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혜리

서울올림픽 개막식 피켓걸 등장

 

발전을 선전하는 국제적 장에서

여성은 환대 수단… 국가 주도의

성산업 지원책은 그 노골적 버전

 

성차별 요인이 발전의 동력 사용

한국은 저개발 국가, 개도국 소녀

‘더 나은 삶’ 지원할 철학이 있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입장하는 피켓걸로 선발된 덕선의 모습. 선수단이 불참하자 덕선은 우여곡절 끝에 우간다 피켓걸로 개막식에 등장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입장하는 피켓걸로 선발된 덕선의 모습. 선수단이 불참하자 덕선은 우여곡절 끝에 우간다 피켓걸로 개막식에 등장한다. ⓒtvN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와 ‘피켓걸’ 덕선이

작년 한 해를 강타했다고 해도 손색이 없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1988년 서울 쌍문동 봉황당 골목길에 사는 다섯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그 중 1971년생인 쌍문여고 2학년 성덕선(혜리 분)은 서울대에 다니는 공부 잘하는 언니에게 치이고, 귀한 아들인 동생에게 치이는, 공부 못 하는 씩씩한 둘째 딸로 등장한다.

덕선은 건국 이래 최대의 행사라는 서울올림픽대회에 피켓을 들고 마다가스카르 선수단과 함께 개막식에 입장하는 ‘피켓걸’로 선발됐다. 이 피켓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내기 위해 덕선은 반 년 동안 연습에 매진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방에서도, 심지어 집 앞 마당에서는 한복을 입고, 개막식 입장을 위한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 같은 연습은 올림픽경기장에서도 이어졌다.

피켓걸을 지도하는 여성은 덕선에게 “표정! 온화하게! 팔! 팔! 표정! 온화하게!”를 외치며 덕선의 표정, 시선, 걸음걸이, 자세를 지도한다. 덕선은 한복을 입은 다른 피켓걸들과 함께 올림픽 경기장 한쪽에 주저앉아, 개막식 다른 행사에 등장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태권도 도복을 입은 남자 꼬마무리들이 일으키는 먼지바람 속에서도 단팥빵과 바나나우유를 먹으며 불평 없이 대기한다. 이때 덕선의 뒤에는 ‘88올림픽 완벽한 준비’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덕선이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어떤 대가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아마 덕선은 행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다음에서 이어진 덕선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방송사에서 피켓걸 덕선을 인터뷰하러 나온 장면이 등장한다. 리포터는 덕선에게 “그래도 가장 힘든 점이 있었다면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덕선은 국어교과서를 읽듯 “국민적인 행사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순간이 있었더라도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금세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라는 ‘모범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인터뷰 도중 덕선은 처음으로 마다가스카르가 서울올림픽대회에 대한 보이콧으로 불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덕선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크게 실망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한복을 입은 환한 미소의 우간다 피켓걸로 개막식에 등장하게 된다.

덕선이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쌍문동 봉황당 골목길 사람들은 모두 환호한다. 텔레비전을 보던 덕선의 아버지는 개막식 화면에서 둘째 딸을 발견하자 “나왔다! 나왔다!”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덕선의 어머니는 축하 전화를 받으면서 “덕선이 맞다, 맞다”고 답변한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는 시집이나 갈까 했는데 갈수록 얼굴이 핀다. 지 언니보다 낫다”며, 전화기너머 누군가에게 신이 나서 덕선이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공부 못 하는 만년 천덕꾸러기 둘째 딸이었지만 이날만큼 덕선은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딸이 됐다.

