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 논리로 혐오 발언 난무

차별금지법 제정은 제자리걸음

 

페미니즘 의제를 둘러싼

기나긴 혼란과 투쟁 살펴보니

 

소수자들의 진리의 언어,

바로 그것이 페미니즘의 언어

 

지난해 5월 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여성들이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해 5월 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여성들이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신자유주의가 헤게모니를 잡으면서 지난 10년 간 대학 내 여성학 수업은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폐강되거나 성문화 연구 등으로 교과명이 전환됐다. 그런데 요즘 눈에 띄는 변화는 페미니즘이 ‘팔린다’는 것이다. 끈질긴 여성혐오는 마침내 2016년 여름 강남역 살인사건을 유발했고 이를 둘러싼 해석 투쟁이 일어났다.

그 학기 필자와 여성학 수업을 했던 학생들 중 몇 몇은 이 사건을 계기로 남자친구가 자신의 몸에 체화된 성/폭력에 대한 공포를 이해 못한다는 이유로 싸웠고 급기야 헤어지기도 했다. 언론에 따르면 2015년 여성발전기본법이 양성평등기본법으로 개정되면서 경상남도 등 몇몇 지자체들은 여성주간을 양성평등주간으로 변경하고 양성평등 행사를 여성단체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예산을 절반으로 삭감했다. 홍익대를 비롯해 대학들도 ‘시대에 걸맞지 않는(?)’ 총여학생회를 폐지해왔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거의 모든 논쟁이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늪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옹호되는 분위기에서 “네 입장에서 네 말이 옳다면, 내 입장에서 내 말이 옳다”라는 상대주의의 논리로 여성뿐 아니라 성적 소수자, 이주민에 대한 혐오 발언이 난무하나 차별금지법과 혐오발언 규제법 제정에 관한 논의는 수년 째 제자리걸음이다. 이런 혼란과 갈등을 설명하기 위한 ‘해석의 언어’로 페미니즘이 요청되는 것일까? 이 글은 페미니즘 언어의 역사 안에서 이런 이슈들을 살펴본다.

평등의 언어로서 페미니즘

‘남성과 동일한 여성’ 권리 주장

페미니즘의 언어의 역사는 ‘평등’과 ‘차이’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진화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형으로 존재한다. 영화 ‘서프러제트’가 보여주듯 지금 우리가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여성 투표권은 20세기 초 선대 여성들의 죽음을 불사한 참정권 투쟁으로부터 시작됐다.

특정 그룹의 우월성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이중의 부정은 긍정 곧, A=~(~A)이라는 논리학의 원칙에 의해 구성된다. 당시 여성은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 합리적 판단이 불가능한 존재(~A)로 규정됐고, 고로 여성이 아닌 남성들은 이성적인 존재(~(~A))로 규정됐다.

따라서 오직 남성만이 투표권을 향유할 자격을 지닌 시민이 됐다. 또한 공/사 영역의 분리의 원칙에 따라 정치, 경제 등 공적영역은 평등한 시민인 남성의 영역으로 반면 재생산뿐 아니라 종교, 문화등 사적인 차이들은 여성의 영역인 가정에 귀속됐다.

식민화 담론 역시 다른 그룹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해 서구인의 우월성을 획득한 대표적인 예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인들은 비합리적이며 폭군의 전제정치의 지배를 받는 야만인(~A)으로, 그들은 자치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합리적이며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치 국가를 이룬 문명화된 서구인들(~(~A))의 통치를 받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익이라는 궤변으로 제국주의의 잔인한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성애주의는 성적소수자들을 비정상 혹은 변태(~A)로 규정함으로써 그 대립항으로 이성애의 정상성, 자연성(~(~A))을 보증받는다.

이들 담론의 공통점은 내가 가지고 싶지 않은 모든 부정적인 속성을 타자에게 투사하고 타자의 존재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기긍정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A로 타자화된 이들의 투쟁은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첫째, “나는 ~A가 아니라 A”라며 평등을 주장하는 것. 둘째, ~A로 가치절하 된 정체성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하면서 정체성의 정치학을 추구하는 것. 셋째, “특정그룹을 타자화하는 이 담론적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 효과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내부의 이질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권력질서 그 자체에 도전하고 해체하면서 것.

