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페미니즘 역사를 쓰다/ 프랑스 페미니즘의 역설과 도전

남장한 채 여성 무장권 주장하며

프랑스 혁명 이끈 여성 투사들

 

정치·사회운동으로 양성평등 성취

근대 ‘페미니즘’ 탄생시킨 혁명

 

“여성은 단두대 오를 권리 있다

연단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고 백남준 작가가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설치작품 ‘전자요정 구즈’.
고 백남준 작가가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설치작품 ‘전자요정 구즈’.

“프랑스 혁명은 여성에게도 진짜 혁명적이었는가?” “여성을 위한 프랑스 혁명은 없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영향을 미친 미증유의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여성이 정치 무대에 하나의 집단세력으로 등장해 정치운동과 사회운동을 통해 양성 평등을 성취하려는 근대 ‘페미니즘’을 탄생시켰다. 근대 초기 유럽에서는 여성들이 봉기에 가담하는 일이 하나의 전통을 이뤄왔고, 파리 민중들이 일으킨 수차례의 봉기에서 여성들이 맨 앞장 서 ‘선동자’ 역할을 하던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여성 상퀼로트들의 3색 모장 투쟁

1789년 10월 5일 아침 국민방위군보다 앞서 여성들이 베르사유궁으로 행진했으며, 이후의 여러 봉기도 부녀자들의 시위로 시작됐다. 혁명적 공화국의 출현은 양성의 정치적 권리문제만이 아니라 양성간의 관계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부여했다. 프랑스 여성들은 자신을 개인으로서보다는 전체의 일부로 파악했기 때문에 18세기 내내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시민권이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여성시민(Citoyenne)’으로 불린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모순 어법은 혁명공화국의 기본 원리와 배치돼 있던 양성 관계에서 연유했다. 혁명이 일어나자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정치클럽이나 협회를 만들어 활동했으나 새로운 질서의 창조자들은 공화주의 모성을 강조하며 여성들을 가정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했다. 당시 유럽에서 여성의 정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나라는 프랑스였다. 비록 여성들이 혁명 결사체의 정식회원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뜨개질하는 여자들(tricoteuses, 주로 서민층 여성으로 뜨개질감을 들고 집회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처럼 일부 여성은 30군데 도시에서 독자적으로 정치 클럽을 결성해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성 투사인 테루아뉴 드 메리쿠르는 남장을 하고 여성의 무장권을 주장하며 혁명을 이끌었으며, 폴린 레옹은 자연권에 의거해 여성도 국민방위군의 한 부대로 편성해달라는 내용과 함께 300명의 넘는 파리여성의 서명이 기재되어있는 청원서를 의회에서 낭독했다. 또 여성 상퀼로트들은 모든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3색 모장을 달아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대대적인 ‘3색 모장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혁명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상적 여성상은 ‘공화국의 어머니’였다. 여성의 임무는 아이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랑을 심어줌으로써 아이들을 훌륭한 공화국의 시민으로 키우는 일이었다. 여성들이 정치집회에 참가해 혁명의 원칙을 배우는 것은 허용되었으나, 정치토론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혁명기의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성해방과 보편적 인권의 획득을 꿈꿨다.

1789년 8월 26일 국민의회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해 인간평등과 주권재민의 원칙을 선포했지만 여성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문제는 여전히 논의밖에 있었다. 여전히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사적 영역에 머무르는 자연적 존재일 뿐이었다. 이 선언은 공화국의 ‘시민권’에서 배제된 여성, 노예, 유색 자유민들의 불만을 예고하고 있었다.

여기서 ‘인간(Homme)’의 권리 선언은 보편적 인간의 권리를 말함인가, 아니면 보편적 ‘남성(homme)’의 권리를 말함인가? 이 질문은 남성이 여성을 배제하는 용어상의 모순에 대한 지적이다. 여성은 프랑스의 시민이기 때문에 법의 규제를 받았지만, 또 한편으로 여성은 프랑스 시민(Citoyen)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1791년 헌법은 민법상의 성인 연령 규정을 남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했을 뿐 아니라 여성도 이성적 사유능력과 독립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갖는 주권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남성의 권리’만이 언급되자 당시 문필가이자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이던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의 권리’를 소리 높이게 된다.

구즈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여성의 권리’,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사회계약 형태’의 세 가지 내용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여성의 권리’에서 구즈는 여성의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하고 자연적인 것이며,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갚아야할 채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남성들의 편견과 무지, 전제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구즈가 공화주의자들인 지롱드파, 특히 콩도르세와 매우 흡사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대의 계몽사상가인 디드로, 볼테르, 루소 등이 여성의 정치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반면 콩도르세는 ‘여성의 시민권 승인에 대해’에서 여성의 법적 지위 문제를 지적하고,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마찬가지의 논리에 의거해 구즈는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에서 인간의 권리가 남성형만이 아니라 여성형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당연히 여성들에게도 법에 의거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부여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10조와 11조에서 구즈는 사상과 견해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단두대로 끌려가는 올랭프 드 구즈.
단두대로 끌려가는 올랭프 드 구즈.

성차 시민권과 공화주의 모성

성차 시민권에 입각한 1791년 헌법과 달리 1792년 헌법은 여성의 법적 권리에서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법적으로 혁명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향유하고 행사할 수 있는 시민적 인격을 부여하고,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개인임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시민의 자격과 부부의 이혼문제를 주요사안으로 다룬 이 법은 남편과 아내를 동등한 존재로 취급해 양자의 동등한 권리를 규정했을 뿐 아니라 각종 민사상의 소송 절차도 남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하도록 규정했다.

 

‘여성의 권리’를 집필한 정치평론가 올랭프 드 구즈.
‘여성의 권리’를 집필한 정치평론가 올랭프 드 구즈.

