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성폭력에 노출돼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고요하지?

 

폭력이 한 사회의 문화일 때

피해자의 침묵 역시 문화가 된다

 

글쓰기 모임에서 기수마다 꼭 함께 읽는 책이 있다. 너울의 『꽃을 던지고 싶다』. 어린 나이에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저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재해석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모임 오리엔테이션 때 이 책을 소개하면, 사람들은 너무 무거울 거 같아서 읽기 무섭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처음 후기를 나눌 때도 비슷한 반응이다. “마음이 아파요.” “어떻게 한 사람한테 이런 일이 연속으로 일어날 수가 있죠.” 이렇게 저자를 불쌍하게 여기는 시간은 잠시, 어느새 누군가 입을 연다. “사실 저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지난 모임에서는 항상 밝은 A가 먼저 자신의 경험을 꺼냈다.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당시에는 찝찝한 성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성폭력이었네요.” 눈물 흘리며 기억을 떠올리는 A의 말에, 대학생인 B도 입을 열었다. 하숙집에서 함께 지내던 남자 선배에게 술을 먹은 채 성폭행을 당했는데, 취할 때까지 마신 자신을 탓하느라 그 일을 흐지부지하게 흘려보냈다고. 선배와 마주칠까 봐 하숙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던 몇 년 전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말했다. A, B, C, D…. 도미노처럼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단지 ‘불쌍하고 안타까운 한 여성의 개인사’라고 책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책을 통과하며 자신을 향한다. “불쌍한 여자로 동정받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83p) “다행히 피해를 경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너 아니면 나’라는 자매애로 대해주었으면 좋겠다.”(85P) 책에서 내내 자신을 유별나고 불쌍하게 바라보지 말고 자매애로 봐달라고 부탁하는 저자의 말이,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체득된다.

이렇게 책을 매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덧 가슴에서 울컥 질문이 올라온다. 다수의 여성이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고요하지?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잊고 살았지? 어떻게 꾸역꾸역 자기 안에 가둬두고 살아왔던 거지?

폭력이 한 사회의 문화일 때, 피해자의 망각과 침묵 역시 하나의 문화(혹은 의무)가 된다.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기록하지 않으므로, 침묵을 깨야 하는 책임은 불합리하게도 피해자의 몫이다. 누구나 겪어서 특별해 보이지 않는 폭력적인 문화에서 스스로의 피해를 밝히기도 어렵지만, 그 이후에도 피해자 혼자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정확하게 응시하고 입을 열 때, 더 이상 세상은 고요하지 않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라는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은 정확하다.

몸으로 겪은 감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잊고 있어도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다. 저자 역시 평안한 일상을 보내던 중, 어느 오후 불현 듯 자신을 침범했던 폭력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계획하는 역사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성을 잊게 한다. 나는 내일에 대한 기대도, 계획도 가질 수 없었다.”(107p)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책, 불확실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책, 상처를 정확하게 응시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책, 끝내 독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끄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이 외면하던 상처를 불러내고, 상처를 상처로 머물지 않게 자극을 주는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읽고 쓰는 일이 살아가기 위한 과정 그 자체이며, 연대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배웠다. “절대로 잊히지 않기에 영원히 피해자로 고정될지 모르는 위험에 맞서, 살아있는 존재이기 위하여 우리는 쓰고, 또 읽는다.” (7p)

『꽃을 던지고 싶다』/ 너울 / 2013 /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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