페미니즘의 언어는 이런 경로를 따라 발전해왔으며, 지금은 여성 내부의 차이에 따라 복수의 페미니즘들(feminisms)들로 분화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은 여전히 복잡하게 교차하는 이 세 개의 경로 안에서 대항 언어를 생산하고 있다.

페미니즘 제1물결은 첫 번째 노선을 따랐다. 여성들은 우리도 남성과 같은 이성적인 인간, 생각하는 인간이니 투표권을 달라고 외쳤다. 그들은 ‘남성과 동일한 여성’이라는 평등의 언어로 권리를 주장했고 공적인 영역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성취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시기 여성운동은 정치, 경제, 학문 등 모든 영역에 남성과 ‘다르지 않은’ 여성들을 포함시켜 뒤섞이면서(Add Women & Stir) 성차별을 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기존의 권력 질서를 그대로 놓아둔 채 단지 여성들을 첨가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유리천장을 깬 여성들, 하지만 ‘여성’임에 대한 자각과 고민이 없는 여자들은 대개 명예남성으로 똑같은 ‘권력자’가 되곤 한다. 모든 영역에 성차별이 만연하나 권력욕에서만큼은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18대 대선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총괄선대본부장은 “여성대통령은 국민이 혐오하는 우리 정치에 대한 최고의 쇄신” 이라며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하지만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슬로건 아래 “열 자식 굶기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 모두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던 그는 정치에 대한 혐오를 극대화하고 국민 모두가 불행한 대한민국을 만들었고, 전 여성부 장관이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던 조윤선 역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주범으로 구속됐으니, 이들보다 이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는 좋은 예도 없다.

차이의 언어로서 페미니즘

역차별 주장과 진정한 의미의 평등

베트남 반전운동, 흑인권리운동, 성해방 성정치 등 다양한 정체성의 정치학이 분출했던 1960년대 미국에서 출현한 페미니즘 제2물결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는 단일한 성계급으로 대문자 여성(Woman)을 토대로 남성과 ‘다른’ 여성, 즉 여성의 ‘차이’를 급진적으로 이론화했다.

일례로 심리학자인 캐롤 길리건(1997)은 심리 실험을 통해 여성의 도덕 발달 단계는 남성과 다른 것, 따라서 비교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당시 주류 심리학에서는 ‘하인즈의 도덕적 딜레마’를 이용해 콜버그가 이론화한 도덕 발달의 6단계에서 남성의 도덕성은 정의를 최고의 원칙으로 삼는 6단계까지 발전하지만 여성의 도덕성은 옳고 그름이 주변인들의 평가에 달려 있는 3단계에 머문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길리건은 가정환경과 성적이 비슷한 11세의 소년, 소녀 제이크와 에이미에게 콜버그가 했던 동일한 심리 실험을 진행했다. 이 딜레마를 수학 문제로 간주하는 제이크는 하인즈가 약을 훔치는 것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생명 존중이 재산권보다 더 정의로운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이 소년은 사회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선 법이 존중돼야 하나 법은 사회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현행법이 악법이라면 합의를 통해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법에 호소하는 태도를 보인다.

반면 에이미는 이 딜레마를 인간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간주한다. 이 소녀가 우려한 것은 재산권이나 법이 아니라 약을 훔치는 행위가 부인에게 미칠 영향, 즉 하인즈가 감옥에 가면 돌볼 사람이 없어 부인의 병이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에이미는 세계를 인간관계의 그물망으로 보고 그 그물망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의 요구에 부응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약사의 잘못은 소유권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호소하는 타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법보다는 마을 사람들이 약사를 설득하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길리건은 남성이 추상적인 도덕법칙(정의)에 의거해 판단을 내린다면, 여성은 특수한 맥락에서 구체적인 타인과의 관계성(보살핌의 윤리)을 고려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며, 따라서 여성의 도덕성은 열등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다른 것이라고 결론 맺는다(길리건, 1997).

