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정치가 강간 모의,

돼지 흥분제 논의를 다루는 게

2017년 한국의 한심한 현실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해도 강간범이 영웅 노릇 하는 히어로 액션물은 끝나지 않는다. 미국 HBO가 제작한 ‘웨스트 월드: 인공지능의 역습’을 간단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웨스트 월드’는 4차 산업혁명으로 ‘혁신된’ 성 산업 테마파크다. 미래의 ‘남성 주인공’들은 가상현실 테마파크를 방문해 ‘안전하게’ 강간과 폭력과 살인을 즐긴다. 인공 지능과 가상현실 기술은 성폭력 히어로들의 쾌락을 위한 혁신적 도구이고 로봇은 인간이 맡았던 젠더화 된 성노예 역할을 반복한다.

‘4차 산업혁명’과 ‘강간 모의’가 한자리에 모인 선거전에서 ‘웨스트 월드’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한편 인공지능 로봇의 상용화가 주로 감정 로봇, 가족 로봇, 섹스 로봇에 집중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기술과 젠더 정치의 측면에서도 ‘웨스트 월드’는 논의 거리를 제공한다.

현재 로봇 상용화가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는 분야는 돌봄 노동, 감정 노동, 성 산업 부분이다. 역설적으로 그간 가족이나 여성의 일로 여겨진 돌봄 노동, 감정 노동, 성 산업이 가장 쉽게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간 여성의 영역이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녔었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물론 로봇 상용화는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고, 4차 산업혁명은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뭔가 막연한 ‘미래 어젠다’ 정도로 취급되는 선거 국면에서 기술과 젠더 정치 같은 의제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냉전 적폐 세력의 색깔 타령을 생방송으로 보아야 하는 처지에 페이스북이 뇌파로 문자를 입력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뉴스는 마치 공상과학영화처럼 느껴진다.

페미니즘 정치가 강간 모의, 돼지 흥분제 같은 논의를 다뤄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돼지 흥분제 소동이 가라앉기도 전에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이 문재인 후보 공약에 “매춘부 합법화 정책이 있다”고 발언해 비판을 받았다.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이 비판 성명서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성매매 여성에게 낙인을 찍는 차별 표현인 ‘매춘부’라는 ‘워딩’을 일국의 국회의원이자 한 정당의 선거대책위원장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이다.

한국의 가부장제는 냉전적 남성 중심주의-군사문화를 포함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냉전 적폐 세력 청산이 페미니즘 정치의 한 과제인 이유다. 냉전적 남성 중심주의는 성폭력, 성평등, 소수자 차별에 대한 기본적인 ‘교양’과 공통감각도 자리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교육 제도는 군기, 규율화, 차별의 정당화, 노골적 성차별 등 냉전 군사주의를 재생산하는 도구가 됐다. 한국 교육 제도에서 페미니즘 교육이 발 디딜 여지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페미니즘 교육이 없는 학교 교육을 통해 성차별과 성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감수성이 ‘기본 소양’으로 여겨지고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교육 현장에서 밀려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차별과 성평등에 대한 기본 교양이 없는 사회에서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해봐야 결국 ‘웨스트 월드’ 같은 세계가 도래할 뿐이다.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이 가끔 “페미니즘을 트위터로 배워서….”라는 자조와 자부가 혼재된 농담을 하는 것을 본다. 페미니즘 대중 강의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신기하고 ‘대견한’ 일로 여길 것만은 아니다.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강한 시점에서도 제도 교육에서 페미니즘 교육은 전혀 도입되지 않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낙관적 담론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과학 교육에 페미니즘 교육과 정치를 도입할 것을 요구하는 ‘페미회로’와 같은 단체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다. 그러나 여전히 4차 산업혁명에 대해 기술적 측면에서만 관심과 담론이 편향된 것은 한국의 젠더 정치의 전형을 보여준다.

뇌파로 단어를 쓰는 기술은 뇌파, 염력 등 이전에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른 어떤 영역이 자본과 기술의 새로운 원천이 되는 일련의 흐름의 한 사례일 뿐이다. 정동 연구가 멜리사 그레그가 이미 지적했듯 ‘영혼’ 혹은 ‘비물질적인 것’을 둘러싼 새로운 각축전이 이미 시작됐고 생명공학을 비롯한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자본이 이미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다. ‘강간 모의’와 4차 산업 혁명 담론이 혼재된 대선 직전의 이 상황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교육과 정치가 왜 필요한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절망하기에는 너무나 해야 할 일이 많은 게 오늘날 한국 페미니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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