덕선이 서울올림픽대회 개막식에 등장한 것이 이렇게나 자랑스러운 일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도 이제 국제적인 행사를 치르는 발전된 나라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국민적 자부심’이 놓여 있다. 사실 한국은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을 서울로 유치하고도 숙박시설, 경기장 등 제반시설을 갖추지 못해 이 대회를 반납한 경험이 있다. 이로 인해 제5회 대회를 치른 태국 방콕에서 6회 대회가 다시 열렸고, 이때 한국은 태국에 일종의 벌칙금적 부담금 25만 달러를 지불했다. 국가 경제의 저개발 문제로,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굴욕을 겪은 경험이 있는 것이다.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우민화정책인 3S정책-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의 머리글자를 딴 말- 등 여러 이유로 다시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자는 의견이 등장하게 됐고, 결국 대표단의 필사적인 올림픽 유치활동 결과 88년 올림픽대회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됐다. 1981년 9월 30일의 일이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전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보이기 위한 온 국민의 준비가 시작됐다. 이러한 준비에는 결국 서울올림픽 경기대회를 통해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라는 국민적 기대도 관련이 있다. 경향신문 1984년 9월 26일 기사에는 그 해 실시된 올림픽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서 “국민은 88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잘 치러질 수 있다(78.2%)는 자신감에 차 있으며 90% 이상이 국력 신장과 국민의식 향상에 88올림픽이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88올림픽의 서울 유치를 거국적 경사로 평가(96.9%)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KDI(한국개발연구원)가 내놓은 『88올림픽의 경제성 평가와 효과분석』이란 보고서에서는 88서울올림픽은 경제성이 높은 흑자 대회가 될 것이라며 생산, 소득, 고용 부문 등에 미치는 국민 경제적 효과가 클 뿐만 아니라 국제수지면에서도 5억 달러 이상의 수지개선 효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분석됐다. 발전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국민은 자신의 일상과 역할을 재정비 하며 ‘세계인’들과 만날 채비를 하게 된 것이다.

발전주의 시대 국민 동원의 성별 정치

덕선네 가족, 나아가 쌍문동 봉황당 골목 사람들은 덕선이 ‘온화한 표정’으로 세계 시민들을 맞이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동참하는 그 순간을 맞았다. 비록 텔레비전 개막식 무대에 등장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선진화된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올림픽 경기장에 걸려 있던 ‘88올림픽 완벽한 준비’라는 구호는 사실 전 국민의 준비와 동참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협의회가 발간한 『국민참여운동백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 가장’들은 내 집 앞을 쓸면서 자발적이며 근면하고 선진화된 의식을 가진 국민으로서 전 세계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 요청됐다. 물론 이는 내 집을 가진 아버지들에게만 부여된 역할이었다. 반지하 셋방에 살던 덕선의 아버지는 텔레비전에 등장한 덕선을 보고 환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이 굴욕을 딛고 88서울올림픽 경기대회를 통해 전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던 발전이라는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숨겨지고 축출되거나 갱생돼야 했다. 이러한 과시적 잔치를 앞두고 양동 재개발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서울 도심부 재개발이 이뤄졌는데, 그 결과 윤락여성, 빈민, 장애인 등 수많은 도시 빈민들은 각종 재활시설에 수용됐다.

당시 윤락여성들이 갱생 시설로 보내진 것은 단순히 빈민들을 추방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 상품화된 성의 범람을 걱정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6년 1월 기생관광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하던 11개 대형 요정업체에 총 20억 원이나 되는 돈을 특별융자 형식으로 지원해주었고, 국제관광공사에서 발행하는 외래 관광객용 지도에도 기생관광 장소인 요정의 위치를 각국어로 친절하고 상세하게 밝혀놓기도 했다. 이에 질세라 서울시는 룸살롱과 카바레 등 103곳을 ‘모범업소’로 지정해 여러 특혜를 주기도 했다. 외국인들에게 보이는 미관을 고려해 네덜란드의 ‘홍등가’처럼 커다란 유리창을 갖춘 성매매 업소 ‘유리방’이 본격 등장한 것도 올림픽을 앞두고였다. 청량리, 미아리, 용산, 천호동 등 서울의 성매매 업소 집결지는 물론 전국 성매매 업소 집결지에 ‘환경개선작업’의 명목으로 대대적인 정비 사업이 실시됐다. 이러한 정부의 집중적인 성매매 업소 장려 정책은 자연스레 1980년대 말 전국의 유흥산업이 호황을 이루는 기반이 됐다.