그러나 시민적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이것이 곧 공민적 자유, 즉 정치적 권리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민적 자유는 장차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므로 시민적 자유를 획득한 이상 정치적 권리도 인정받아야 마땅했다. 혁명을 계기로 공민으로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최초로 제기됐지만 문제 해결도 혁명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여성도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과 여성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구즈는 혁명이 표방한 자유‧평등‧우애의 원칙이 지닌 한계를 폭로하고, 그 원칙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에 의문을 던졌다. 구즈의 입장에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압제야말로 온갖 형태의 불평등이 파생되는 근원이었으며, 남성들이 자신들을 결박하고 있던 사회적‧정치적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자마자 양성간의 전쟁을 격화시키고 있다고 봤다.

이렇듯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만들어낸 공화주의 정신의 하나인 보편주의, 특히 보편적 시민권 개념이 갖는 내재적 모순인 ‘성차 시민권’ 개념은 프랑스 혁명이 여성들을 배제한 남성들만의 ‘반쪽혁명’이었다는 한계를 갖게 만들었다.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후 구즈를 포함한 혁명가 페미니스트들도 같은 운명을 걸었다. 국민공회는 여성정치클럽들을 모두 해산시켰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가 한층 더 심화되면서 여성들은 시민 사회에서 종속적 지위로 격하됐다. 여성들에게 프랑스 혁명은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굴레가 됐던 셈이다.

 

베르사이유궁으로 행진하는 여성들
베르사이유궁으로 행진하는 여성들

마리안느의 딸들, 공화국 시민이 되다

19세기 프랑스 페미니즘 운동은 구즈의 열망대로 연단에 오를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여전히 여성이 권리와 의무를 모두 갖는 주권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여성참정권 운동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사건이나 여성의 공민권 문제를 둘러싼 시험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보편적 시민권이 갖는 한계를 명백히 드러냈다.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 남성들에게만 최초의 보통선거권이 주어지자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참정권 문제를 공론화했다. 잔 드로앵, 레옹 리셰, 마리아 데렘으로 이어지는 19세기 초기 페미니즘 운동은 참정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후 단식 투쟁이나 방화 같은 과격한 수단을 사용했던 영국 페미니스트들의 영향을 받은 위베르틴 오클레르는 여성참정권 획득이야말로 가장 선결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선거권을 갖지 못한 여성이 세금을 내는 것은 부당하다며 세금납부 거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후 마들렌 펠티에, 루이즈 바이스 등 페미니스트들의 지속적인 여성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반대라는 높은 장벽에 부딪혀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1901년 여성참정권 관련 법안이 의회에서 최초로 발의되었으나 거부당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남성들이 전선으로 떠나자 여성들의 경제활동 비율이 늘어났다.

전쟁 이후 정상으로의 복귀가 이뤄지면서 ‘여성 본연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여성의 사회 활동은 위축되는 듯 했으나 여성참정권 획득, 노동·교육의 평등,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해 투쟁하던 페미니즘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19년 5월 여성참정권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이 이를 거부하면서 또 다시 좌절됐다. 그 배경에는 여성이 대개 남성보다 보수적이므로 여성참정권 허용은 보수파의 등장과 민주주의의 후퇴로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여성들은 조국 수호를 위해 시민 정신을 보여주었다. 국내외적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여성들도 자원병, 노동자, 간호사, 사무직원 등으로 동원됐다. 대독협력 정권인 ‘비시 프랑스’에 대항해 런던과 알제를 중심으로 ‘자유 프랑스’를 이끌던 드골은 “남성들보다 더 사려 깊고, 더 신중한 여성들 없이 레지스탕스는 해방활동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공적을 인정했다.

드골은 1944년 4월 21일 행정명령을 통해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해 정치적 평등의 길을 열어줬다. 드골의 정치적 결단은 ‘새로운 프랑스’의 여성들에게 150년에 걸친 족쇄를 풀어줬고, 1945년 4월 시의원 선거와 10월 하원선거에서 여성들은 처음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46년 헌법 전문은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재확인하며, 모든 분야에서의 양성 평등원칙을 포함시켰으며, 헌법 제4조는 “양성의 모든 시민과 국민은 법이 정한 조건에 따라 투표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마침내 ‘마리안느의 딸들’은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시민’이 되었다. 훗날 드골은 『전쟁 회고록』에서 “이 엄청난 개혁은 50년이나 지속돼온 논쟁들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할 만큼 프랑스 여성참정권 획득은 지난한 투쟁의 결과였다. 일각에서는 드골의 여성참정권 부여가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의 결과보다는 ‘국제적 우연’ 덕분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시대착오적인 공화국과 결별하고 현대적인 공화국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여성을 완전한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정치적 통일체에 포함시키는 것은 국가적 화해의 몸짓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1848년 유럽국가 가운데 최초로 남성 보통선거권을 인정한 프랑스가 정작 여성참정권 문제에서만은 한창 지체된 ‘프랑스적 예외(L’exception française)’에서 벗어나 프랑스 민주주의의 터전을 더욱 확장시키는 전환점이 됐다.

1948년 헌법에 의거해 한국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한 지 어언 70여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대표성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03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 여성의 대표성 확대를 위한 여성할당제가 입법화된 이래 국회의원 및 지방의회 비례대표 부분에서 50% 여성할당제가 받아들여지면서 여성의 정치참여가 어느 정도 확대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할당제가 수적인 대표성뿐만 아니라 실질적 대표성을 확대시켰느냐는 점에 있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여성할당제의 궁극적 목표인 불평등한 사회구조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여성이 의회에 진출해 여성 정치세력화의 외연을 더욱 확장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265년 전 성차 시민권에 항거하며 “여성들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구즈의 외침이 지금도 우리의 영혼에 울림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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