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성소수자 대자보 훼손 사태 

“성소수자 인권 보장은 시대적 흐름”

“이분법적 젠더관념 재검토해야” 

 

지난 7일 서강대학교 곤자가 플라자에 걸린 현수막. 이 학교에선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현수막들이 수차례 찢겨지고 도난당했다. ⓒ이세아 기자
지난 7일 서강대학교 곤자가 플라자에 걸린 현수막. 이 학교에선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현수막들이 수차례 찢겨지고 도난당했다. ⓒ이세아 기자

현수막을 걸면 찢어졌다. 대자보는 뜯겼다. 서강대 성소수자 모임이 지난 2년간 학내에서 겪은 일들이다. 올해는 현수막이 아예 사라졌다. 고려대, 전북대, 이화여대에서도 성소수자들이 붙인 대자보는 꾸준히 훼손됐다. 학내 커뮤니티에선 “성소수자 얘기 좀 그만하자. 더 시급한 현안이 많은데 학내 갈등만 조장한다” “퀴어가 벼슬이냐” 같은 말들이 나돈다.

대학 내 성소수자 대자보 훼손 사태가 이어지면서 학내에 만연한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학생들은 “성소수자 인권 보장은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며 반동적 혐오를 비판하고 나섰다. 

 

지난달 전북대 내 게시판에 붙은 ‘나도 잡아가라’ 대자보들. ⓒ전북대 성소수자 모임 열린문
지난달 전북대 내 게시판에 붙은 ‘나도 잡아가라’ 대자보들. ⓒ전북대 성소수자 모임 열린문

 

지난달 19일 서강대 게시판에 붙은 ‘나도 잡아가라’ 대자보도 훼손됐다. ⓒ학생 제공
지난달 19일 서강대 게시판에 붙은 ‘나도 잡아가라’ 대자보도 훼손됐다. ⓒ학생 제공

최근 대학가엔 ‘나도 잡아가라’ 대자보가 잇따라 등장했다. 국방부의 군 동성애자 색출 의혹과 대선후보들의 성소수자 차별·혐오 발언 파문이 불씨가 됐다. 대자보 물결은 지난달 서강대를 시작으로 연세대, 이대, 성신여대, 단국대, 부산대, 충남대, 전북대 등 전국으로 퍼졌다. “나도 잡아가라. 나는 성소수자 모임의 대표다”(서강대 수학과 13학번 재학생) “게이 군인이 죄인이라면 여대 CC도 죄인이렷다. 그러니 나도 잡아가라!”(성신여대 성소수자 모임 ‘큐리스탈’) “나도 잡아가라, 이 ‘정상적인’ 사회는 성소수자인 내 울음을 먹고 클 테니”(전북대 무역학과 14학번 재학생) “우리는 성적 지향을 이유로 존재를 부정당했다. (...) ‘동성애’가 죄라면, 찬반을 나눌 수 있는 문제라면 나도 잡아가라!”(가천대 재학 중인 여성 성소수자) “나는 군 입대를 앞둔 성소수자다. 나도 잡아가라. 개인의 성정체성, 성적 지향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차별과 탄압의 이유가 될 수 없다”(한예종 재학생) 

대학 내 성소수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지하는 학생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너는 질병도, 돌연변이도, 범죄도 아니다. (...) 너를 응원한다. 네가 불행한 세상에서는 나도 행복할 수 없다.” (전북대 재학생) “사랑에 반대하는 일이 가능한가? 사랑에 반대할 권리란 대체 무슨 권리란 말인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은 그런 권리를 알지 못한다”(서강대 재학생) “우리는 친구들의 자유와 사랑을 위해 연대하고 싸울 것이다”(단국대 재학생)

많은 대자보들이 부착된 지 며칠 만에 훼손되거나 도난당했다. 각 대학의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이에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서강대 학생들은 도난된 현수막 자리에 “이곳은 성소수자의 인권이 도난당한 자리입니다”라는 새 현수막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지원팀에서 ‘현수막 게시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허가해주지 않아 한참을 실랑이하고, 우여곡절에 붙인 현수막이 1시간도 되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내용이 보이지 않게 뒤집히는 고난을 겪”었다. 성신여대 성소수자 모임 ‘큐리스탈’은 단 몇 시간 만에 뜯겨 나간 대자보 자리에 “성신에 존재하는 혐오의 민낯을 똑똑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적어 붙였다. 이화여대 성소수자 모임 ‘갤럭시’는 지난 주말 사이 붙인 대자보가 사라지자 “이왕 지극정성 포비아(성소수자 혐오) 할 거면 반박 자보를 붙여달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다. 

 

이화여대성소수자 모임 갤럭시가 최근 붙인 대자보도 며칠 사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이화여대성소수자 모임 '갤럭시'가 최근 붙인 대자보도 며칠 사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이화여대 성소수자 모임 갤럭시

 

성신여대 내에 붙은 나도 잡아가라 대자보도 일부 훼손됐다.
성신여대 내에 붙은 '나도 잡아가라' 대자보도 일부 훼손됐다. ⓒ성신여대 성소수자 모임 큐리스탈

 

지난달 28일 이화여대 게시판에 붙어 있던 대자보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찢어졌다. ⓒ이화여대 성소수자 모임 갤럭시
지난달 28일 이화여대 게시판에 붙어 있던 대자보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찢어졌다. ⓒ이화여대 성소수자 모임 갤럭시

일련의 사태는 대학 내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움직임과 이를 옹호하는 구성원들이 존재함을 보여줬다. 오늘날 대학 내 성평등과 인권 감수성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부끄러운 사태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성소수자 인권이 빠르게 대학 사회의 주요 의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2015년 김보미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시작으로 이예원 전 고려대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한성진 카이스트 부총학생회장, 마태영 연세대 총여학생회장, 장혜민 계원예대 총학생회장, 백승목 성공회대 총학생회장 등이 당당히 커밍아웃하고 당선됐다. 대학 중앙동아리로 인정받지 못하던 성소수자 모임들은 하나둘씩 정식 인준을 받았다. 서강대에선 지난해 12월 성소수자협의회가 인준을 받아 의결권을 지닌 학생 중앙운영 단위가 됐다. 52개 대학 56개 성소수자 단체들의 모임인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큐브)’는 지난달 20일 대선 후보들에 차별금지법 제정 등 성소수자 인권 보장을 위한 공약을 요구하는 기자회견도 열었다.

익명을 요구한 서강대 재학생 A씨는 “성소수자 이슈가 점점 학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상황에서 대자보·현수막 부착은 단순한 의견 표명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아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거나,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고 고립된 다른 학생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리는” 연대 활동이라는 말이다. 그는 “대자보·현수막 훼손 행위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행위이자, 소수자의 인권과 희망을 짓밟는 폭력이다. 결코 가벼운 일로 보아 넘길 수 없다. 대학 내 성소수자 인권 보호를 위한 대학·사회 차원의 개입 노력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대학가에 확산되고 있는 성평등 인식이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젠더 관념에 기초한 “반쪽짜리 평등”은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많은 이들이 고민 없이 받아들이는 젠더 이분법이 ‘제3의 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을 조장한다는 얘기다. 숙명여대 재학생 B씨(25)는 “대학 내 성평등 기구만 봐도 대개 ‘양성평등’센터, ‘양성평등’상담실이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다. 이 기회에 이분법적 젠더 관념만을 ‘정상’으로 여기도록 하는 기존의 대학 규정과 기구들을 재검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