국가 주도의 성산업 지원 정책이 이뤄지던 시기였지만 1981년 9월 30일에 태어난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호돌이, 호순이가 되었다. 이 중 최고로 뽑힌, “주눅 들지 않고” 순수하고 건강하게 자란 한 소년은 굴렁쇠를 굴리며 서울올림픽 개막식 무대에 등장했다. 이 퍼포먼스를 기획한 이어령 당시 이화여대 교수는 1998년 9월 21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굴렁쇠 굴리는 소년을 통해 전쟁을 겪고 이뤄낸 한강의 기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근면한 가장이 키워낸 건강한 소년의 형상으로 세계무대에 등장시켜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 결과 거대한 규모의 국제 대회를 치러낼 수 있을지 의심하는 세계인의 눈초리 앞에서 과시할만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미래를 축복받게 됐다. 참으로 영리한 기획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응답하라 1988’에서 대기 중이던 피켓걸들을 가로질러 모래바람을 만들며 뛰어가던 태권도복을 입은 남자 꼬마무리도 이 같은 상징을 체현한 이들일 것이다.

물론 서울올림픽 개막식에는 여성도 등장한다. 먼저 남성들은 인류사를 상징하는 대서사시적 개막식 무대에서 선단을 맞이하는 농악대로, 중고를 두드리는 300명의 장정으로, ‘혼돈’을 정리하며 의기충천하게 나무판을 격파하는 태권도단으로, 화합을 상징하는 고놀이의 싸움꾼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백색의 튜닉을 걸친 44명의 희랍 여인으로, 운동장을 돌며 춤을 추는 선녀 차림의 50명의 한국 여인의 모습으로 개막식 무대에 등장한다. 여성들은 실존 인물로 개막식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고 역사를 초월한 선녀의 자태와 미소로만 세계의 화합과 경쟁의 장에 들어서고 있다. 이처럼 과시와 축복의 장은 성별화돼 있다.

올림픽 기간 내내 덕선과 마찬가지로 ‘전 국민’의 이러한 환대, 호의를 전달할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필요했다. 그리스 올림피아 헤라 신전에서 채화된 성화가 국내 첫 기착지인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선녀 복장을 한 제주여고생 200명이 이 성화가 지나갈 길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성화가 지나가는 길, 해외 귀빈들을 맞이하는 자리에는 늘 꽃술을 흔들고, 부채춤을 추는, 한복을 입은 전국의 여고생들이 있었다. 당시 서울올림픽 경기대회에 동원된 학생들에 대한 성별 통계를 발견할 수는 없으나, 뉴스에 따르면 그 전체 수는 223개교 1만3079명이라고 한다. 특히 김포공항 근처에 살던 여고생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이러한 해외 귀빈 맞이 행사에 동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환대의 의전을 수행할 목적으로 “우정의 사절”, “99미스특급선발대회”, “88미스올림픽선발대회” 등 무수히 많은 미인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87년 6월 19일 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88올림픽 시상식 요원으로 여성들만 선발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는 “시상자와 입상자 안내원 54명은 외국 귀빈이나 선수들을 상대해야 되는 점을 감안, 외국어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응모자를 우선 선발하게 되는데 우정의 사절단 심사 통과자 92명을 우선 배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발전을 선전하는 국제적 장에서 여성들은 직접 과시하고 축하받는 위치에 있지 않으며 환대의 수단으로 매개된다. 발전은 여성들의 역사와 구체성을 지우는 방식으로 기록되며 추진되고 있었다.

일찍이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에 내재된 문화 논리와 가부장정을 지적한 김은실 이화여대 교수는 여성이 국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수동적 도구로 만들어지고 행위 주체자인 남성의 보조자로 만들어진 논리를 지적했다. 여성은 바로 그들의 성의 경제학에 따라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으로 구분돼, 어머니/아내, 임금 노동자, 매춘 여성으로 범주화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의 핵심이다. 그 이면에는 남성/국가의 생산력 증대, 발전이라는 단일한 논리가 있다. 성장이 미래의 유산으로 남겨질 수 있다는 신화적 믿음과 이러한 믿음에 기반해 경제적인 성취를 이룩한 국가에 걸맞은 시민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철저하게 성별화돼 있었다.