또 이 시기 차이의 언어로 페미니즘은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낙태, 임신, 출산, 모성과 같은 여성의 몸의 경험을 드러내고 사적인 문제로 치부됐던 성폭력, 가정/아내폭력의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이끌어내 선대 페미니스트들과는 달리 공/사 영역의 분리에 도전했다.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운동의 치열한 투쟁으로 이제 한국사회에서도 아내폭력은 가족 문제가 아니라 경찰이라는 공권력 개입이 필요한 사회 문제가 됐고 부부강간 역시 법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내가아직 살아있는 건 운이 좋아서다” “여혐은 이제 여성의 생존 문제다”라는 포스트잇을 붙이며 그 억울한 죽음을 애도했고 자신에게 체화된 폭력에 대한 공포를 공론화했다. ⓒ여성신문DB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내가아직 살아있는 건 운이 좋아서다” “여혐은 이제 여성의 생존 문제다”라는 포스트잇을 붙이며 그 억울한 죽음을 애도했고 자신에게 체화된 폭력에 대한 공포를 공론화했다. ⓒ여성신문DB

하지만 낙관은 이르다. 여성 의제를 사소화하려는 유령은 끈질기게 회귀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제가 아직 살아있는 건 운이 좋아서입니다” “여혐은 이제 여성의 생존 문제입니다”라는 포스트잇을 붙이며 그 억울한 죽음을 애도했고 자신에게 체화된 폭력에 대한 공포를 공론화했다. 이는 여자라는 이유로 묻지마 범죄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선 여자의 몸을 가진 나도 결코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단지 우연이라거나 ‘불운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법, 제도, 정책뿐 아니라 성평등 의식, 성인지적 감수성 향상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정치 의제이기에 여성들은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역사성 속에서 이 사건을 ‘한 정신병자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혐오에 기반한 증오범죄’로 규정했다.

이에 일군의 남성들은 “한 정신병자가 저지른 살인을 가지고 왜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모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나는 남성들이 느끼는 이 ‘억울함’이 심각한 오류에 기초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앨런 파커 감독의 ‘미시시피 버닝’은 1964년 미국 미시시피에서 흑인인권운동을 벌이던 세 명의 청년들이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 KKK’ 단원에게 끔찍하게 살해, 암매장당하는 사건을 다룬 영화다.

미국 시민들은 인종주의에 기반한 이 추악한 증오 범죄에 대해 공분을 금치 못했고 이 사건은 그해 차별금지법인 민권법 제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민권법은 KKK와 같은 일부 정신병자들이 저지른 살인을 가지고 모든 ‘선량한’ 백인들을 가해자로 모는 것이었나? 남성들의 논리대로라면 “그렇다”라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민권법 제정 이후 증오범죄를 일삼던 KKK 세력이 급속히 약화됐다는 사실이다.

역차별 당하는 ‘억울함’과

진정한 의미의 평등

특히 민권법은 제7조에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를 명시해 평등의 의미를 확장해냈다는 의미를 지닌다. 몇해 전 교육인적자원부가 내걸었던 표어인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기회, 수능’이 상징하듯 프랑스 시민혁명이 탄생시킨 근대의 보편적 가치인 평등은 기회의 평등으로 축소되곤 한다.

한국에서는 잘 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 자녀들의 학업성취도는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부모의 재력에 의해 좌우된다. 그렇기에 흙수저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 표어의 허구성을 꿰뚫어본다. 적극적 조치는 바로 이 허구성, 즉 조건이 불평등하다면 기회의 평등이 주어져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여성, 저소득층, 장애인, 이민자, 소수민족, 흑인 등 소수자 집단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구조화된 차별로 누적된 조건의 불평등에 처해 있다.

이처럼 조건이 불평등한 상황에서 주어진 기회의 평등은 마치 운동화를 신은 아이와 나막신을 신은 아이가 100m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하니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적극적 조치란 이처럼 과거로부터 축적돼 온 조건의 불평등을 국가가 시정,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장애인 주차장과 같은 장애인을 위한 적극적 조치를 제외한 생리공결제, 여성할당제, 지방인재 채용목표제,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 다문화가족지원법은 예외없이 역차별 논란에 시달린다. 특히 성평등을 목적으로 한 적극적 조치들은 여혐의 손쉬운 표적이 돼 왔다.

