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닮은 맑은 어린이’ 키우고 싶다

~23-1.jpg

“친정어머니가 6·25전쟁 후 전쟁고아들을 키우는 고아원을 맡아 하셨지요. 집에 오면 엄마 없는 것이 싫어 난 시집가면 절대 사회생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결혼한 후 살림만 했어요.”

아이들과 청소년이 바로 커야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중인 김혜순(66세)경북청소년상담실장의 고백이다.

경상북도 안동이란 지역에서 여성으로 활동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부부가 시내 나들이 할 때도 남편이 앞서 가면 부인은 다섯 걸음 뒤에 따라 가야 하는 곳이 바로 안동이다. 요즘도 아닌 몇십년 전이라면 더 했으리라. 그런 분위기에서 김혜순 실장은 단연 앞장서 온 여성운동가이다.

“77년도에 시에서 의사부인들한테 봉사를 좀 하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때 안동시 새마을봉사단장을 맡게 되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봉사하면서 베푼 것보다 더 많은 걸 얻어

그렇게 시작된 사회생활이 그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봉사하면서 내가 남에게 베푼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어요. 그런 것들이 저를 성장시키고 의식을 변화시켜 주었지요.”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가 평양신학교에서부터 목사 일과 3·1운동을 함께 하신 인연으로 남편을 만났다고 한다. 그런 시아버지였기에 며느리의 사회활동에 큰 힘이 되어 주셨다. 그리고 남편은 언제나 한결같이 뒤에서 힘이 되어 주었다.

김혜순 실장은 81년부터 거의 15년간 안동여성회관관장과 여성회관유아원장을 함께 맡으며 많은 걸 배우고 깨달았다고 한다.

“유아원은 시의 보조를 받아 선생님들 월급은 주었지만, 여성회관의 경우엔 예산은 물론 지원도 없는 상태라 강사비를 줄 형편이 못 되었어요. 관장직도 월급 받는 직이 아니었거든요. 배우러 오는 사람은 많은데 가르치는 사람에게 줄 돈은 없고, 그래서 지금은 무형문화재이고 안동소주기능보유자인 조옥화씨가 음식강의를, 예절강의는 김수자(다인회 회장)씨가 맡아 주셨고, 레크레이션 등 다른 강의들을 친구와 선후배들한테 봉급도 주지 않으면서 부탁했어요. 또 바자회를 통해 수익금을 거두면서 겨우 꾸려 나갔지요.”

특히 그가 상담활동을 하기 위해 벌인 노력은 남다르다.

“상담하러 오는 여성들은 많은데 내가 상담할 줄 알아야죠. 안동에는 ‘생명의 전화’ 밖에 없었으니 거기서 상담 활동을 배웠어요. 그리고 부족하다 싶어 공부를 좀 더 해보겠다고 30여명을 모아 전문심리학교수를 초빙해 3개월 동안 수강도 했구요.”

그를 비롯한 30명은 그렇게 모여 열심히 공부한 후에 여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힘이 되어주자고 상담실을 내겠다고 신청을 했다. 그러나 상담경력 3년 이상에 석·박사 이상이어야 한다는 자격기준에 못 미쳐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 때 그 30명한테 들은 원망이 얼마나 컸는지 하하하. 몰랐던 게 너무 많았어요. 세월이 지나면서 느낀 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보다는 그저 열심히 보람있게 하다 보면 자기 것이 되어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 있더라는 거예요.”

@23-2.jpg

▶ 또래 상담자 훈련을 마치고 청소년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김혜순 실장.

20년여 상담활동 ‘가정가꾸기’에 심혈

그는 거의 20년 가까운 상담활동을 통해 그 방면엔 전문가가 되었다.

94년 경북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그는 ‘가정가꾸기’ 운동과 청소년문제에 특히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경북지역의 보수성 때문에 여성의식 바꾸기가 급선무라는 생각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패널토의와 세미나를 통해 풀어나갔다. 그는 청소년 문제는 어머니의 의식이 바뀌어야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단체의 회원들부터 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94년 모금운동을 벌여 마침내 청소년 상담실을 만들었다.

점차 그는 기초를 다지는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80년부터 유아원 원장을 맡아 오다가 그의 숙원 사업이었던 혜성어린이집을 97년에 세우게

된다.

혜성어린이집의 목표는 ‘하늘을 닮은 맑은 어린이’를 키워 내는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 맑고 밝게 자라 광대한 포부를 펼치라는 뜻이에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아이가 이 속에서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아이들이 자라 세상을 움직인다 생각하면 늘 마음이 설레지요.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해야 될 일이다 싶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큰며느리가 원감을 맡아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데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23-3.jpg

◀ 청소년 건전육성 워크숍에서 강연하는 김혜순 실장.

그는 또한 문화관광부와 경상북도가 97년에 설립한 청소년건전육성기관인 청소년종합상담실과 청소년자원봉사센터에서 개소 이래로 각각 실장과 소장직을 맡고 있다. “도지사 부부의 청소년 교육의 열의가 남달라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다른 시·도는 상담실과 봉사센터가 따로 있지만 우리 도는 한 건물에 다 있어 찾아오는 학생들이 활발하게 이용해요. 상담도 하고 자원봉사, 그룹별 토의, 영화감상, 그리고 컴퓨터실·DDR·노래방기계 이용까지 하루에 100여명 이상이 이곳을 찾아요.”

그는 청소년종합상담실에 찾아오는 아이들과 상담 활동과 프로그램활동을 같이 하다보니 그들과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청소년교육 그들 눈높이로…또래도우미 효과

“특히 또래 상담자 훈련은 큰 효과를 보고 있어요. 만남의 쪽지로 이뤄지는 상담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름대로 해결 방안도 모색하는 등 열심이에요. 또래도우미 활동을 활발히 한 학생들에게 시상도 하고 있어요. 2001년에도 집중적인 또래교육을 할 예정이에요.”

아기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20년 동안 현장에서 지켜 본 그는 강조한다. “부모들이 깨어 있어야 해요. 저는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은 내 자녀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일찍 발견해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계발해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꾸중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힘이 되어 주고 길을 안내해 주는 게 부모의 몫이죠.”

활동가로서 24년, 남편의 외조와 가족의 협조가 없었다면 아무 것도 하지 못 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어머니, 애국자의 자녀는 남의 머슴밖에 안 됩니다. 그거 아세요?”라고 말하던 3남 1녀의 자식들도 이해와 격려를 해 주는 큰 힘이 되었다. 그 아이들이 모두 잘 자라 각자의 삶을 잘 꾸려 가는 것이 더 없이 고맙다는 김혜순 실장.

“나이가 들면서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잘 안 들리게 되잖아요. 이것은 눈으로 본 것, 귀로 듣는 것보다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라는 말이 아닌가 싶어요. 나이 들면서 느끼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나직하다. 그러나 그가 디뎌온 봉사의 길 20년 위에는 큰 힘이 있다.

<경북지사 권은주 통신원>

김혜순 실장 약력 1934년 안동출생, 81∼90년 안동시여성회관관장, 81∼95 안동시여성회관 유아원장, 94∼98년 경북여협회장, 95∼98 경북도의회의원, 88년 자랑스런 경북인 도지사 표창, 99년 대한민국 청소년육성유공수상, 81∼현재 민주평화통일 상임위원, 97∼현재 경북청소년종합상담실장, 97∼현재 경북청소년자원봉사센터소장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