글로벌 시대 발전과 접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근면한 아버지는 건강하게 키운 소년을 세계 무대에 내보였다. 유년시절 국민국가를 넘어 세계와 접속한 기억이 있는 소년은 지금 어떻게 발전을 경험하고 있을까. 대회가 끝나자마자 조선일보는 국제사회에 ‘올림픽 4위 국가’로 떠오른 한국 사람들은 세계관이나 생활 태도에 있어서도 달라져야 한다고 일장 훈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생활태도는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가. 얼마전 미국 IT 전문매체인 ‘디 인포메이션(The Information)’에 실린 소식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디 인포메이션은 세계 최대 차량공유업체 우버의 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인 트래비스 칼라닉이 3년 전 한국을 방문할 당시 ‘룸살롱 접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칼라닉이 지난 2014년 여자친구와 우버 직원 5명을 데리고 ‘에스코트 가라오케 바’에 방문했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5명의 직원 중 남성 직원 4명은 번호표를 달고 등장한 여성들을 제각기 옆자리에 앉혀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우리는 이 같은 일이 발생한 이유를 상상할 수 있다. 우버 최고경영자를 접대한 자는 아마 이 외국인 CEO를 한국식으로 융숭하게 환대하고자 룸살롱 접대를 제공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비즈니스 성공 열쇠는 인맥과 접대”라는 말이 공공연하다. 한국에서 인맥의 핵심 요인, 즉 상대를 지속적으로 만나고 관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접대 능력을 통해 결정된다고 한다. 비즈니스 성공 방식을 늘어놓은 몇 권의 책만 읽어봐도 한국에서 접대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남성들 간의 카르텔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성들의 환대를 매개하는 방식으로 실천된다.

예컨대 룸살롱 접대는 “노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업무의 일부로 이해되고 실천된다. 2006년엔 접대 자리에서 입은 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다. 포털사이트에 ’외국인 접대‘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검색어를 입력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룸살롱과 요정에서 이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전국의 룸살롱 정보가 집결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접대 성격, 접대 대상자의 지위, 인원, 접대 장소, 접대 목적 등을 나열하면서 ‘견적’을 내 달라는 질문이 하루에 수십 건씩 올라온다. ‘좋은 장소’에서 ‘프로급 여성’에게 접대받을 수 있는 접대 장소를 섭외하는 일은 회사원의 업무 능력으로 연결되고 있기에 성매매방지법에도, 김영란법에도 상관없이 오늘도 공공연하게 업소 정보가 유통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접대는 남성들 사이에서 공적 인맥을 사적화할 수 있는 통과의례의 사회적 장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술 접대’ ‘룸살롱 접대’의 장에서도 접대받는 사람을 환대하는 역할은 여성에게 전가된다. 한편 남성간의 접대는 인맥 관리와 경쟁, 혹은 승자독식의 정글에서 필요한 생존의 기술로 통용되고 있다. 이 같은 성별화된 방식의 접대가 사회적으로 통용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직장에서 여성들은 회사, 일터라는 공적 장에서 이어지는 특정 거래나 협상의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의미다.

업무 시 협상과 거래는 성산업 종사자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한 남성들 간의 거래인 것이며, 이는 현실에서 여성들을 배제하는 또 하나의 논리로 다시금 사용된다. 물론 이때 배제의 논리는 접대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들의 능력 문제로 귀결된다. 글로벌시대 발전 역시 여성들의 환대를 통해 상찬되고 있지만, 발전의 무대에 여전히 여성들은 등장하지 않거나 역사가 지워진 온화한 표정의 환대하는 자로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발전을 일구는 것에 성차별적 역할이 부여됐던 역사를 돌아보건대 우리는 발전에 대한 새로운 열망, 상상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 김주희씨는 

성매매 문제에 오래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연구해왔으며,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성매매 산업의 금융화’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FICT와 망원사회과학연구실에 거점을 두고 공부하고 있으며 이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빈곤의 여성화와 관련한 후속 연구를 계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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