여성주간 예산 삭감과 총여학생회 폐지 주장이 대표적이다. 1996년 남성발전기본법은 없는데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된 이유는 정치, 노동시장을 포함해 전 분야에서 누적되어 온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했고, 이에 의해 여성들이 뿌리 깊은 불평등에 조건지워지기 때문이었다. 또1980년대 총남학생회는 없는데 총여학생회가 만들어진 것은 총학생회(사실 총학생회가 곧 총남학생회였다)가 남성중심성을 극복하고 학내 성폭력 등 여성 의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지난 20년간 성평등이 어느 정도 성취됐기 때문에 이제 이런 적극적 조치들은 시대착오적이며 오히려 역차별을 유발하니 폐지해야 한다고.

그런가? 진부하지만 통계 수치를 살펴보자. 세계경제포럼이 매해 발표하는 세계 성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한국의 성격차 지수(Gender Gap Index)는 144개국 중 116위로 최하위권이다. 서울 소재 대학들에서 남학생 단톡방에서의 성희롱 사건이 끊이지 않고 매해 각 대학 성평등 센터에 접수되는 성추행, 성폭력 사건도 수백 건에 달하며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여성 외모에 대한 비하 발언으로 취임 11일 만에 직무권한 정지를 당했다. 성차별에 의해 누적돼 온 조건의 불평등은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이는 여성을 위한 적극적 조치가 여전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평등을 모든 사람을 무조건 똑같이 대하거나(사회주의의 실패) 똑같은 경쟁의 기회를 주는 것(신자유주의의 실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평등은 또한 차이의 반대항도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란 ‘같은 것을 다르게 대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같게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평등이란 같은 것을 다르게 대하지 않기 위해, 즉 차별하지 않기 위해 기회의 평등뿐 아니라 조건의 평등을 보장하는 한편 다른 것을 같게 대하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 평등의 이름으로 차이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보다 복잡한 개념이다.

따라서 평등-차이에 대한 보다 복잡한 사유가 가능한 사회, 장애와 같이 눈에 보이는 불평등 조건뿐 아니라 비가시적인 불평등 조건까지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만이 진정한 의미의 평등을 향유할 수 있다.

평등의 의미를 기계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들도 군대에 보내라” “여학생 휴게실은 있는데 왜 남학생 휴게실은 없냐?” “생리공결제는 역차별이다” “총여학생회는 여학생만의 투표로 회장을 선출하는데 남학생의 등록금까지 사용하고 있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 “다문화 가족에게 우리가 낸 세금 다 퍼준다” 등등 억지 주장들이 난무하는 사회, 그럼에도 이러한 주장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평등을 향유하기에 너무 천박하다.

진리의 언어로서 페미니즘,

오직 투쟁만이 진리를 자유케하리라!

니체가 절대 진리인 신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 철학으로부터 과학철학, 사회학, 인류학, 여성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 분야는 절대적 진리 혹은 실증주의적 객관성 개념을 해체해왔다. 그 결과 하나의 진리(Truth)는 복수의 진리들(truths)로 대체됐다.

이런 변화의 핵심은 인간은 누구도 총체적인 신의 시선(God’s eye view)을 가진 보편적인 인식주체일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모든 인간은 특정한 시공간에 입장지워져 있으며 자신의 입장에서 세계를 본다. 개인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주관적 경험, 의식, 가치, 신념, 지식 속에서 재구성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모든 인식주체의 인식의 내용은 부분적(partial)이고 불완전하다.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이처럼 모든 인식이 불완전하다면 누구의 인식이 더 진실한 것인가? 더욱이 이 부분적인 인식들이 서로 모순되고 상충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의 인식주장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라는 곤경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만큼 이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론화해 온 지식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미국에서 여성운동이 대학 내 학문분과로 자리잡으면서 찌라시, 문건, 대자보, 팜플렛, 피켓의 형태로 존재했던 여성주의 지식은 여성학이라는 보다 정교하고 이론화된 지식으로 발전했고 여성은 아카데미 지식 생산의 주체가 됐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아카데미로 진입한 여성학은 “대학 내 학문분과라면 너의 지식생산의 방법인 방법론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는 페미니스트 입장론(feminist standpoint theory)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페미니스트 입장론의 두 축은 성찰성과 정치적 실천(praxis)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인식주체가 자기 인식의 불완전성을 인정한다면 그/녀에게는 인식대상의 관점과 경험에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성찰성이 요청된다. 페미니스트 입장론은 인식주체가 인식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주변화된 사람들의 경험과 관점을 이해하고 이를 더 많이 포함해 덜 왜곡되고 객관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봤다(Harding, 1991). 즉 페미니스트 입장론은 경합하는 인식주장들 중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이들의 관점에 기반한 지식이 더 객관적이며 이를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기준으로 확립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입장론은 왜 주변화된 사람들의 인식을 더 진실한 것으로 보는 걸까?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꾸려가는 빈곤 노인들이 박근혜를 지지했던 것처럼 주변화 된 사람들은 존재 조건 자체가 중심의 관점과 의식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중심에 있는 사람들 보다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비판적 문제제기를 하는데 있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의 주변성과 억압을 자각하고 변화를 위한 저항을 시작한다면, 투쟁 과정을 통해 그들은 실제에 대해 총체적이고 진실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하딩, 1991).

