아닐 수 있다는 것, 타자는 다르며 심지어 나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차이를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호기심, 놀라움 그리고 겸손을 필요로 한다. 이리가레는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차이를 환대하는 사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너는 나에게 환원되지 않는다. 단지, 나는 너에게 존재한다. (I am to you) 우리는 서로에게 대체물이 아니다”(이리가레이, 1998)

더 이상 웃어주지 않는 여자들

다시 웃음의 문제로 돌아가서, 많은 여성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부인하도록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왔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은 웃어야 하지 않을 때도 웃는 경향이 있다. 스노틀랜드는 쫒아오고 있는 술취한 남자들을 피하려는 여학생들이 “징그러워, 싫어, 무시하자”고 말하면서도 키득거리는데, 이런 키득거림은 실제 웃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쓴 바 있다(스노틀랜드, 1998/2016).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자들이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웃어주지 않는 것부터 페미니스트로서의 실천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왔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스마일 보이콧”을 주장했고, 사라 아메드는 흥을 깨는 존재로서의 “페미니스트 킬조이”에 대해 언급했다. 지나가는 여성들에게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성적 감흥을 전달하는 행동을 “캣콜링(catcalling)”이라고 하는데, 들리지 않는 척 빠른 속도로 지나가거나 전혀 즐겁지 않은데도 웃어주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미국의 영페미니스트 그룹에서는 길거리에 “No Catcall Zone” 포스터를 붙이고, “Cats Against Catcall”라고 새겨진 티셔츠와 뱃지를 제작했다. 

한국에서도 뉴페미니스트 그룹에서 웃지 않는 여학생을 형상화한 뱃지를 만들었고, 한국여성민우회에서는 “안웃겨요” 포스트잇 액션을 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슬로건 ‘웃자 뒤집자 놀자’였다.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봐 말해두면, 페미니스트들의 “웃어주지 않기” 캠페인은 기본적으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기획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은 ‘진짜 웃음’이 오가는 가운데 서로를 웃기고 웃는 일이다.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피곤하고 예민하며 엄숙하기만 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끝내주게 웃기고 엄청 잘 웃는 사람들이다. ‘웃어주지 않는 여자’를 논란거리로 만드는 사회에 저항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웃지 않는 여자들을 응원하면서 웃는 것’이다.

필자 권김현영씨는

여성주의 연구모임 FICT와 성문화연구모임 도란스의 멤버다. 『양성평등에 반대하다』 『성폭력에 맞서다』 『페미니스트 모먼트』 『대한민국 넷페미사』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최근에는 한국남성의 식민지 남성성을 화두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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