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임금격차 해소’ 세계적 화두로 떠올라

독일·아이슬란드·일본 등은 정부가 적극적 노력 나서

한국 여야 대선주자들도 관련 공약 내걸어

대대적 사회 변혁 필요하지만...“진보에는 강제성 필요”

 

여성의 노동을 평가절하하는 기울어진 노동 시장을 바로잡지 않고는 성평등 사회를 논할 수 없다. 2017년 4월 4일 뉴욕에서 열린 동일 임금의 날(Equal Pay Day) 시위 현장.
여성의 노동을 평가절하하는 기울어진 노동 시장을 바로잡지 않고는 성평등 사회를 논할 수 없다. 2017년 4월 4일 뉴욕에서 열린 '동일 임금의 날(Equal Pay Day)' 시위 현장. ⓒFlickr

“직원 수 25명 이상인 모든 고용주는 남녀 간 임금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의무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의회가 지난 4일(현지 시간) 발표한 전례 없는 ‘남녀 동등임금 인증제’ 법안의 요지다. 독일에선 오는 7월 ‘임금공개법’이 시행된다. 여성 노동자가 원한다면, 같은 일을 하는 남성 동료의 연봉을 확인할 수 있고, 차별이 있다면 연봉 인상을 요구할 수 있다. 독일 정부는 이를 통해 남녀 임금 격차가 크게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성별임금격차 해소’가 다시 전 세계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기울어진 노동 시장을 바로잡지 않고는 성평등 사회를 논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우수한 인재 확보가 관건인 ‘4차 산업혁명’ 시대, 여성의 노동을 평가 절하하는 문화는 비효율적이며 저성장 위기 돌파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인식도 높아졌다. 

양적 완화 위주의 ‘아베노믹스’로 경제 부흥을 꾀했던 아베 정부가 지난해 12월 기조를 전환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정책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은 최근 직원 수 250명 이상 기업의 경우 남녀 직원의 연봉 차이를 공개적으로 보고하도록 규정했다. 오스트리아와 벨기에에도 유사한 규정이 있다. 미국과 스위스의 연방 관급공사 계약자들은 성별 임금 정보를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애플, 인텔, 존슨앤드존슨, 페이스북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도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수준의 급여를 보장하겠다고 최근 약속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민주노총 등 여성·노동단체는 세계여성의날인 지난달 8일 오후 3시부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조기퇴근 시위 ‘3시 스톱(STOP)’을 열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여성노동자회, 민주노총 등 여성·노동단체는 세계여성의날인 지난달 8일 오후 3시부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조기퇴근 시위 ‘3시 스톱(STOP)’을 열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런 흐름은 ‘세계에서 가장 기울어진 운동장’인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2016년 기준 36.3%.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를 시작한 2002년 이후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한국 남성이 100만원을 벌 때 여성은 63만7000원을 번다. 하루 8시간 일한다고 칠 때 여성은 오후 3시부터 공짜로 일하는 셈이다. 

UN과 국제노동기구(ILO)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기본적 인권으로 규정한 지 60년이 넘었다. 한국에서도 1989년에 개정한 남녀고용평등법에 이 원칙이 명문화됐다. 하지만 여성의 일은 아직도 ‘덜 가치 있는 일’로 분류된다.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생계보조자’라는 가부장적 인식은 구조적 성차별을 합리화한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집계하는 OECD 국가의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5년째 꼴찌다. 고용평등법 위반으로 노동관청에 신고할 수는 있지만, 사내에서 ‘찍히거나’ 사표 낼 각오부터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여성계와 노동계가 “국가 차원에서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민주노총 등 여성·노동단체는 세계여성의날인 지난달 8일 오후 3시부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조기퇴근 시위 ‘3시 스톱(STOP)’을 열고 “명백한 차별의 증거, 성별임금격차를 해소하라!”라고 외쳤다. 여성노동자회는 지난달 30일 발표한 19대 대선 정책제언에서 “여성의 저임금은 남성의 장시간 노동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며, “전체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는 이데올로기로 동원된다. 결국 여성의 저임금은 모든 노동자를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로 내몰리게 한다”고 주장했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여야 대선주자들도 모두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이 문제를 최우선 해결 과제로 꼽았으며, 근로기준법에 ‘고용 형태’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을 넣자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달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성별임금격차는 여성이 비정규직에 집중돼 있고, 여성이 주로 하는 돌봄노동에 대한 처우가 열악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문제가 해결 없이 여성들의 경제력은 지체되고 여성의 삶의 질 향상은 어렵다”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지난달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성별임금격차는 우리 사회의 최우선 여성 과제”라고 말했다. 안 후보는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내세워 “대기업 고용형태 공시와 공공기관 경영공시에 도입해 투명한 임금정보 공개를 의무화하고, 특히 공공기관이나 근로자 300인 이상 사용 사업장은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한국 노동시장에 적용하기 힘들다며, 비정규직 채용을 원천 금지하는 공약을 내놨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실현을 공약으로 내걸고, 이를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고, 기본급 비중은 올리고 복잡한 수당은 줄이는 방향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하며, ‘성별 고용·임금 공시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관련 공약을 제시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임금의 평등을 실현하려면 대대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사정 대타협을 통한 직무급·성과급 임금 체계로의 개편, 공정한 업무 평가 시스템 구축, ‘여성의 노동’에 대한 인식 변화 노력이 급선무다.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편견도 넘어야 할 산이다. 대선후보가 ‘페미니스트’를 선언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운동가 출신 인사가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후보 ‘지지 철회’ 파동이 이는 게 지금 한국 사회다.

그러나 새 노동 정책의 방향은 이제 뚜렷하게 성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노동의 구조적 성차별 해소는 다른 분야의 성평등 촉진으로 이어진다. 이를 실현하려는 국가 차원의 적극적 노력이 없다면, 전 세계의 성별 임금격차와 고용 불평등은 170년이 지나도록 해소되지 않으리라는 게 세계경제포럼(WEF)의 추산이다. 반세기 전 임금평등법을 제정하고도 최근 더 강도 높은 법안을 마련한 ‘성평등 선진국’ 아이슬란드의 행보를 부러워하기만 할 일이 아니다. 소르스테이든 비글륀손 사회평등장관은 지난달 30일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사업장 내 성차별적 장벽 중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부숴버리고 싶습니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진보에는 강제성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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