그러므로 상충되고 경합하는 다수의 인식주장이 있다면 주변화된 이들이 정치적 투쟁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이 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반성폭력 운동의 피해자 중심주의의 근거였다. 이런 역사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은 ‘피해자 제멋대로주의’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슬라보예 지젝은 역사적으로 진리는 항상 소수의 진리였다고 말한다.

프랑스 혁명 중 자코뱅 당이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시키려할 때 온건파인 지롱드 당은 법률에 위배된다며 인민의 뜻에 따른 ‘민주적 해결’을 주장했다. 이에 로베스피에르는 “이미 시작된 혁명은 인민의 주권의지의 실현이고 이는 왕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설령 왕이 무죄라도 투표에 부치는 것은 혁명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자 동시에 인민의 주권의지를 무효화하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이런 단호함은 소수파는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언제나 영원히 옳다는 신념에 기반 한 것이었다(지젝, 2011). 요컨대 진리는 처음엔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소수의 ‘외로운 진리’이므로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결코 다수결의 원칙에 의존할 수 없다. 또한 시몬느 베이유의 말처럼,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누구보다 먼저 진리의 빛을 보고 그것을 자유케하는 투쟁을 시작한 이 소수는 늘 지배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이었다.

 

“이 세계에는 가장 굴욕적인 나락에 거지보다 더 낮게 떨어진 계급 집단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관심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특별히 가지고 있어야 할 존엄과 이성 그 자체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야말로 사실상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건 모두 거짓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에 실린 시몬느 베이유의 말

 

 

이화여대 본관 점거 농성 중인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지난해 9월 2일 서울 서대문구 이대 본관 앞에서 최경희 총장 사퇴와 경찰의 소환조사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이화여대 본관 점거 농성 중인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지난해 9월 2일 서울 서대문구 이대 본관 앞에서 최경희 총장 사퇴와 경찰의 소환조사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해 여름 최순실 게이트의 도화선이 됐던 이화여대 학생들의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반대 투쟁도 마찬가지였다. 본관 점거농성이 시작되자 학교 측은 “외부에 배후세력이 있다”는 진부한 버전으로, 일부 시민들은 “이기심에 기반한 밥 그릇 지키기”라고 비난하며 이 진리-사건을 사소화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200명 농성에 1600명의 경찰을 투입해 막 타오르기 시작한 진리의 불씨를 짓밟고자 했다.

진리를 향한 투쟁은 언제나 처음엔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주변화된 이들의 고독한 투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진리-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유지하면서 이를 ‘진리’로 명명하기 위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고(바디우, 2008) 결국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전했다. 우리는 이들의 투쟁에서 “권력구조와 억압의 기제는 투쟁을 통해 보다 선명히 드러나며 투쟁은 주변화된 이들의 언어를 정교화하기 때문에 소수자들은 결코 투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페미니즘 방법론의 제1언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렇다. 소수자의 진리의 언어로 페미니즘은 ‘오직 투쟁만이 진리를 자유케하리라!’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구축돼 왔다.

필자 김정선씨는

필리핀 결혼이주여성 공동체에 대한 논문으로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주여성 인권포럼 멤버로 이주 관련 연구와 활동을 해왔고 공저로는 『지구화 시대의 현장 여성주의』 『우리 모두 조금 낯선 사람들, 공존을 위한 다문화』가 있다. 현재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선 ‘사랑의 언어’로서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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